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는 자연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유별났다. 남해 바다에 위치한 외딴 섬 ‘연도（鳶島）’의 겨울은 특히나 악독하게 느껴졌다. 바닷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고, 파도는 항구의 방파제를 집어삼킬 듯이 내리쳤다. 이런 날씨에 섬을 찾는 관광객은 없었다.

김준석은 그런 날씨를 무릅쓰고 연도에 발을 디뎠다. 죽은 누나의 유품인 노트북을 들고. 누나는 1년 전, 이 섬에서 열린 워크숍에 다녀온 후 정신이 이상해져 자살했다. 노트북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일기의 마지막 문장이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여기 잠들어 있어. 깨어나지 않기를, 그저 잠들어 있기를.’

준석은 누나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고 믿었다. 섬의 모든 것이 수상쌍팔년도처럼 느껴졌다. 공식적으로는 영세한 어민 몇 가구만 남아 사는 쇠퇴한 섬이었지만, 마을 입구에는 최근에 세운 듯한 현대적인 민박집들이 즐비했고, 섬 중앙의 오래된 한식당은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 보였다. 모두가 어딘가 어색하고 딱딱해 보였다.

“혹시, 1년 전 쯤 여기서 워크숍 같은 게 열린 적 있나요?” 준석이 민박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잠시 멈칫하다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아뇨, 그런 건 못 봤네요. 섬 사람들끼리 모이는 자리만 가끔 있을 뿐이죠.”

거짓말이었다. 준석은 누나의 SNS에서 그 워크숍의 현수막이 걸린 사진을 봤다.

그날 밤, 준석은 노트북을 켜 누나의 파일을 더 뒤졌다. ‘워크숍_자료’라는 폴더 안에, ‘잠복（潛伏）’이라는 제목의 동영상 파일이 숨겨져 있었다. 영상은 심하게 흔들렸다. 누나의 숨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이상해… 평범한 워크숍인 줄 알았는데… 뭔가 의식 같은 걸 하자고 해. 여기서 뭘 기다리는 거지? ‘잠복’? 그게 뭐야? 저기… 저 사람들 표정이… 으으…”

영상은 그대로 끊겼다.

다음 날, 준석은 섬을 샅샅이 조사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결국 해안가의 폐가처럼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낡은 책들과 이상한 부적들이 널려 있었고, 벽에는 섬의 지도가 걸려 있었다. 지도에는 섬의 각 지역에 ‘잠복률 85%’, ‘동화 진행 중’ 같은 낙서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발소리가 났다. 준석은 급히 몸을 숨겼다.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새로운 ‘숙주’가 왔던데. 아직 모르나 보네.”
“조용히. ‘잠복’이 거의 완료됐어. 이제 ‘각성’ 단계만 남았지. 방해하면 안 돼.”

남자들이 나가자, 준석은 경찰에 신고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신호가 나지 않았다. 그때, 그의 휴대폰에 알 수 없는 번호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당신의 누나도 그랬듯, 당신도 곧 이해하게 될 거야. 거역하지 마세요.』

준석은 공포에 질려 민박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그의 짐은 문 앞에 내던져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민박 주인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등 뒤’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뭐지?”

준석이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민박 주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준석의 몸속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라도 하는 것처럼.

『숙주가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동화를 서둘러주세요.』

휴대폰에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섬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달렸다. 하지만 부두에는 배가 없었고, 주파수를 잡은 듯한 라디오에서 이상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잠복이 완료된 구성원들은 연회장으로 모여 주세요. 각성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연회장? 그것은 폐가처럼 보이던 그 건물이었다. 준석은 발걸음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누나의 죽음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문을 열자, 안에는 섬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일렬로 서서, 앞에 놓인 검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준석이 들어오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왔구나, 준석 씨.”
“누나가 그리워했어. 이제 함께할 때야.”

그들은 준석을 에워쌌다.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쓰러졌고, 누군가가 그의 입에 차가운 검은 물을 붓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의 집 침대에 누워있었다. 밖에는 평화로운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온몸이 으슬으슬했지만, 모든 것이 꿈이었던 걸까? 그는 안도하며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대부분 회사 동료와 친구들이었다. ‘무사하냐’, ‘섬에 태풍이 와서 연락이 두절됐다던데’라는 내용이었다.

“태풍?”

TV를 켜니, 뉴스에서 연도에 큰 태풍이 상륙해 피해가 컸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가 섬에 있었던 그 시간과 맞아떨어졌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기억이 혼동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안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득, 그의 시야 가장자리가 어딘가 이상하게 흐릿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세상에 얇은 막이 하나 쳐진 것처럼. 그리고 가끔,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이 너무 경직되어 보였고, 그들의 눈빛이 너무 멀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회사에서 상사가 다가와 그의 업무 보고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사의 입은 움직였지만, 준석의 머릿속에는 다른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보고서. 승인. 다음 단계. 동화. 진행.』

“네? 뭐라고요, 과장님?”

상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되뇌었다. “보고서 승인해줬으니, 다음 단계 진행하게.”

그러나 그 목소리는… 섬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와 똑같았다.

공포가 엄습했다. 그는 집으로 뛰쳐나와 거울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도, 어느새 다른 사람들처럼 깊고 막힌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는 자기가 준석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미친 듯이 누나의 노트북을 다시 켰다. ‘잠복’ 동영상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일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새로운 텍스트 파일 하나가 생성되어 있었다.

『잠복（潛伏）: 표면의식 아래에 잠재의식을 침투시켜 대체하는 과정. 완료 시, 개체는 집단의식의 일부가 되며, 외부 위협에 노출되지 않은 안전한 상태（잠복 상태）를 유지한다. 각성 명령이下達되기 전까지는 자아를 유지하는 듯한错觉을 보인다.』

『동화（同化）: 잠복이 완료된 개체가 집단의식에 완전히 융합되어, 더 이상 원래의 개체가 아니게 되는 최종 단계.』

『당신의 잠복은 완료되었습니다. 각성을 기다려 주십시오.』

준석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에서 나는 소리는冷冰冰한 기계음처럼 느껴졌다.

文 밖에서 인터폰이 울렸다. 경찰 제복을 입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김준석 씨? 연도에서 실종 신고가 접수되어 수색 중인데, 무사하시다니 다행이군요. 괜찮으시면 같이 가서 신고를 취소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친절해 보였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준석의 뒤, 그의 등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

준석은 문고리를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알게 되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김준석’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동화’되지 않아 제어가 불안정한, 그가 몸속에 ‘잠복’시킨 무언가를 되찾아 가려는 것임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자, 그곳에는 그의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년 전, 그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과 똑같은 공허하고 맑은 목소리로.

“준석아, 이제 와. 우리都在여기 있어. 깨어나지 않기를, 그저 잠들어 있기를… 기다리고 있어.”

문 앞의 경찰이 벨을 다시 누르며 말했다. 그들의 입가에는 미묘한, 그러나 확실한微笑가 걸려 있었다.

“김준석 씨, 문 좀 열어주세요. 저희가 데리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