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세상이 많이 발전해가는 것 같아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것 같습니다.
글을 지어 어딘가에 올려보는 건 처음이라 대충 느낌 흉내 정도만 내봤습니다.


소설 제목: 낙원은 없다. （is no paradise anywhere.]

제1장: 과잉된 백야（白夜）

창밖은 한낮처럼 밝았다.
태양 공전 궤도를 도는 수백 대의 위성이 쏘아 보내는 에너지가 화성 기지국을 거쳐 지구의 밤을 지워버린 탓이다.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온 창백한 인공광이 내 오른쪽 팔뚝에 남은 멍 자국을 비췄다.
오늘 낮, 임상실험 아르바이트에서 이름 모를 약물을 주입받은 자리였다.
두 달에 한번씩 밖에 못하는 아주 고마운 수입원 님이다.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개같은 법들 때문에 일정 기간마다 한번씩 밖에 못한다.
그럼 그동안 식비, 동생 등록금, 교통비, 통신요금, 공과금, 생활비는 땅에서 솟아나나?
조상님에게 빌어먹을래도 그럴 조상님도 없는 인생이다.


나는 욱신거리는 팔을 문지르며 좁은 방을 둘러봤다.
곰팡이가 핀 벽지, 짝이 맞지 않는 가구들.
어제 본 뉴스에서 앵커가 지껄이던 말들이 생각난다.
"이로써 전세계의 인류는 충분한 에너지를 확보하고도 남았고 에너지 과잉으로 노동에서 해방되었습니다. "

난 멍청해서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되고 알 수도 없다.
적어도 이 방, 내 삶 안에서만큼은 철저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익숙한 권태를 느끼며 책상 위에 놓인 장비들을 집어 들었다.

촉각 수트와 HMD（Head Mounted Display）. 이 낡은 기계 덩어리가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수트를 입자 차가운 센서들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인간의 피부 밀도와 흡사하게 제작된 센서들이 전신을 조이며 내 체온과 심박수를 체크했다.
전원을 켜자 '웅-' 하는 낮은 구동음과 함께 현실의 소음이 차단되었다.

[시스템 접속. 사용자의 컨디션에 맞춰 온도를 조절합니다.]

기계적인 음성과 함께, 찌는 듯한 8월의 열대야가 사라지고 쾌적한 22도의 공기가 내 몸을 감쌌다.
외부 온도 조절 기능.
가난한 자들이 에어컨 대신 선택하는 합리적인 냉방 수단이었다.
세상을 시원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 나만 차가워 지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고글을 쓰고 눈을 감았다.
망막 위로 수만 개의 빛이 쏟아졌다.

시야가 트이자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현실을 복사해 놓은 듯 정교하지만, 현실보다 훨씬 더 채도가 높고 완벽한 세계.
충분히 정교하지만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라고? 그럼 내가 즐길 수 있는게 대체 뭔데?'
자조적으로 습관적 위안거리를 만들어 낸다.

어차피 다 잠깐의 유흥거리일 뿐이다.
나는 수많은 채널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누구나 평등한 경험을 할 권리'라는 슬로건 아래 만들어진 이 가상현실은,
내가 결코 가볼 수 없는 상류층의 파티나 고위 귀족의 저택, 연예인들의 집, 세계적 명소,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영화 속 세상으로 나를 안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피곤했다.
귓가에 간호사가 했던 말이 다시 맴도는 것 같다.
'환자분 이렇게 기록 속이고 자꾸 오면 저희 신고당해요. 그거 알죠?
그럼 우리도 폐업이고 환자분도 영영 이 일거리 못하시게 되는거에요.
서로 곤란하게 이렇게 살지 맙시다'

나는 자극적인 쾌락보다는 멍하니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것을 원했다.
습관적으로 공유 플랫폼 'Any'에 접속했다.
무한에 가깝게 증식한 평행 우주 같은 채널들 사이를 유령처럼 부유했다.
뭐든 내 머리속을 가득 채워줄 편안하지만 재미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그때였다.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이 멈춘 것은.

제목 없는 썸네일.
검은 배경 위로 붉은 점 하나가 찍혀 있는 기묘한 영상이었다.
조회수는 0.
업로드된 지 불과 30초도 되지 않은 영상이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 보지 않았겠지만
원래 즐기던 도파민적 자극들로 위로하기엔 뭔가가 공허한 하루였고
나는 홀린 듯 그 영상을 터치했다.






제2장: 통각의 임계점

화면이 켜지자 낯선 폐공장이 나타났다.
시점은 1인칭이 아닌, 누군가 구석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몰래 촬영한 듯한 앵글이었다.
영상 우측 하단에는 **[AI Generated: Fiction]**이라는 워터마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뭐야, 또 흔한 공포물인가."

나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요즘은 AI가 생성한 가짜 스너프 필름이 유행이었다.
워터마크가 박혀 있으니 안심하고 즐기라는 뜻이다.
이딴 걸 만드는 놈이나 이걸 소비하는 놈들이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불행을 직접 마주해본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즐길 수 없는 법이다.


영상 속에는 한 여자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쇠파이프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아무런 대사도 없이, 건조한 동작으로 여자의 어깨를 내리쳤다.

‘퍼억!’

둔탁한 파열음이 고글 내부의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렸다. 그리고 여자의 비명이 터졌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소리가 너무 컸다.
아니, 단순히 큰 게 아니었다.
국제법상 가상현실 내의 모든 자극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안전 수치 내로 제한된다.
통각도, 청각적 충격도 필터링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방금 그 비명은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날 것의 소음이었다.
이상했다. 진짜 비명이 이런 소리였나?
성대가 찢어질 듯 긁히는 소리, 공포에 질려 과호흡이 온 숨소리. 쌩 소음.
갑자기 방안의 공기가 바뀌는 느낌마저 들었다.
뭔가 와선 안될 순간이 다가오는 소리, 느낌, 그 순간들.

