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주 전쯤에 이상한 일을 하나 겪었는데, 들어볼래?”라고 H가 내게 말했다.

나와 H는 교내 카페에서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학교는 달랐지만 우연히 종강 날짜가 겹친 탓에,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볼 겸 내가 그녀의 학교까지 놀러 간 터였다.

“왜, 또 기숙사에서 바퀴벌레라도 나왔어?” 나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H는 평소에도 별것 아닌 걸로 괜히 분위기를 잡고는 했다.

“야, 이번엔 나도 나름 진지하다고.” 하지만 그녀는 입꼬리를 굳힌 채 말했다.

“알았어, 뭔 일인데.”

하는 수 없이 나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는 사이 H는 빨대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중간고사 끝나고 축제 기간 때였는데……”

“2주 전이라며.”

“아, 좀 참을성을 갖고 들어봐. 아무튼, 축제 기간 때 나는 공연은 안 보고 친구들이랑 같이 푸드 트럭에서 음식이나 사 먹었다? 어차피 우린 아이돌한테 그닥 관심이 없으니, 시험도 끝난 김에 그냥 길게 수다나 떨자는 거였지.

그렇게 떡볶이, 타코야키, 초밥 같은 걸 잔뜩 사서 천막 아래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폈어. 그런데 한 5분도 안 지나서 갑자기 저 멀찍이 앉아 있던 남자 넷이 다가오더니,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묻는 거야.”

“오, 그거 참 이상한 일이네.”

H는 내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두 학번 위였는데, 기계공학과라고 했어. 솔직히 나는 그냥 우리끼리 놀고 싶었는데, 친구들은 아니었나 봐.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라고（다들 잘 생기긴 했어）. 그걸 보고 내가 뭐라 하는 것도 좀 그러니 가만히 있었고, 얼마 안 가 합석하게 됐지.

분위기 자체는 좋았어. 시험이 끝나기도 했고, 옆에서는 노랫소리랑 함성도 들렸으니까. 웃긴 건 접시를 다 비울 때쯤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짝이 형성되는 거 있지? 문득 고개를 한 바퀴 돌려보니, 친구들은 각자 남자 한 명씩이랑 눈을 맞추고 있더라니깐. 무슨 퍼즐 맞추기 게임이라도 보는 줄 알았어.

그리고 나는—어쩔 수 없는 일이지—남은 남자랑 눈을 맞추게 됐어. 그 사람의 이름은 K였어. 덩치가 큰 편이긴 한데 딱히 위압적이지는 않은, 그런 스타일? 이야기를 조금 나눠 보니 착한 사람인 것 같더라고. 아니, 순박하다고 해야 하려나……”

“그래서, 그 다음엔?” 나는 입을 쩍 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게를 잡고 하는 이야기가 염장질이란 말인가.

“축제 기간이 끝나서도 K 선배한테 계속 연락이 왔어. 특이한 연락은 아녔어. 그냥 일반적인 대화였지. 과제는 어떠냐, 밥은 먹었냐, 뭐 그런 말들 있잖아.

딱히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건 아니었어. 어쩔 수 없이 이어 나간 거야. 친구 중 한 명이 축제 때 만난 선배랑 연애를 시작한 탓에 나머지 친구들도 계속 다른 선배들이랑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거든. 나 혼자 연락을 무시하면 K 선배가 좀 뻘쭘해질 수도 있잖아.

그런데 조금씩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게, 그날 이후로 자꾸만 K 선배를 마주치는 거야. 점심 먹으러 학생회관으로 갈 때나 수업 끝나서 건물 밖으로 나올 때 말야. 심지어 우리 과 건물인 경영관 주변에서. 내가 알기로 기계공학과는 제2공학관을 쓰는데, 경영관이랑 제2공학관은 걸어서 10분 거리거든? 아무래도 좀 꺼림칙하잖아.”

“뭐야, 스토킹 같은 거라도 당한 거야?” 나는 그제야 꼬여 있는 다리를 풀고 H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음, 그렇다고 하기는 좀 어렵고, 선배의 태도는 그냥 평범했어. 마주치면 손을 흔들고, 방긋 웃으면서 인사하고……

그래도 너무 자주 마주친다 싶어서 한번은 내가 여기에 뭐 하러 온 거냐고 물은 적이 있어. 막힘없이 대답하더라고. 아는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그래서 내가 일부러 기다려봤다?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2분 정도 지나니까 진짜로 친구분이 내려오는 거야. 둘이 만나서 과제가 어쩌고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멋쩍어져서 슬쩍 자리를 피했지.”

