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보육원에나 규칙은 있을 것이다. 동기들과 싸우지 말 것, 청소 시간에 도망가지 말 것, 병원에 갈 때는 감독교사에게 보고할 것…… 평소 우리는 이러한 규칙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의심해 봤자 득이 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선생님께 “왜 동기들과 싸우면 안 되나요?”라고 질문을 한다면, 되돌아오는 것은 호통 내지 꿀밤 정도일 것이다. 이처럼 규칙의 특징으로는, 굳이 이유를 덧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그 의중을 파악하고 수긍할 수 있다는 보편성에 있다. 하지만 이와는 성격이 다른 금기（禁忌）가, 우리 보육원에는 하나 존재했다.

사무실이 있는 별관에는 허락 없이 접근하지 말 것.

이것이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여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단순하지만, 어딘가 생략된 것이 많아 보이는 문구. 정확하게 말하자면, 규칙과는 달리 그 저변에 깔린 의도를 궁금하게 만드는 문구였다.

도대체 왜 별관에 가지 말라고 하는 걸까? 그곳에 뭐가 있길래?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에 불과한 우리들은 항상 궁금해했고, 우리들의 순수한 물음에 선생님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침묵은 강력한 자석처럼 금기에 대한 이목을 더욱 끌었다.

“밤 12시에 별관 다목적실에 들어가면 저주에 걸린대.” 한 친구가 말한다.

그럼 또 다른 친구가 받아친다. “무슨 소리야, 그냥 괴물이 있어서 그런 거야. 내가 저번에 선생님이 불러서 사무실에 갔는데 건물 구석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어.”

“지랄한다, 괴물 같은 게 어딨냐. 차라리 귀신이라고 하든지.”

“내가 들었다니깐? 가보지도 않은 놈이 뭘 아냐?”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어쩜 그렇게들 상상력이 대단한지, 별관에 대한 소문은 시시각각 형태를 바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래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면, 항상 별관 구석에 있는 다목적실이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탈을 바꿔 쓸 뿐, 그곳에는 언제나 미지의 존재가 있었다. 귀신, 괴물, 악령…… 전부 허황된 이야기다.

하지만 보통 허황된 이야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법이다. 그리고 나 역시 유별난 편은 아니었다.

나는 직접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주워들은 이야기를 퍼뜨리진 않았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어줬다. 온갖 터무니없는 발상에도 실제로 벌어진 일인 양 과장된 리액션을 더하면서. 그렇다. 당시의 나는 금지된 것이 발하는 유혹에 푹 빠져 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일종의 유희로서 즐긴 것이지,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다. 애초에 소문을 지어내고（혹은 어디선가 들었다고 착각한 채） 퍼뜨리는 친구들 중에서도 열과 성을 다해 소문을 믿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듣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단순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금기가 우리에게 준 단기간의 놀이 수단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우리는 소복이 쌓인 선물들 앞에 모여 있었다. 이전 해부터 시작된 ‘산타 캠페인’이, 그러니까, 후원자들이 산타의 이름을 빌려 보육원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보내주는 활동이 그해에도 이어진 것이다.

어떤 아이에게 어떤 선물이 주어지는지, 그 증여 방식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없다. 다만 빨간색 혹은 녹색 바탕에 아기자기한 산타 얼굴이 그려져 있는 포장지는 산타를 믿지 않는 아이들에게까지 설렘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이름이 적힌 포장지를 뜯고 상자 안을 확인하면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갈렸다. 어떤 이들은 환호하거나 아예 놀라서 말을 잃는 반면, 어떤 이들은 에이, 하고 탄식을 내뱉거나 못내 아쉬움을 감추며 그저 포장지를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다. 보육원에 도착하는 선물들이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대개 장갑, 양말 혹은 목도리 정도였다. 물론 그런 선물도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게 맞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좀 더 휘황한 것을 원한다. 그러니 동기 중에 한 명이 상자 속에서 ‘게임보이 컬러’를 꺼내며 환호를 지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땠냐 하면, 의외로 희열에 잠긴 소수의 이들 중 하나였다. 상자를 열었을 때 나는 아예 말을 잃었다. 감격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내 선물은 니콘사의 디지털카메라였다.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는 중고 제품이긴 했어도 그 당시 나의 눈에는 그런 흠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금은보화라도 본 것처럼 카메라의 이곳저곳을 살피기에 바빴다.

