사진 출저: 나무위키에서 퍼왔습니다.




캔자스 주에서 새로운 수기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장소의 상황에 비해 너무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이 수기는 놀라움을 자아냈다. 서부시대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책의 뒷면에는 저자로 추정되는 ‘시그리드 그릴라도티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월요일 16th of February. 1874.
적을 내용은 얼마 없지만 오늘 따라 유독 눈에 밟혀 펜을 든다. 늘 그렇듯 같은 일의 반복이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하숙집의 빨래와 잡일을 돕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숙집 주인의 맏딸이자 내 학생이기도 한 아이슬라가 나를 돕는다는 것이다. 아이슬라는 내게 정말 소중한 학생이다. 불길처럼 붉은 머리를 가진 주근깨가 사랑스러운 소녀는 작년 혹독한 겨울에도 다행스럽게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올해를 맞이했다. 똑똑하고, 의젓하며, 이타적인 학생을 내가 가르친다는 건 소중한 행운이다. 그녀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1）

토요일 28th of Feburary. 1874.
오늘은 내 생일이다. 정확히는 생일에 가장 가까운 날이 맞는 표현이겠다. 윤년에 태어난 나에게 생일은 사 년에 한 번씩 돌아오니까. 오늘 아침 아이슬라가 나에게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가 그녀의 할머니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다. 이빨도 없고, 머리도 벗겨진 이 할멈은 아이슬라의 말에 의하면 자그마치 칠순이라고 한다. 세상에 칠순이라니!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아이슬라에게 괜히 미안해지며, 또 생일 축하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는 내가 동정심을 느낀다. 그래도 괜찮다. 식사 후에 아이슬라의 방으로 가 그녀를 위로해 주며 고마움을 표하니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안겨 들었다. 몰래 우느라 붉어진 눈으로 배시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 생일 축하해, 나. （2）

수요일 8th of April. 1874.
또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했다. 이곳에서 맞는 세 번째의 봄이다. 마사추세츠에서 캔자스로 옮긴지 벌써 삼 년이라니. 농번기의 시작으로 나는 물론 마을 사람들이 한창 바쁜 시기이다. 오가며 내 학교에 다니는, 그리고 새로이 다닐 학생들을 마주치고는 한다. 이 작은 마을의 어른들은 여전히 나를 외지인으로 경계하는 느낌이 있지만, 순수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비친다. 비록 어른들의 입김 탓인지 나를 낯설어 하는 아이들도 보이지만, 선생이라는 직업 덕분인지 나를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는다. 마을 사람들을 도우며 아이들에게 틈틈이 인사를 건넸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여름의 끝이 기다려진다.

토요일 18th of April. 1874.
특이한 꿈을 꿨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 남기고파 책상에 앉아 촛불을 켰다. 꿈 속에는 아름다운 여성이 나왔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붉은 머리, 그리고 진한 황금을 눈으로 가진 듯한 여성이었다. 꿈속의 나는 마치 그녀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 같았고, 또 꿈 속에서 의식으로만 존재함에도 그녀가 나를 꿰뚫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처럼. 어딘가 오싹하면서도, 그녀가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상한 꿈이다.

금요일 1st of May. 1874.
세상에. 아이슬라의 남동생 토미가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겨우 여덟 살인데. 오늘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에 모여 앉아 기도를 드리던 도중, 갑자기 짧은 비명과 함께 발작이 시작되었다. 가여운 토미. 신께서 보우하사 그에게 가호가 있기를. 아이슬라가 이를 보고 큰 충격을 먹었다.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불행히도 나는 어릴 적 이런 경우를 몇 번 보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빈도는 많아지고 발작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부디 이번 일이 단편적인 경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일요일 3rd of May. 1874.
확실하다. 토미가 나를 무서워하고 있다. 그간 가벼운 의심이었던 것이 어제 증명되었다. 마을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 시간, 어딘가 시선이 느껴져 몰래 눈을 뜬 나는 토미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눈을 감았지만 찰나 속에서 그의 두 푸른 눈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가 나를 불편해 하는 것이 발작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건 어째서일까. 그 날부터 그는 나와 단둘이 있는 것을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비록 아이슬라 만큼은 아니어도, 토미 역시 나를 잘 따르고는 했는데. 가슴이 아프다.

