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작년 5월, 개발중인 게임 전시를 위해 한 인디게임 행사에 참여했다.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들이 꽤나 많이 다녀간 행사였다.

의자에는 갖가지 직함이 붙어있었는데, 당연하지만 앞줄일수록 더 대단해보이는 직함들이었다.

당시 행사를 주최했던 어느 협회는（요즘의 ‘그 협회’ 아니다） 개막식을 앞두고

‘귀찮겠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높은 분들의 영향력이 절실하다. 협조를 부탁한다’는 식으로 양해를 구했다.

요식행사가 달가울 리 없는 인디개발자들이지만 그래도 그날은 다들 제법 협조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인디개발자들이 앉지도 못하고 각자의 부스 앞에 서있는 동안, 

정체 모를 귀빈들은 의자를 차곡차곡 채운 채  

무슨 시장님, 무슨 뱃지들이 축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간간이 박수쳤다.

괜찮았다. 왜냐면 사진을 찍기 위해 나란히 선 그들이 다함께 외쳤으니까.

‘게임은 문화다’

협회에서 이야기한 ‘때가 때이니만큼’의 ‘때’란, 

‘게임중독은 질병!’이라는 현수막이 판교에 붙는 때를 일컬었다.

게임은 문화다.

내 생각에 이건 지극히 당연한 말이고

그럼에도 그 시점에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고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모은 외침이었고

2019년의 대한민국은 그런 외침이 필요할 만큼 게임에 대한 인식이 나쁜 나라였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다.

2. 

가챠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신규유저 무료 30연뽑기, 60연뽑기, 시작부터 신화템, 어쩌고 등을 메인 카피로 쓰는 게임 광고들을 볼 때마다, 

이 게임들은 메인 콘텐츠가 가챠라고 대놓고 외치는구나 한숨이 나온다.

나는 가챠 BM이 발전을 거듭할 때마다 섬뜩했다.

한국에서, 중국에서, 일본에서, 

PD 머릿속에서, PM 머릿속에서, 기획자 머릿속에서, 

사람 심리의 유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아이디어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기술에 점점 능통해졌고, 그에 따라 매출 그래프의 우상향은 멈출 줄 몰랐다.

그렇게, ‘몇 억씩 현질한다’라는 이야기가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나는 그 기술자들을 게임개발자（혹은 개발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게임이라는 콘텐츠로 돈을 버는 콘텐츠제작자가 아니라

야바위로 돈을 벌기 위해 게임이라는 껍데기를 차용한 야바위꾼들일 뿐이니까.

그 물건들은 게임이 아니라 그냥 ‘뽑기틀’에 불과하다.

3.

어쨌거나 가챠라는 BM이 뿜어내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하고 

가벼운 수준이라면 부작용이 크지 않기도 하거니와

게임개발사에 매출이란 곧 HP 그 자체인 것도 맞다.

0이면 죽으니까.

‘내가 열심히 만든 게임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남고 싶어. 그런데 저기 저렇게 개사기인 BM이 있네?’

흉악한 오크가 덤벼오고 있는 와중, 내 눈앞에 엑스칼리버가 덩그러니 버려져있다면... 

당연히 줍고 싶을 것이다. 살아남고 싶으니까. 거기까지는 이해한다.

솔직히 나 역시도 그 유혹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는, 그러나 야바위꾼은 아닌（아니라고 주장하는） 당신들에게 몇 가지 묻고 싶다.

A. 엑스칼리버를 휘두르기 전에, 엑스칼리버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그 원리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충분히 고민해 보았는가? 

B. 이 아무래도 야바위꾼들의 마개조를 거친 듯하다. 암흑속성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지 않았는가?

C. ‘생존’ 즉 먹고사니즘이 모든 부작용에 대한 변명이자 면책권이 될 수 있는가?

D. 이런 사기템을 써야만 생존이 가능한 수준의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그 바닥에서 생존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E. 세상에는 궁수도 있고 도적도 있고 마법사도 있는데, 

엑스칼리버가 너무 사기인지라 궁수가 활을 버리고, 도적이 단검을 버리고, 마법사가 스태프를 버리면 어떻게 하지? 

이제 활은 누가 쏘냐?

4. 

야바위꾼들의 졸렬하고 악랄한 사기질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본인들의 수준을 인증하는 몇 가지의 충격적인 단어들도 화제가 됐다.

딱히 입에 올리고싶지도 않은 단어들이다.