이후 나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특별한 걸 찍은 건 아니다. 낮잠을 자는 친구의 얼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헐벗은 나무, 창턱 위에서 화사하게 꽃을 피운 화분 같은 숙소의 정경.

그런 수수한 장면들을 내 카메라는 한 치의 거짓 없이 담아냈다. 그리고 찍은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마다 내 가슴속에서는 두근거리는 충족감이 일었다. 어딘가 세상의 한 조각을 내 손안에 쥐고 있다는 느낌.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을 진실의 한 귀퉁이를 담아낸 것 같은 느낌.

2

신년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날 밤 우리 숙소 안은 꽤 시끌벅적했다. 우리들과 동기 중 한 명인 재호 사이에서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아니, 사실 시비랄 것도 아니었다. 그 일은 명백히 재호의 잘못이었으니까.

시비의 중심에 놓인 물건은 ‘게임보이 컬러’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날 이후 ‘게임보이 컬러’는 사실상 우리 숙소 내 공공재가 되었다. 선물을 받은 친구가 워낙 순한 성격인 덕분도 있지만, 게임기 사용은 다함께 즐길 수 있어야 허락해 주겠다는 선생님들의 조건이 한몫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숙소에서 게임기를 사용중인 사람이 있으면 항상 그 주위로 오밀조밀 모였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게임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재호는 자기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침대 속으로 몸을 깊게 묻을 뿐, 게임기를 넘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 벌써 20분이나 지났는데 언제 넘길 거야.” 덩치 큰 친구인 인우가 말했다.

“아, 진짜 이거만 깨고 준다니깐?”

“그 말만 지금 다섯 번째 하는 거 알지?”

재호는 대답하지 않고 게임기를 자기 몸쪽으로 더욱 당겼다. 원래 재호와 사이가 좋지 않던 인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선 다소 위협조의 태도로 며칠 전에 작성한 ‘계약서’를 입에 올렸다.

“너 이틀 전에 계약서 쓴 거 기억 안 나냐? 한 번만 더 다음 사람한테 바로 안 넘기면 팬티 바람으로 보육원 열 바퀴 돌고 온다며.”

거짓말이 아니었다. 사실 재호는 상습범이었다. 여태 그는 게임기를 한번 잡는 순간 절대 손에서 놓지 않으려 했고, 그 행동이 몇 번이나 이어지다 못해 악명이 그에게 달라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굴러다니는 A4 용지에 계약서를 쓰고, 그에게 사인을 하게 만들었다. 최대한 수행하기 어렵고 수치스러운 내용에다가.

그러나 그의 태도는 우리들의 예상보다 훨씬 뻔뻔했다.

“증거 있냐? 계약서가 어디 있는데?” 재호가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들도 거들기 시작했다. “와, 이 새끼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밤에 종이를 몰래 버리면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쓰레기통 뒤져서 나오면 어떡할 건데?”

하지만 친구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재호는 이미 계약서를 완벽히 처리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그럼 쓰레기통 뒤져서 갖고 오던가. 가져오면 거기에 쓰여 있는 대로 할게.”

그 뻔뻔한 태도에, 여태 조용히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곧 파국이 오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보통 이런 상황까지 오면 남은 건 손과 발이었다.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말보다는 주먹과 발길질이 훨씬 수월하니까.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슬슬 자리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아예 잠시 복도에 나갔다가 들어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친구들의 이목은 나에게 쏠렸다.

“맞다. 야, 해준아. 네가 그때 카메라로 계약서 찍어놓지 않았냐?”

인우의 목소리가 공기를 울리자, 내 머릿속에서 이틀 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이 모여 계약서 내용을 토의하는 모습, 재호가 강제로 사인을 하는 모습, 그리고 계약서를 사진으로 남기는 나의 모습.

