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 어느 날.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의 최고 기온 26도.

후훗.... 이정도면 반팔을 입고 다녀도

누가 이상하게 보진 않겠지.

흠..... 그래도 아직 보기에 좀 어색할 지도 모르니

허리에 남방 하나는 묶고 다녀야겠다.


오늘 팔뚝에 힘줄은 제대로 섰나?

....... 좀 부실한 것 같은데?

한 5백 개만 더 하고 가자.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슬슬 한계 수명을 드러내기 시작한 악력기의 비명을 묵살한 채

묵묵히 5백 번 더 쥐어짜고 학교로 가는 길.

굵은 팔뚝에 불끈 솟아오른 정맥은

내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좋아.... 오늘부터 반팔이다..... 드디어...드디어!!!!


내가 왜 이렇게 반팔에 집착하는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학교.


김씨 - 어이.... 허씨!

허씨 - 흠! 김씨 너도?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길.

난 몸에 쫙 붙는 반팔을 입고 있는

김씨를 만날 수 있었다.


김씨
- 흠...흠. 뭐 오늘 최고 기온이 26도라고 해서.

덥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허씨 - 그렇지? 26도 씩이나 되는데...

김씨 - 나도 남방 정도는 입고 왔어야 하나?

허씨
- 아냐. 26도면 쫄티만 입어도 충분해.

반올림하면 30돈데.... 그렇지?


괜히 애꿎은 26도만 탓하며 뿌듯하게 길을 걷는 우리.

중간에 한사람이 아슬아슬하게 끼어들 정도의 공간을 남겨둔 채

팔뚝에 힘줄이 죽지 않도록 힘을 줘가며 걷는 중.

아.... 이 설레는 맘을 무엇으로 표현해야할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타타타탓 타탓....’


지금 뒤에 작게 들려오는 경쾌한 발소리.

네 번, 혹은 두 번씩 박자를 나눠서 깡충거리며 뛰는

그녀의 발소리다.


한나 - 까꿍!


푸욱신......

나와 김씨의 사이에 와락 팔짱을 끼며 파고드는 그녀.

이거야..... 우리가 꿈꿔왔던 그 느낌.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한나 - 응? 둘이 왜 그래?


코끝이 시큰해져오는 감격스런 기분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슬쩍 고개를 돌리는 나와 김씨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행복했던 시간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고

그녀의 오른쪽엔 김씨가, 왼쪽엔 내가 선 채

서로 손을 잡고 경쾌하게 앞뒤로 흔들며 걷는 길.

그녀가 내게 물었다.


한나 - 아직 반팔 입기엔 춥지 않아요?

허씨 - 일기예보 안 봤어? 오늘 최고기온이 26도나 된다고!

한나 - 그래도 반팔 입기엔 좀.....


괜한 자격지심에 뜨끔한 나와 김씨는

26도와 반팔의 관계에 관해 역설하기 시작했다.


김씨
- 우리처럼 장기적으로 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언제나 체내 신진대사를 효율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티록신 수치가 높아지고 물질대사가 활발해져

체내 열 발생량이 일반인보다 비약적으로 높은 법이지.


허씨 - 그래서 26도만 되도 체감 온도는 36도 이상이라고.

김씨 - 아무렴. 이런 날씨에 긴팔을 입었다간 쪄 죽을지도 몰라.

한나 - ....... 결국 더위를 엄청 탄다는 거네요?


......얘기가 그렇게 되나?

그럼 안 되지.


허씨
- ........ 인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냐.

간뇌 시상하부에서 온도를 끊임없이 감지해주는 과정에서

주변 온도가 최적 온도보다 높다고 판단되면

모공 확장과 모세혈관 이완 등의 반응기작을 통해

금방 쾌적한 상태로 바꿔준다고.


김씨 - 아무렴!!

한나
- 흐음..... 그렇구나.

뭐.... 어쨌거나 지금은 덥다니.....

팔짱 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


허씨 - 김씨!! 지금 온도 몇 도야?

김씨 - 응? 한 23도 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허씨 - 좀 춥지 않아?

김씨 - 어우, 얼어 죽겠어 그냥!!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다가

가볍게 팔짱을 끼어주는 그녀.

어쩌면 우린...... 그녀 손바닥 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여우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실감할 만큼

그녀의 장난기와 능글맞음은 천문학적이다.

다 알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속은 척 하다가

마지막 한 순간에 뒤통수치는 것이 특기랄까.....

게다가 뭔가 재밌는 장난이라도 떠오르면

몇 날 며칠을 두고서라도 철저하게 준비해서

완벽하게 골탕을 먹여버린다.

그녀의 뇌에서 반 이상은 장난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본성이 착하고 순해서

그런 능력을 다른 사람을 상처 주는 데 쓰지 않는 것이

천만 다행이긴 하지만.....

아마 누군가 그녀에게 원한을 사게 된다면

평생을 두고 통탄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한나 - 응? 기억오빠다.


식당 근처에 도착했을 때

우린 민아와 함께 걷고 있는 기억을 만날 수 있었다.