이것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꿈 속에서 그 여자가 또 나왔다. 이번에는 꿈이 조금 달랐다. 나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내가 아이처럼 느껴질 만큼 컸다. 새하얀 손으로 내 머리를 빗질해주며 흥얼거렸던 노랫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따스한 손길과 희미하지만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는 콧노래가 선명하다.

토요일 16th of May. 1874.
그 여자가 나오는 꿈의 빈도가 늘기 시작했다. 일주일 중 네 번은 그녀의 꿈을 꾸는 것 같다. 꿈을 시작되면 멀리서 나를 부르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린다. 네 이름이 아님에도, 그녀가 부르는 이름이 나인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면 난 고양감을 느끼며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간다. 마치 한 마리의 고양이가 제 주인에게 몸을 비비듯, 그녀가 손을 뻗어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리는 날 발견한다.
꿈에서 깨어날 때면 일말의 아쉬움마저 느끼는 나에게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도대체 그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나를 찾는 것이며 나에게 잘해주는 것일까? 의문은 많지만 해답은 요원하다.

월요일 15th of June. 1874.
맙소사.

황충 떼가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크고 노란 메뚜기 때가 뒤덮었다. 집도, 새로이 심은 작물도, 뒷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도 순식간에 샛노랗게 끓는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변한 모습이 출애굽기의 그것을 재현한 것 같았다. 황충 때를 보고 급히 빨래를 걷으러 나갔는데 아이슬라가 따라왔다. 벌레들이 지나가며 내는 날개의 진동소리, 몇 십 마리의 벌레의 따가운 다리가 몸 위를 발발 기어다니는 느낌은 소름 끼쳤으며, 심지어 몇몇 마리는 우리를 깨물기까지 했다. 겨우 안으로 피신한 나와 아이슬라는 몸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녀의 상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흡사 수두에 걸린 것처럼 팔에 난 상처, 개중에는 피가 나는 상처도 있었다. 울먹이며 상처를 살펴보는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나를 달래본다.（3）

수요일 17th of June. 1874.
그녀가 오늘도 꿈에 나타났다. 오늘의 난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녀의 자애로운 황금 색 눈이 나를 향하는 느낌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 그건 마치… 신의 위대한 이름 하에 나의 불경함을 용서하사, 충만한 감정이었다.

토요일 8th of August. 1874.
꿈속의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날 ‘그릴라도티르’라 불렀다.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락을 느낀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마치 나의 본질을 그 한 마디로 정립한 느낌이었다. 나의 본질,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민낯을 보이는 느낌이었지만, 아이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듯 나 역시 그러했다. 가만히 그 이름을 입안에 굴려본다. 그릴라도티르. 그릴라도티르.
시그리드 그릴라도티르.
좋은 울림이다. （4）

일요일 9th of August. 1874.
토미가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아침에 나를 마주치자 귀신을 본 것처럼 창백해지더니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다행히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솔직해지자면 나를 보고 발작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불쾌함마저 느낀다. 어른스럽지 못한 내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다. 불쾌하고, 또 불쾌한 밤이다. 개학이 걱정된다. 토미 또한 학교에 다닐 터인데, 내가 이런 연약한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까?

목요일 3rd of September. 1874.
좋지 않은 시작이다.

오늘 첫 수업을 가졌다. 몇몇은 익숙한 얼굴이었고, 몇은 새로웠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도 있었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익숙한 몇몇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고, 난 그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내 이름을 시그리드 그릴라도티르라 소개했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태연한 척하며 정정하고, 잠시 어머니의 처녀 성이라 둘러대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짓궂게 비웃는 두 아이, 엘리와 메튜를 교탁 앞으로 불러 회초리 질을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반의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고, 공기에 서린 두려움을 느끼고 나서야 내 체벌이 과했음을 알아차렸다. 내게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어머니가 간혹 꿈에서 나타나지 않을 때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은데, 아마도 오늘 꿈 속에서 어머니를 뵙지 못한 탓일 것이다. 오 주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5）

금요일 11th of September. 1874.
토미가 나랑 아이슬라와 함께 등교하기를 거부했다. 부모의 호된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아이슬라는 나와 함께 등교하며 나에게 사과했다. 참으로 착한 아이다. 토미같이 나쁜 아이와는 다르게.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이는 나 역시 바라는 바였다. 이 참에 더 엄격한 교육자로 거듭 날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나쁜 아이에게는 벌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좋아져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아이슬라가 노래가 마음에 든다며 무슨 노래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내 머리를 빗어줄 때 부르시던 노래라 알려주었다. 노래가 마음에 든다며 자기에게도 알려줄 수 없냐고 물었기에 알겠다고 했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다.