“어? 어, 그러긴 했지.” 나는 말했다.

“그럼 카메라 가져와 봐. 빼도 박도 못하겠네.”

인우를 포함해 친구들은 야릇한 미소를 짓거나 낄낄거리며 다시 재호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제 뒤졌다, 같은 말과 함께.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카메라가 없었다.

“근데, 나 지금 카메라가 없는데…….”

“어, 왜? 너 맨날 들고다니잖아.”

“아니 그게, 오늘 별관 교육실에서 특별 행사 있었잖아.” 나는 뺨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거 끝나고 다들 밖으로 나갔을 때, 빈 교육실 모습을 한 장만 찍으려고 했거든. 그래서 책상 위에 카메라 올려놓고 어떤 구도로 찍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교육실로 들어와서 날 내쫓는 바람에 빈손으로 나왔어. 그대로 별관에서도 쫓겨났고. 카메라는 내일 선생님한테 찾아달라 하려고.”

내가 말을 마치자 친구들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어떤 이는 입술을 살풋 물기도 했다. 지금 바로 재호를 합법적으로 골탕 먹이지 못해 언짢은 게 분명했다.

나는 괜스레 그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한 건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이니.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인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나 잠깐 별관 갔다 온다.”

“어?” 나는 얼른 인우를 바라봤다. “카메라 가지러?”

“그럼 다른 이유가 있냐? 어차피 오늘밤 담당이 경은 선생님이라서 우리쪽 숙소는 구경도 안 할걸? 그리고 별관 갔다 오는 데 5분도 안 걸리잖아. 까짓거 한번 해보지, 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밤에 선생님 몰래 숙소를 나가는 것도 탐탁지 않았지만, 사실 남이 내 카메라를 만진다는 사실이 싫었다. 나는 남에게 찍은 사진을 보여줄 때도 카메라를 항상 내 손에 쥔 채 보여줬다. 사진 일부분이 가려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친구들—게다가 대부분 남성인—은 조금도 섬세할 줄 몰랐고, 그들의 손을 타는 순간부터 언제 카메라가 망가질지 모른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허락 없이 별관에 가지 말라는 금기가 신경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냥 여기 있자. 내일 가져오면 되잖아.” 나는 인우를 말렸다.

하지만 인우는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 “야, 너는 저 꼬라지를 보고도 안 답답하냐?”라고 말하며 재호를 가리켰다.

재호는 여전히 게임기를 손에 쥔 채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단조롭고 귀를 찌르는 듯한 게임 음악이 침묵을 갈랐다.

“아니, 그게, 나도……”

나는 우물쭈물했다. 재호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빛에는 거의 적의가 불타고 있었다. 그게 삽시간에 폭력으로 번지리라는 것도 빤히 보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빛에도 유리 파편처럼 뾰족한 날이 서려 있었다. 마치 나를 나무라는 듯이. 그 중압감을 견디기 힘들었던 나는 결국 두고두고 돌아보게 될 선택을 했다.

“……내가 갔다올게, 별관.”

3

구름이 하늘을 반쯤 덮고 있었다. 샛노란 달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채 내가 저지르고 있는 일탈을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별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본관과 별관 사이의 거리가 얼마 안 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가까울 줄은 몰랐다.

다행히도 경은 선생님은 우리보다 어린 아이들이 머무는 숙소를 중점적으로 보고 있었기에, 나는 손쉽게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별관 입구 유리문 앞에 서 있자니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몰래 별관에 들어갔다가 선생님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혹여나 카메라가 그 자리에 없다면,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별관 안에 귀신이라도 있다면……

그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리고 어차피 매를 맞아야 한다면, 빨리 맞고 끝내는 편이 낫겠지.

애써 그런 생각을 떠올린 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스테인리스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은연중에 문이 잠겨 있기를 바랐으나, 유리문은 그런 마음을 비웃듯 맥아리 없이 당겨졌다. 별수 없이 나는 공포심을 지우듯 얼른 발을 내디뎠다.

