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여름방학중의 일이었다
나는 당시 기숙사에 살고있었고, 기숙사는 학교 건물 옆면이 보이는 구조였다
내가 보는 쪽에서 학교 5층은 미술실같은 동아리실이었다. 하지만 학교가 좀 똥통이라 동아리 활성화가 안되어있어서 왠만하면 폐쇄되어있었다.
그 때 나는 이어폰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새벽 3시쯤이었고, 아직까지도 내용이 생생히 기억나는데, 트랜스포머 2에 대한 내용이었다. 처음만큼 감동이 없다, 2가 별로다 이런 내용을 누군가 사연으로 보낸것이 기억난다.
그 때, 창 밖이 새하얘졌다.
우리학교는 전원 자습실에서 자발（?）적으로 11시 넘게 공부를 하고 기숙사에 돌아갔기때문에 이동시간 약 20분간 학교에서 기숙사까지 밝은 조명을 비춰준다. 당연히 이동 후에는 당번이 끄게 되어있고, 새벽 3시에 켜진것은 전대미문이다.
그러나 새벽 3시쯤에 갑자기 켜진것이다. 어째서?
나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안경을 썼다.
그 조명이 켜져있었다. 어째서인지 고양이가 하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빛이 갑자기 비춰져 화가 난것일까?
그 때 나를 뉼리듯이 길을 비추는 조명이 꺼졌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5층 동아리실의 조명이 켜졌다
내가 기억력이 그렇게 나쁘진 않기에, 그리고 학교를 돌아다니는것을 좋아했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그 방에는 분명히 자물쇠가 잠겨있었고, 사용할만한 자재같은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흐릿한 안경 너머로 보인 그 교실의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그 방이 그렇게 비어있을리 없는데? 분명히 그 방에는 이젤같은것이 즐비했다. 하지만 불이 켜진 그 방의 모습은 장애물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눈이 많이 나빴던걸까?
그 때
눈을 깜빡인 순간 무언가 작은 여자 정도의 형상이 보였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기이했던것은 그 형상이 마치 조잡한 금형으로 뽑아낸 붉은 플라스틱처럼 그저 빨간 덩어리같은 느낌이었다는것이고, 그럼에도 나는 그 물체에서 사람과 유사한 동작과 형태를 느껐다
그리고 그것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 그? 아무튼 그 무엇은 동아리실 안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보통 사람이 방 안을 걸어다닌다면 보폭이 생긴다. 걸음과 걸음 사이의 속도는 일정하지 않다. 사함이 3D 멀미를 느끼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폭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과학시간에 흥미유발용으로 본 초전도체의 부양 장면처럼 그저 일정한 속도로, 그러나 불규칙하게 동아리방을 휘젓고 있었다
나는 그게 다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무색하게 한쪽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평소에 듣던 DJ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참을 수 없는 요의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저 정체모를 무언가를 창문 가까이서 관측하기 위해 2층침대의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발가락 끝이 닿은 순간
눈
금형으로 대충 찍어낸 붉은 플라스틱같은 그것, 혹은 그와 분명 눈이 마주쳤다
비논리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때 느껴진 소름, 순간 떨어진 체온, 가늘게 경련하던, 사다리를 막 놓던 왼팔의 경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내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초자연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동시에 불이 꺼졌다
나는 차마 다른발을 땅에 디디지 못하고 다시 침대로 올라왔으나, 새벽 3시의 신랄한 영화평론 라디오가 내 정신을 깨웠고 요의가 공포를 이긴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고 잠에 들었다.
———
나중에 알아낸 소식은 기숙사 학생회가 담력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일날까지 안심하였으나, 아무도 겁먹지 않은 그 허접한 담력시험에서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담력시험 범위는 1층 뿐이었다.
학생회에 물어봐도 누구도 그 시각에 5층에 출입하지 않았다
다시 엿본 그 5층의 동아리방에는 이젤이 즐비했고 자물쇠는 굳건했다
교내 유일의 경비아저씨께 물어봤으나 금시초문이었다
옆방 동급생이, 비슷한 현상을 목격한것을 전해들었다.
현상은 있었으나 그 무엇도 검증하지 못했다. 어쩌면 다소 시시하기까지 하다. 일어난 사건은 목격자 둘 뿐이었고, 정작 어떤 일이 일어나진 않았으니.
그러나 나는 그때의 일을 어제 일어난것처럼 기억한다.
이렇게 축축하고 불쾌한 밤에는 그때의 황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눈부신 조명과, 눈이 마주친 그것과, 한밤중의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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