수요일 23th of September, 1874.
나는 거대한 가마솥 안에서 헐벗은 체로 눈을 떴다. 가마솥이 흘러 넘치도록 가득한 피는 월경의 부산물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꿈속의 나는 역함을 느끼지 않았다. 온몸을 끈적한 피로 적신 난 가마솥 밖으로 기어 나왔다. 맨 살갗에 느껴지는 공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상쾌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피로 덩어리진 머리는 부자연스럽게 흩날렸다. 어머니와 같은 붉은 색이 마음에 들었다.

가마솥을 빠져나온 내 앞에는 산만큼이나 거대한 검은색 고양이가 있었다. 그 고양이는 섬��한 안광으로 바라보았지만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슴 속 무한한 사랑이 피어났다.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자 그것은 까칠한 혀를 내밀어 내 손을 정성스레 핥다가 이내 조심스레 손끝에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것이 기분 좋은 그르릉 소리를 낼 때마다 공기가 진동했다.

고양이가 내 앞에 주저 앉자 주변으로 거인들이 다가온다. 석회암처럼 거칠고 거무틱틱한 색의 피부를 가진 헐벗은 열 세명의 남자들이 나를 둘러쌌지만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나의 피붙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니.

한없이 자애로우면서 동시에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날 흔들어놓는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어머니가 계셨다. 나와 같은 머리색, 나와 같은 나신, 나와 같은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답이었다. 어머니께서 날 안아 주셨다.

어머니께서 미소 지으셨다.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아름다운 미소를.
나 역시 같은 표정을 지었다.（6）

Frjádagr 21th of Tvímánuðr
아침식사 준비 중 아이슬라가 내가 가르쳐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이슬라의 할머니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르며 아이슬라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녀가 깜짝 놀라 스푼을 떨어뜨렸다. 무안하지 않도록 미소를 지으며 스푼을 주워 돌려주었다. 어쩜 저 아이는 노래마저 천사처럼 부를까?
토미는 늘 그렇듯 초조한 표정이었다. 괜히 놀려주고 싶었다. 그가 힐끔거리며 내 눈초리를 살필 때, 이를 드러내 미소를 지어주었다. 거의 의자에서 넘어질 뻔한 토미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즐거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은 메튜를 불러내 교탁 위에 세워 회초리질을 했다. 종아리가 멍이 들고, 상처가 까져 피가 묻어날 때까지. 갑자기 후각이 예민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비릿한 피냄새가 진하게 느껴졌고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전신에 활력이 감도는 느낌이었다.

회초리를 더욱 강하게 휘둘렀다. 핏방울이 얼굴에, 옷자락에 튀었다.

메튜가 참다 못해 울음을 터뜨린다. 두려움과 고통 섞인 비명에 고양감을 느낀다.

나쁜 아이에게는 벌을,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은 뒤 메튜를 일찍 집으로 돌려보냈다. 상쾌하다. 흐르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날 학교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던 도중, 회초리에 이끌리듯 다가가 손으로 매만졌다. 메튜의 피가 묻어 살짝 더 진하게 물든 회초리가 찐득거리며 손에서 떨어진다.

손끝에 묻은 응고된 쇠냄새가 풍긴다. 달콤한 냄새다.

어쩐지 허기가 느껴진다. 주방에 남은 음식이 있을까?

Miðvikudagr 4th of Haustmánuðr
배고프다. 무엇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고, 무엇을 마셔도 갈증을 축이지 않는다. 피로감과 굶주림으로 날 선 신경을 학생들에게 풀지 않으려 인내해야 했다. 메튜는 어제 호되게 화를 당했던 탓인지 오늘은 너무나 얌전하다.

왜 하필 오늘 얌전히 있는 거지? 조금이라도 딴청을 피웠으면 바로 앞으로 불러 회초리 질을 할 수 있었을 건데.

어제처럼 새된 비명을 지르며 종아리를 부여잡고 잔뜩 겁에 질린 개새끼처럼 울부짖게 해줬을 텐데.

배고프다.