별관 안은 어두웠다. 자원봉사자실도 교육실도 사무실도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다만 복도 끝에 세로로 길게 나 있는 창문으로 달빛이 비쳐들었기에, 사물의 윤곽은 충분히 구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벽을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복도를 나아가던 나는 금방 교육실 앞에 도착했다.

까치발을 든 채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교육실 중앙에 있는 넓은 책상 위에 카메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가 선생님에게 쫓겨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

열린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온 달빛에 비쳐 새하얀 광택을 내던 카메라는 어쩐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한시름 놓였다. 인기척은 없고, 카메라도 찾았고, 카메라와 함께 본관으로 돌아가면 아마 싸움도 멈출 거고. 발걸음이 가벼워진 나는 뒷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곧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뒷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잡이를 돌리려 해도 철컥 소리만 날 뿐 도저히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앞문도 열어보려 했으나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는 잠긴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따지고 보니 내가 실의에 빠질 이유가 없었다.

숙소에 돌아가서 그저 문이 잠겨 있었다고 말하면 되지 않는가. 동기들이 못 믿으면 인우한테 가보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재호 건은 아쉽게 됐지만, 그래도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질타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속에 고여 있던 고민을 어둠 속에 내뱉은 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모든 상황이 끝났다는 듯 입꼬리를 살포시 올렸다.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목소리 같기도 하고, 손톱으로 벽을 긁는 것 같기도 한 소리.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별관 구석에 있는 다목적실을 향해.

구석에 있어 창문과 가장 가까운 다목적실 앞 복도는 가장 환했다. 창문을 투과한 달빛이 유리 파편처럼 잘게 부서져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순식간에 귓속에서 동기들의 목소리가 겹치기 시작했다. “저주에 걸린대.”,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분명 귀신이 나타날 거야.”…… 내 얼굴은 파랗게 질려갔다.

그런 나를 다시 현실 속으로 끄집어낸 건 이어서 들려온 소리였다. 소리의 출처는 분명했다. 다목적실 내부. 내가 서 있는 교육실과 그곳까지는 거리가 꽤 있음에도, 이번에는 꽤 선명하게 들렸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기…….”

남성의 목소리였다. 굵지는 않지만 아마 변성기는 한참 지난 듯한 성인의 목소리. 어딘가 힘겹게 숨을 토해내는 듯한 목소리.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네, 네?”

무의식적으로 나는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금방 입을 틀어막고 후회했다. 내 목소리가 그—혹은 미지의 존재—에게 닿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문 좀 열어줄래?”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내 대답은 그에게 닿은 듯했다. 거친 목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러 왔다.

당연히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별관 입구를 돌아보면서도 이상하게 내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사실 발은 바닥에서 떨어졌다. 몸도 한쪽으로 기울었다. 별관 구석에 있는 다목적실을 향해.

나는 숨을 죽인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목적실이 가까워지면서도 스스로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정말 이 세상에 귀신 같은 게 존재해서 나를 홀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 홀린 상태였다. 몸 내부에서 세차게 들끓는, 치명적인 독과도 같은 호기심. 금지된 영역의 테두리를 밟는다는 은밀한 짜릿함. 혹은 정말로 누군가 다목적실 안에 갇혀서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나는 그런 거부할 수 없는 가능성 들에게 홀린 것이다.

내가 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다목적실은 침묵에 감싸여 있었다. 어쩌면 침묵의 농도가 더욱 짙어진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는 노크를 하려고 팔을 들었다. 그러고선 주먹을 움직이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문고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약 10초간 얼어붙었다. 다목적실은 외부에서 잠기는 구조였다. 그리고 지금, 방은 잠겨 있다.

왜?

막상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을 마주하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진짜로 안에 있는 건 사람인 걸까? 그렇다면 왜? 왜 사람을 이런 구석에 가둬놔? 무수히 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어떤 질문이든 그 대답은 알 수 없었다.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우리들이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면 선생님들이 회초리를 들지언정, 사람을 이렇게 방에다 감금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선생님이나 생판 남—을 가둘 리도 없었다. 달이 뜬 밤에, 아무도 없는 별관 구석에는 더욱더.