H는 목이 탔는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K 선배를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괜히 모든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 너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감이라는 게 있잖아. 분명 선배의 행동은 다른 친구들이랑 별다를 게 없었는데도, 괜히 꺼림칙했어. 그리고 그 선배 옆을 지나칠 때마다 뭐랄까……” H는 희미한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욕정의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게 느껴졌어.”

“더 말해봐.” 나는 말했다.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이상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이후로”라는 말을 시작으로, H는 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5월 중순부터 H는 겁을 먹은 고슴도치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수업 따위는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정석이나 다름없던 강의실 맨 앞자리를 포기하고, 그녀는 맨 뒤 구석 자리에만 앉기 시작했다. 뒤에 조막만 한 공간이라도 있으면 그곳에서 K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K를 마주치는 일은 여전히 같은 빈도로 이어졌다. 어떤 때는 무지 맨투맨을, 어떤 때는 단정한 셔츠를 입은 K는 H의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접근은 없었다. 마치 목표물의 특성을 이미 속속들이 꿰고 있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그러니 H의 머릿속이 K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찬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주말을 이용해 홀로 기숙사에 틀어박혀 고민을 이어 나갔다.

K 선배는 사실 학기 초부터 자주 경영관을 들락날락한 게 아닐까? 나는 그냥 관심이 없어서 선배를 배경으로 치부했던 거고, 축제 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후부터 선배를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게 된 게 아닐까?

천천히 머릿속에 흩어진 사고의 실을 한데 묶고, 그것으로 논리의 빈틈을 바느질해 나가던 H는 어스름이 질 때쯤 끝내 결론을 내렸다.

그래, 지금까지 내가 예민하게 굴었던 거야. K 선배는 그저 나를 친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대한 것뿐이지. 더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어.

그녀는 침대 위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어’를 세 번 되뇌었다. 그러자 누군가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린 것처럼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말끔히 사라졌다.

그 후로는 금방 일상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는 강의실에서 간헐적으로 뒤를 흘끔거리지 않았고, 밥을 먹으러 갈 때도 학생회관까지 빙 돌아가야 하는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나갈 수 있었다. 심지어 K를 마주칠 때면 그에게 다가가 살갑게 인사했다. 그 무렵 그녀는 K에게 호감마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은 종강 2주 전에 발생했다.

H는 같은 과의 친구（물론 여성이다）에게 빌린 보고서를 돌려주기 위해 늦저녁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친구의 기숙사는 H가 살고 있는 기숙사의 반대편에 있는 데다, 언덕 위편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는 동안 땀이 줄줄 흘렀다.

그날 과외 때문에 방을 비운 친구는 메시지로 H에게 다소 황당한 제안을 건넸었다.

보고서는 내 방에 직접 들어가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돼. 건물 입구는 학생증만 있으면 열리니까. 그리고 책상 위에 페레로 로쉐도 있거든? 나갈 때 그거도 갖고 나가. 나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더라.

워낙 털털한 성격을 가진 친구였기에 H도 그만 피식 웃으며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었다.

그렇게 시험공부를 하다가 저녁을 맞이한 H는 보고서를 돌려줄 겸, 산책이라도 할 겸 캠퍼스를 가로지른 것이다. 약 10분을 걸어간 H는 어렵지 않게 친구의 방을 찾아 들어갔고, 책상 위에 보고서를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초콜릿을 찾던 H는 문득 책상 안쪽에 있는 카메라와 커다란 망원렌즈를 발견했다. 그러자 친구가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H는 그녀에게 몇 번인가 카메라 사용법을 들은 적도 있었다. H는 잠깐 고민을 하고는 곧바로 망원렌즈를 들어올렸다. 이대로 방을 나와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가면 어차피 시험공부를 할 테니, 잠깐의 여유를 즐기려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용법이 잘 기억나지 않아 애를 먹긴 했지만, H는 금방 익숙해졌다. 렌즈 후드를 빼서 반대쪽에 끼고는 카메라 바디를 장착했다. 그러고선 창문을 열고 뷰파인더로 보이는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H는 확대된 가로등이나 그 옆에 걸린 배너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배너에 적힌 ‘미래를 향한 도전’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H는 그 정경에 이질감을 느꼈다. 자세히 설명은 못 하겠지만, 확대된 세상이 자신이 알던 세상과는 사뭇 다른 곳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이상한 나라처럼.