허기가 너무 져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배고파

배고-
（변색된 갈색 얼룩이 종이에 묻어 더 이상 읽기가 불가능하다）

Laugardagur 7th of Haustmánuðr
메튜는 더 이상 학교에 오지 않는다. 가엾게도 소식도 없이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 감쪽같이.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긴급 마을 회의 때 학교에서 눈물을 흘리며 비통에 찬 울음소리가 여전히 귀에 선명하다. 부디 가엾은 어린 아이가 무사하기를.

어머니는 메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어릴 적 또래끼리 공유하는 작은 비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있어 학교로 향했다. 아이슬라가 기쁘게 나를 따라 나섰다. 학교 입구에 도착하자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내 다리에 몸을 비빈다. 어느 날부터 나타나 학교 주변 담벼락에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 내가 보이면 졸졸 따라다녔다. 귀여운 아이에게 고기 조각을 나누어 주기 위해 잠시 학교에 들어갔다 나왔다.

밖에 나오자 고양이는 아이슬라 앞에서 배를 뒤집고 있었다. 아이슬라 역시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좋아하고 있었다. 고양이에게 고기 조각을 주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와 아이슬라도 함께 하나를 나누어 먹었다. 혀에 느껴지는 맛과 이빨을 타고 밀어내는 신선한 식감,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마저 황홀한 맛이었다. 아이슬라 역시 만족스러웠는지 입맛을 다셨다. 아이슬라가 조금 더 있다 가자고 졸라 그녀를 놀아주었다. 그녀를 내 무릎에 앉힌 뒤 뼛조각으로 예쁜 머리를 빗겨주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마치 사이좋은 모녀 같았다.

나의 dóttir. 나의 작고 귀여운 illr völva. 나의 blóð.

오후에 집에 돌아오니 나를 보는 토미와 그의 할머니 눈빛이 심상치 않다. 분위기를 느낀 아이슬라가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토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었으며, 노파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손이 새하얘지도록 얼룩진 헝겊 더미를 쥘 뿐이었다.

그 늙고 빼빼 마른 손으로 쥔다고 힘이 얼마나 들겠냐마는. 가소로움에 웃음이 나왔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집안에 몰래 숨겨놓은 고기를 저 마귀 할멈이 찾았다는 걸.

그러니 저 헝겊조각을 찾아낸 것이겠지.

교회 앞에서 새벽 이슬을 맞는 재가 된 내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괜찮다. 그들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어준 뒤, 층계를 올라가 아이슬라의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드러난 건 살며시 미소를 지은 아이슬라의 얼굴.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진한 핏빛 얼룩이 묻은 속옷.

성숙한 여인의 증거였다.

우리는 마주 웃었다.

나는 이 일기를 어디에 숨길지 그녀에게만 이야기해줄 것이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일기를 찾아내고 나 대신 고양이를 돌볼 것이다.

그녀 역시, 곧 어머니를 만날 터이니.





수기의 양장 표지 안 쪽에는, 날카로운 조각으로 긁어 쓴 듯한 시가 적혀있었다.

We’ve trailed so far from our land

Yet we are engrailed by her hand

Sworn an oath for another morrow

practiced rituals from our sorrow

For our foremothers laid the path

Those who not follow, fear her wrath


*오랜만에 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써보았습니다. 약간 나폴리탄 분위기가 나는 글을 지향했는데 와 닿으실 줄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폴리탄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아예 해답이 없는 나폴리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무언가 그럴 듯한 이유, 역사적 배경, 사건의 당위성 등등 그럴듯한 설정이 붙는 나폴리탄을 좋아합니다, 물론 그러면 나폴리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작가의 독단으로 나폴리탄으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나폴리탄입니다.

제목부터 （1）이라는 넘버링이 되어있으니 （2）역시 올라올 예정입니다. 읽으시면서 괄호 안에 숫자가 쳐진 부분이 있을 겁니다. 앞서 적었듯이 실제 역사적 배경, 전승, 혹은 이야기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여러가지를 참고하여 집어넣은 설정들입니다. 이에 대한 정답이 정해져 있으며, 이 수기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문 같은 느낌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이를 올릴 예정입니다. 며칠 동안 퀴즈를 맞추시는 느낌으로 한 번 여러 조사를 하며 찾아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설명하는 건 좀 짜치지 않냐고요? 그래서 제가 프로 작가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입니까. 겸사겸사 이 글 써보려고 열심히 자료조사 했다고 자랑도 좀 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꺼림칙한 공포를 위해 어떻게 보면 조금 보기 불편할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직 공포라는 엔터테인먼트적 기능을 위한 장치적으로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