어떡해야 할까,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그런 나의 혼란을 잠재워주겠다는 듯이 다시금 다목적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있지? 혹시 문 좀 열어줄래?”

결국 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기에는 이미 내 머리가 과부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내 착각일지는 몰라도 그 목소리에서는 어딘가 간절함이 느껴졌다.

마른침을 삼킨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이윽고 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쳤다.

4

“……안녕?” 다목적실 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름이……”

나는 시선을 다목적실 안으로 고정한 채 계속 발끝으로 바닥을 밀며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이미 복도 건너편 벽에 등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내 입술에는 경련이 일고, 눈시울이 달군 쇠처럼 뜨거워졌다.

정말로 사람이 있었다. 다목적실 안에는.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눈이 세 개 이상이라거나,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소문 속의 괴물 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완전한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모습이 짐승에 가까울 뿐이었다. 산발이 되어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 얼굴을 반쯤 덮은 새까만 수염, 거적때기에 가까운 옷, 그리고 무엇보다도 깡마른 몸 군데군데에 보이는 흉터와 상처.

“이, 이해준이요…….” 나는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망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방 중앙에 힘없이 엎어져 있어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던, 어딘가 비애에 젖은 듯한 그의 두 눈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탓일까.

“이해준……” 그는 잠시 입안에서 내 이름을 굴려보았다. “해준아, 혹시 형 좀 도와주지 않을래?”

“도, 도와달라고요?” 나는 그제야 발걸음을 멈췄다. 차가운 벽이 등을 간지럽혔다.

“응,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야.”

“그, 그런데, 왜 그런 곳에 있는 거예요?”

참지 못하고 나는 질문을 꺼냈다. 그가 어째서 그곳에 있는지, 그가 누구인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듯 연신 가래 섞인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나를 달랬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 우선 내 부탁 좀 들어줄래?”

나는 등을 벽에서 뗐다. 그러고선 떨리는 발을 내디뎌 천천히 문 앞까지 걸어갔다. 묵직한 쇠붙이 냄새가 났다.

“무슨, 무슨 부탁인데요……?”

“간단해.” 그의 호흡은 거의 차분해져 있었다. “가위 좀 가져다줄래?”

가위? 나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가위 같이 위험한 물건은 보통 우리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만 있고, 그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했다.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리고, 가위는 왜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 가위를 달라고 하는 걸까. 휘두르기라도 하려는 걸까. 그럼 누구를 향해……

“어…… 저기, 저기 화분 보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그는 가느다란 팔로 방구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곳에는 자그마한 화분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제야 다목적실 내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분과 낡디낡은 매트리스 하나, 그리고 가로로 얇게 난 유리창 하나. 그게 전부였다.

“지금 저 화분에는 시든 꽃이 너무 많거든.” 그가 쿨럭이며 말했다. “이대로 두면 멀쩡한 꽃에 질병이 퍼질지도 몰라……. 그래서 얼른 잘라줘야 할 거 같은데, 가져다줄 수 있겠니? 가위.”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말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옆에 사무실 보이지?” 그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까딱거렸다.

나는 그가 까딱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무실이 있었다.

“응, 그쪽. 분명 업무 때문에 문은 열려 있을 거야. 가위는 아마 가장 안쪽 자리 서랍 아니면 그 주변에 있을 거고.”

잠시 동안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런 나를 그는 아무 말 없이 올려다보았다.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그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듯이.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온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의 말대로 안쪽 자리부터 서랍을 뒤지니 금방 철제 가위를 찾을 수 있었다. 사무실을 나온 나는 원래대로 문을 닫고 다목적실 앞으로 갔다. 그러고선 마지막 고민을 했다. 이 가위를 건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는 우물쭈물하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한 목소리인 것으로 보아 경은 선생님.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선생님. 그들이 별관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그도 나에게 작게 외치기 시작했다.

“해준아, 네가 여기 있는 걸 들키면 큰일 날 거야. 그러니까 얼른 가위를 주고 이 문을 닫아!”