그럼에도 눈이 점차 확대된 세상에 적응하자, H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걸로 내 방을 바라보면 어떨까? 그녀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손의 위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확대된 시야로 자그마한 제 방을 찾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H는 기어이 반대편 기숙사 건물 4층 끄트머리에 있는 제 방에 초점을 맞추었다. 방 안은 커튼도 걷혀 있고, 불도 켜져 있었기 때문에（H는 방에 들어갈 때 불이 꺼져 있는 것을 싫어했다） 구석구석까지 훤히 보였다.

멀리서 자신의 방을 확대된 모습으로 보고 있자니, H는 새삼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책상 위에 놓인 샤프나 공책, 노트북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막상 타인의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독립된 생물 같아 보였다. 마치 고유한 제 삶의 방식이 있는 개미나 지렁이처럼.

카메라를 살짝 들어올리자 일인용 침대가 보였다. 침대 위의 이불은 허물을 벗은 뱀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돌아가면 이불부터 개야겠네. 피식 웃은 그녀가 그만 카메라를 내려놓으려던 때였다.

H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툼한 누군가의 맨발과 맨다리가 뷰파인더 위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의 방은 1인실이었다. 친구를 방으로 초대한 적도 없었다. 누군가 들어올 리가 없었고, 들어와서도 안 됐다.

H는 그대로 경직된 채 침대만 바라보았다. 누구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과 알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충돌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금방 멈추고 말았다. 낯선 다리가 마치 그곳이 제 방인 양 주저 없이 안쪽으로 걸어오더니,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은 것이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틀림없이 K였다. 하지만 침입자의 정체보다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한 건 K의 상태였다.

그는 나체 상태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왼쪽 어깨 부근에 박혀 있는 흙빛 점과, 다리에 난 촘촘한 털까지 뚜렷이 보였다.

표정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의 미소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그 얼굴에는 감정이랄 게 비치지 않고 있었다. 입술은 일자 모양으로 굳게 닫혀 있고, 눈은 반대쪽 벽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벽을 응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망막에는 그 무엇도 맺혀 있지 않았다.

그 상태로 K는 미동도 없이 계속 앉아 있었다.

“신고는 했어?”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야기가 클라이맥스까지 도달했을 때 나는 이미 커피도 잊어버린 후였다.

“바로 카메라를 내려놓고 내 기숙사로 달려갔지.” H는 턱을 괸 채 말을 이었다. “그러고선 1층에 있는 사감실부터 들어갔어. 미친 남자가 내 방에 들어가 있으니까 빨리 CCTV부터 확인하자고 했지.

원래는 CCTV를 열람하려면 무슨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했는데, 내가 워낙 질색을 하고 있으니까 사감 선생님도 결국 그 자리에서 확인하더라고.”

“와, 하필이면 시험기간에…… 경찰서 왔다갔다하느라 피곤했겠네.”

“경찰서에는 안 갔어.” H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아니, 왜? 그런 미친놈을 봐주면……”

“그런 게 아니라,” H는 약간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놓고 말을 이었다. “K 선배의 모습이 CCTV에 나타나지 않았어.”

“뭐?”

“말 그대로야. K 선배는 고사하고, 어떤 남자도 기숙사 입구를 지나가지 않았어（여자 기숙사니까 당연한 거지만）. 누군가 내 방 앞을 지나간 흔적도 없었지. 혹시나 해서 하루치를 전부 확인해 봤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어. 진짜 어이가 다 없더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감 선생님께 같이 내 방에 들어가달라고 부탁했어. 그렇게 선생님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따라서 들어갔지. 근데 내가 나올 때 모습 그대로더라고. 샤프의 위치와 공책에 쓰인 필기, 널브러진 이불까지. 카메라로 보던 모습이랑 똑같았어.

뭐, 별 수 있나. 나는 선생님께 사과부터 했지. 심지어 나중에 다른 친구가 알려줬는데, 내가 카메라로 내 방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K 선배는 자기 친구들이랑 캠퍼스 밖에서 술 먹고 있었다더라.”

“그럼 네가 본 건 뭔데?” 나도 어이가 없어서 물어봤다.

“몰라, 시험공부하다가 정신이라도 나갔나 보지.” H는 피식 웃었다. “뭐, 정신이 나간 채로 본 것 치고는 너무 리얼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