이 난리 중에

오리지날 야바위꾼들은 부른 배를 잡고 ‘꿀 다 빨았다’ 아쉬워 쩝쩝거리고

자신들이 ‘게임’을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짭퉁 야바위꾼들은 초조해하고

꿀 한번 빨겠다고 어설프게 야바위를 주워삼겼다 체한 멍청이들은 부들거리고

가챠겜 ARPPU 피티해 남의 돈 잔뜩 끌어쓴 욕심쟁이들은 또 한번의 구라를 구상하고

인센 받을 생각에 신나 마개조에 기여한 부역자들은 자기합리화를 하고

산업 메커니즘도 모르는 풋내기들은 게이머를 제 발 아래로 보며 꼴값을 떨고

나름대로 선 지킨 이들은 졸지에 벼락선역이 되어 이참에 노도 저어보고

인디개발자들은 늘 그러하듯 각자의 세계에서 그냥 묵묵히 자기 게임 만든다.

그렇게 업계의 풍경은 아득하고

10년 가까이 바보짓 하고 있는 나는 무척이나 무력하다.

부역자짓 관두고 탈출해

그나마 나은 게임 하나 세상에 보태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네.

5. 

이제 업계는 게이머의 신뢰를 잃었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업계를 잃었다.

개발자가 만든 게임은 작든 크든 하나의 세계고 게이머들은 그 세계에 이주한 주민들이다.

그 세계가 가짜란 건 모두 알고 있지만, 다들 모른 척하며 은근슬쩍 주민으로서의 생활을 즐긴다.

그렇기에 개발자는 무대 뒤에서 게임의 내적 완결성을 추구하고, 게이머는 그 세계에 온전히 몰입하여 즐기면 된다.

낭만적이다. 이제 옛날 이야기다.

개발자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게이머는 

꿀렁이는 폴리곤 덩어리를 보며 어떤 인물의 서사를 상상하는 대신

‘이 데이터 쪼가리의 출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똑바로 밝혀라. 사기 칠 생각 말고.’라는 

다분히 정당하고도 현실적인 요구를 한다.

이 팍팍한 세상, 마음 편히 쉬고 즐기자고 하는 게임인데... 

게임할 때조차 현실을 끌어들여 ‘이 새끼들이 혹시 나한테 사기 치나?’ 의심해야 한다니.

야바위꾼과 기타 등등들아.

너희들의 돈 욕심과 썩어버린 도덕성이 게임의 낭만을 살해했다.  

이제 한국게이머들은 한국게임을 플레이할 때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다.

조금이라도 찜찜한 부분이 있으면 역시!라고 할 것이다.

한국게임은 해외 게임보다 엄격한 잣대를 적용받을 것이다.

한국게이머의 한국게임 몰입 허들이 높아질 것이다.

이미 그런 경향이 있었다고?

너희들은 '설마'라고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거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옳았음을 몸소 증명해줬다.

이제는 모두 힘을 합쳐 혀를 찰 것이다.

6. 

심지어 이 나라는 아직도 ‘게임은 문화다’라는 외침이 필요한 나라다.

재작년 판교에서 촌스런 빤짝이 꽃가루가 날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박수를 쳤던건,

그만큼 게임산업이 딛고 선 인식의 기반이 부실하다는 데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야비함은 그 외침을 함께한 가장 든든한 우군을 배신했다.

아니, 대놓고 우군을 등쳐먹고 기만했다.

1） 게임과 문화 2） 게임과 사행성 

둘 중 어느 단어들이 더 밀접해 보이는가.

적어도 K-GAME에서 만큼은 2번이다.

어디 쪽팔려서 ‘게임은 질병이 아니다! 문화다!’ 외칠 수 있겠나.

씨알도 안 먹히는 궤변을 변명이랍시고 늘어놓을 생각 말고

너희들이 등쳐먹어 화가 난 우군들을 바보 취급하지도 말고

‘저새끼들이 공개하는 확률을 어떻게 믿어?’라는 소리 듣는 거 당연하니까

이제라도 얌전히 받아들일 거 다 받아들이고

법, 윤리, 도덕 다 잘 지키면서 양심적으로 살자. 

적어도 콘텐츠 제작자라면,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지, 혹 부작용을 일으키진 않는지 점검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니까.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보태자면

콘텐츠 팔 때 제발 합당한 값만 받자.

만원 짜리를 1억 받고 팔았는데, 그 1억 먹고 안 체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그러고 잠이 오냐.

부탁이니 다른 개발자들한테 민폐 그만 끼치고, 

이제껏 많이 해쳐먹었을 테니 앞으로라도 선 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