나는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손을 뻗으며 작게 외친다. 그 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여 있다. 창문 너머 선생님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구름이 달을 가리며 눈앞이 어둠으로 뒤덮인다. 나도 그도 화분도 가위도 빛을 잃는다. 생각과 생각이 충돌한다.

그는 정말 시든 꽃을 자르려는 것인가. 나는 이 가위를 건네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어째서 저 사람의 눈은 나의 심장을 이렇게나 조이는 것인가……

결국 사고（思考）의 퓨즈가 끊겼다. 나는 다목적실 바닥에 가위를 내려놓고 얼른 문을 닫았다. 그러고선 잠금장치를 눌러 문을 잠갔다. 다행히도 선생님들의 목소리는 별관을 지나쳐 갔다. 나는 몇 발자국 떨어져 교육실 문에 몸을 기댄 채 빠르게 숨을 삼키고 내뱉었다.

이윽고 달이 몸을 드러내고 침묵이 세상을 덮었을 때, 나는 몇 번이나 고꾸라지며 별관을 빠져나왔다.

5

헐레벌떡 숙소로 돌아온 나는 바로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골랐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핀잔을 주던 친구들은 곧 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당황해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 세상에 박명이 스며들 때쯤, 나는 홀로 본관을 빠져나왔다. 얇은 겉옷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 팔이 오들오들 떨렸다. 나는 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왜 그곳에 있는지, 내가 별관을 떠난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는 내 도움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별관 입구에 도착한 나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뜻밖에도 유리문 너머로 사람이 보였다. 반대편 끝인 다목적실 문 앞에 선생님이 서 있던 것이다. 경은 선생님과 보육원 내 유일한 남자이자 인기도 많은 선생님인 주홍 선생님. 두 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목적실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은 선생님은 어젯밤의 나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그 모습을 본 나는 유리문을 열었다. 그러고선 천천히, 소리도 없이 다목적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오를 틈은 없었다. 선생님들 역시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다목적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별관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다목적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있었다. 휑뎅그렁한 방구석에 피투성이가 된 채 엎어져 있는 그가. 그의 오른손 가까이에는 입을 굳게 다문 가위가 놓여 있었다. 가위와 땅바닥에는 검붉은 피가 메말라 있었다.

“해준아 너 어떻게……!”

고개를 돌려보니 파랗게 질린 경은 선생님이 내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더니 그만 말을 잃었다. 뒤에 있는 주홍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주홍 선생님은 다목적실 안을 볼 수 없게 나를 옆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러고선 다시 경은 선생님 곁으로 가서 침묵을 지켰다. 그의 시선은 다목적실 안과 나를 왔다갔다했다.

그동안 나는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공포가 나를 짓누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자꾸만 눈시울을 비집고 새어 나오려 했다. 왜 그의 몸은 이런 곳에서 차갑게 식어가야 했을까. 어둡고 비좁은 곳에서 쓸쓸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주홍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선 무릎을 구부려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해준아, 잘 들어.” 평소와 달리 주홍 선생님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여기서 너가 본 걸 절대 다른 친구들에게, 아니, 누구에게라도 이야기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때가 되면 모두 설명해 줄게, 알았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는 없었다.

6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본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해가 뜨고 지고, 비가 내리고 눈이 내렸다. 봄에는 꽃잎이, 가을에는 낙엽이 밟혔다. 변한 건 없었다. 나 역시 고등학생이 되었을 뿐, 여전히 보육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주홍 선생님이 나를 상담실로 불렀다. 처음에는 보육원을 나가게 되면 어떤 식으로 자립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상담실로 들어가자, 주홍 선생님은 먼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준아, 그때 일 기억하지?”

주홍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꽤나 길었다.