'AI가 사운드까지 기가 막히게 만들었네.'

나는 애써 그렇게 합리화했다.
하지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수트의 온도 조절 기능이 고장 난 건가? 왜 갑자기 이렇게 춥지?

화면 속 남자가 다시 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읍소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다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 탓에 그녀의 눈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피로 범벅된 얼굴이 내 망막 속으로 쳐들어온다.
그녀의 입술이 공포로 파르르 떨리는 모습,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까지…
원래는 이 정도까지 표현해 주지 않는다.
그럴 상황도 애초에 안 만들어 지거니와 그럴 상황이 표현되는 것도 모든 것이 관찰되는 현재에 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해상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남자가 다시 한번 휘둘렀다.
이번엔 머리였다. 여자의 몸이 헝겊 인형처럼 꺾였다.
바닥으로 쓰러진 그녀가 피 묻은 손을 바닥에 짚으며 기어간다.
아니, 오고 있었다.
그녀가 기어가는 방향은 정확히 카메라 렌즈가 있는 쪽이었다.
나를 향해.

나는 숨을 죽였다.
여자의 눈이 카메라 렌즈, 즉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가 울음 섞은 눈망울로 피 묻은 오른손을 렌즈를 향해 뻗었다.
제발 도와 달라는 듯이.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은 오른손 손목에 심어진 센서로 암호화폐 코드를 통해 서로를 식별한다.
그녀가 내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아니,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 뻗었다.
햅틱 장갑의 센서가 작동하며 그녀의 손이 닿는 감촉이 전해져야 했다. 하지만.

[식별 불가. 데이터 손상.] [Target ID: Unknown]

시스템 경고창이 붉게 점멸했다.
해킹 방어 시스템이 완벽하다던 이 세계에서, 코드가 읽히지 않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갑자기 현실감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애써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부지불식간에 나를 습격해 온다.
이런 상황을 두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순간 입밖으로 말이 달려나간다.
"그만해! 찢어 죽여 버리기 전에, 이 미친 개새끼야"
그 순간, 쓰러진 여자의 뒤로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카메라 앞으로 끌어당겼다.
렌즈에 여자의 피가 튀었다.
시야의 절반이 붉게 물들었다.
남자의 손이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 보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여자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시선을 카메라에서 떼지 않았다.
마치 렌즈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관찰하듯이.

워터마크가 지직거렸다. **[AI Generated]**라는 글자가 노이즈에 섞여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더니, 아주 찰나의 순간 다른 글자로 바뀌었다.

[LIVE STREAMING]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건 가짜가 아니다. 그래픽이 아니다.
지금 지구 어딘가에서, 혹은 이 도시의 어느 구석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살인이다.





제3장: 눈이 마주치다.

도망쳐야 한다.
본능이 뇌를 강타했다.
신고? 아니, 신고보다 접속을 끊는 게 먼저다.
이 영상이 송출되는 채널은 보안이 뚫린 불법 채널이다.
내가 접속했다는 기록이 남으면, 저들이 나를 찾을지도 모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의 센서를 더듬었다.
EMP（전자기 펄스） 버튼.
가상현실과 현실이 혼동되거나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을 때, 강제로 회로를 차단해 현실로 튕겨 나가게 만드는 최후의 비상 탈출구.

나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꺼지고 익숙한 내 방 천장이 보여야 했다.

‘……’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내 눈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여자가 늘어져 있었고,
여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게 되었다.
살인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메라를 닦고 있었다.

"뭐야…?"

나는 다시 한번 버튼을 눌렀다. 세게, 부서질 정도로.

[명령 거부. 관리자 권한으로 잠금 설정됨.]

눈앞에 뜬 메시지에 숨이 턱 막혔다.
관리자 권한? 내 수트의 관리자는 나다.
누가 내 권한을 잠근다는 말이야?
'왜 이게 가능한건데?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
그때, 화면 속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스피커가 아닌, 내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선명한 목소리였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나는 얼어붙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고있었지? 아니면 함정이었나? 우연이었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쉴 곳이 필요하다. 그런데 벗어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도망치려고 버튼 누르지 마. 소용없으니까."

그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되었다.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신이 잔뜩 난 어린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재미있는 걸 보여줄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시야가 강제로 전환되었다.
살인 현장이 아니었다.
익숙한 풍경. 곰팡이 핀 벽지, 낡은 책상, 그리고 그 위에 엎드려 있는… 나?

나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방 천장 구석에 달려 있던 방범용 카메라.
놈이 내 방의 보안 시스템까지 해킹해 시야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빠?"

그때였다.
현실 세계의 내 등 뒤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목소리. 여동생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들어오지 마! 나가! 하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수트의 넥 밴드가 내 성대를 물리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고사하고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화면 속, 즉 내 등 뒤의 시야에서 여동생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트를 입고 경직되어 있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빠, 괜찮아? 식은땀을 너무 흘리는데…?"

내 귓가에, 살인마의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찾았다."

그 한마디와 함께, 격렬한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저자식을 막아야한다.
수트를 다 찢어발기든 어쩌든 이곳을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 수트의 온도가 미친 듯이 치솟기 시작했다.
[경고: 과열 위험] 메시지가 시야를 뒤덮었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무력감이 다시금 나를 덮친다.
'아아, 나에게 있는 유일한 것까지 뺏어가려고 하냐 개자식들아'
내 옆에 선 여동생의 눈이 의아함에서 공포로 바뀌는 순간을,
나는 제3자의 현실 밖 관찰자의 시선으로 무력하게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