식당 메뉴가 변변찮았던 탓에

바로 옆에 붙어있는 패스트푸드 가게를 찾은 우리.

원형 식탁에 빙 둘러 앉아 같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민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민아 - 벌써부터 반팔 입으면 춥지 않아?

김씨 - 우리처럼 지속적으로 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김씨가 다시금 반팔의 정당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을 때

한나가 민아에게 눈을 찡긋하더니

슬쩍 옆에 있는 우리에게 팔짱을 끼는 시늉을 했다.


한나 - 진짜 단순하다니까요....

민아 - 풋......


‘아무튼 남자들이란...’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우릴 보며 가볍게 웃는 민아.


제길........ 그래 우리 이러고 살아....어쩔 거야....


김씨 - 아니 우리처럼 지속적으로 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허씨 - 그만하자. 이미 다 뽀록났다....

김씨 - ......벌써?


그때 문득 모두의 눈이 기억에게 쏠렸다.

제법 두꺼워 보이는 모직 남방에

속엔 긴팔 셔츠까지 입고 있는 녀석.

......... 안 덥냐?


민아 - ....... 기억이는..... 반팔 안 입어?

기억 - 반팔?


묵묵히 민아의 샐러드를 소스에 버무리고 있던 녀석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이미 이전 상황은 종료된 다음이었다.

안 그래도 눈치도 둔한 녀석이

뭐 하나 하고 있으면 주변 상황에 관심이 없으니

뻑하면 뒷북에 실수 연발이지.....


기억
- ....... 난 추위를 많이 타는 대신에

더위는 전혀 안 타거든......

보통 한 35도 넘어가기 전까지는 긴팔 입는데?


....... 슬슬 베베 꼬여가는 듯한 분위기에

한나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민아 - 그래도...... 반팔 입으면 좋은 점이 있지 않아?


은근 슬쩍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넌지시 힌트를 건네주려는 민아.


기억
- ...... 글쎄. 그냥 더우면 입는 거 아닌가?

좋은 점이라...... 뭐가 있지?


‘빠직.’

순간, 민아의 이마에 굵은 힘줄 하나가 보인 듯 했다.


민아 - 그래! 난 납작해서 좋은 점도 없다!!


끝내 발끈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나가버리는 그녀.

기억아...... 내가 볼 때...... 넌 우리보다 더 둔하다......


기억 - .........어랏? 공주!


당황해서 그녀의 뒤를 좇아 나가는 녀석을 보며

한나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대고 있었다.


한나
- 아하하하..... 끄윽....... 쿡쿡쿡.....

둘...둘 다 왜 이렇게 귀여워....... 쿡쿡쿡....


아주 바닥을 구를 기세다...


한나가 기억이를 볼 땐

눈가에 미묘한 분위기가 스친다.

허탈하달까........ 아니면 고독하달까.........

능구렁이만 먹고 자란 여우같은 그녀 심중에

어떤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지만

그 감정이........

내가 그런 눈빛의 그녀를 볼때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착잡하니 씁쓸한 기분이긴 하지만

그녀가 우리를 보고 있을 때

훨씬 맑고 환한 눈동자로 웃어준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을 뿐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자리로 돌아왔다.


여전히 화가 단단히 나서 시근거리고 있는 민아와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띵한 모습의 기억.


기억 - 언젠 푹신푹신한 옷 입은 게 좋다더니.......

민아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기억 - 후...... 모르겠어....... 힌트를 좀 줘.........

민아 - 아까 줬잖아~!!


애가 타서 팔짝팔짝 뛸 것 같은 민아를 보며

기억이 혼돈의 도가니를 헤매고 있을 때

한나가 그의 옆에 슬쩍 다가가 팔짱을 끼었다.


한나 - 아직도 모르겠어요?


흠칫 놀라 팔을 빼는 녀석의 얼굴에

순간 깨달음의 섬광이 번뜩였다.


기억
- ........ 아........ 뭐야. 그런 거였어?

너무 속 보이잖아. 상대방도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게 나을 뻔 했다.


민아 - 그래!! 힌트를 주기에도 부족해서 미안하다!!

기억 - 앗? 공주!!


또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린 민아와

서둘러 그녀를 따라가는 기억을 보며

또다시 배를 잡고 웃어대는 한나.


한나 - 아하하하하..... 하하...... 콜록......켁.....


...............


허씨 - ...... 한나야. 장난인 건 알지만...... 그러지 마.

한나
- 응? 아, 괜찮아. 저러면서 또 금방 화해할 거야.

아니지...... 오히려 더 친해질 걸?

저렇게 둔해도 금방 용서해줄 수밖에 없는 게

기억 오빠의 매력 아닌 매력이니까...


허씨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한테나..... 그렇게 팔짱 껴주고.... 그러지 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남자친구도 뭣도 아닌 내가

그런 일로 말하는 것도 우스웠기에 슬쩍 말을 줄였다.


하지만 역시 여우는 여우인지.....

한나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한나
- 알아, 알아.... 기억 오빠니까 그래본 거지.....

아무한테나 안 그래.


...........

기억이니까..... 더 그러지 마.


그녀를 좋아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