그때 다목적실에 갇혀 있던 남자의 이름은 ‘임유호’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 보육원의 원생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말이 적었지만, 워낙 유순하고 이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선생님들에게 이쁨을 받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처음으로 친부모를 만나고 온 그는 점차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정신에 모종의 문제가 생긴 것인지, 선생님들과 함께 여러 번 병원에 들러 진단을 받고 약도 타왔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발작의 주기는 짧아지고, 그 난폭함이 증가했다. 주변의 물건을 모조리 부숴버린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발작을 일으킬 때를 제외하면 그는 너무나 멀쩡했을뿐더러, 발작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한 행동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그의 성격은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언제나 숙소 안, 그곳에서도 최대한 구석에 틀어박혔다. 가슴속에서 문을 굳게 걸어 잠근 것이다. 언제 자신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면, 그의 두 눈은 언제나 두려움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당연히 더 이상 학교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피했고, 그도 그것을 바랐다.

그렇게 보육원 내에서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첨예하게 오갈 때쯤,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평소보다 좀 더 난폭한 발작을 일으켰고, 보다 못해 그를 도와주러 온 친구의 팔 살점을 그만 물어뜯어 버린 것이다.

이윽고 발작이 멎어 제정신이 든 그는 뜯긴 침대 매트리스를 보았고, 눈앞에 쓰러진 친구를 보았고, 입안에 퍼진 쇠 맛을 느꼈다. 그는 금방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러고선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져 목 놓아 울부짖었다.

끝내 그는 선생님들에게 절실히 부탁했다. 자기를 아무도 없는 곳에 가둬달라고. 그러고선 없는 사람인 양 취급해 달라고.

“우리 보육원에서 안 쓰는 방은 아무래도 다목적실 정도밖에 없었지.” 주홍 선생님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된 거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방안도 내지 못한 채 시간만 하염없이 흐른 거지……”

나는 긴 시간 동안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종이컵에 있는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고개만 살짝 끄덕였을 뿐이다.

“사실 지금까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고민했어. 괜히 해준이 네가 받은 충격을 들쑤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래도 그때의 충격은 거의 다 잊은 것 같아 다행이네.”

주홍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상담실을 나온 나는 천천히 별관 쪽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문제 될 건 없었다.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별관에 출입할 수 있다. 그날 이후에도 별관에 관한 금기는 얼마간 남아 있었지만, 바닥에 묻은 물이 증발하는 것처럼 차차 잊혀졌다. 금기가 생기고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주홍 선생님은 나에게 그날의 충격을 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말했으나, 사실 나는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지금도 가끔은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슬픔에 젖은 눈이 아른거리고,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깊은 고민에 빠질 때도 있다. 만약 그날 밤 내가 그에게 가위를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하고.

만약 내가 그에게 가위를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아직 별관 출입을 금지한다는 금기가 유효할지도 모른다. 다목적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고, 그도 좁은 방 안에서 여전히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좋은—혹은 사리에 맞는—일일까. 나는 알 수 없다. 아마 숨이 멎을 때까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별관 유리문을 연 나는 맞은편 복도 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달큰한 섬유 유연제 향이 코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다목적실이었던 방 안에는 이제 세탁기 네 대가 들어서 있다. 문패에도 ‘다목적실’ 대신 ‘세탁실’이라고 적혀 있다. 보육원 측에서 본관에 있던 세탁실의 세탁기 수가 부족하다는 명목을 내세워 세탁기를 추가로 구입한 후, 다목적실의 이름을 세탁실로 바꾼 것이다.

나는 세탁실 문 앞에 서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바디의 감촉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퍼졌다. 사실 카메라를 꺼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그날 이후로 사진 찍는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뷰파인더에 눈을 댄 나는 새하얀 햇빛이 드는 세탁실의 모습을 찍었다. 각도를 조금씩 달리하며 일곱 장 정도. 그러고선 앨범으로 들어가 방금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곳에는 이제 그의 모습도, 그가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과거의 나는 사진이란 게 어딘가 진실의 한 귀퉁이를 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진을 찍었고, 틈만 나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카메라는 객관적 사실을 담을 수는 있을지언정 진실을 담아낼 수는 없다.

그날 밤, 별관 교육실 문이 열려 있어서 내가 카메라를 되찾았다면, 그래서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형형했던 그의 두 눈을 카메라에 담는다고, 그의 마음속에 있던 시든 꽃도 함께 담아낼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실 같은 건 눈으로 볼 수 없다. 다만 가슴속에 담아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