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문득 사람들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아무런 기약도 예고도 없었다. 우연한 대충돌로 우주가 탄생한 것처럼 그저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숫자는 검은색 명조체로 쓰여 있었으며, 크기는 대략 케이크 한 조각 정도였다.

숫자가 나타난 첫날 인류는 혼란에 빠졌다. 전례 없는 일일뿐더러,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했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박차를 가하려는 것인지, 제 머리와 남의 머리 위에 달린 숫자를 확인한 후 제각각 그에 대한 의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은 생명（연 또는 일 수）이다”, “성관계를 맺은 횟수다”, “아니다, 지금까지 먹은 끼니의 수다”…… 사람의 상상력이라는 게 대개 그렇듯 터무니없는 추측만이 난무했다.

그러나 그런 ‘숫자 연구’ 열풍은 의외로 싱겁고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숫자가 머리 위에 나타난 지 꼬박 2주 만에 그 정체가 낱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숫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의미를 조리 있게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마치 티스푼으로 밥을 먹는 것처럼. 따라서 나는 나름의 전문가들（도대체 이런 상황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뭐하는 사람들일까?）이 머리를 맞대고 분석한 후 제출한, 정부의 공문서 내용을 인용하겠다.

（i）      20○○년 4월 12일 오전 12시 00분（PST）을 기준으로, 인류의 정수리 위에 표시되기 시작한 수는 양의 정수뿐이다.

（ii）      해당 양의 정수는 타인과의 사적인 만남을 가질 때마다 ‘1’씩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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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이런 모호한 내용이 세 페이지 정도 적혀 있다.

위 문서를 읽은 사람들은 팍 김이 새고 말았다. 사실 그때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숫자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가지게 되는 공적인 만남—가족도 포함되는 듯했다—은 숫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친구와 영화를 보거나 애인과 데이트를 하는 등의 사적인 만남은 숫자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공식이 너무나 직관적이었던 반면, 2주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궁금한 건 단 하나였다. ‘그래서 숫자가 0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데?’, 라는 순수한 의문. 그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의문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흐릿해져 갔다. 아무래도 숫자가 0이 되는 모습은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표시된 숫자는 사람들마다 달랐지만, 작게는 10,000에서 크게는 십만까지 고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숫자가 10,000이라면, 매일 사적인 만남을 한 번씩 가진다고 해도 25년을 거뜬히 넘길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더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숫자는 일종의 증표로도 쓰이게 되었다. 수가 작을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어딘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사실로 여겼다. 나는 이만큼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랍니다, 라고 말하듯이.

다만 나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숫자가 처음 표시되기 시작한 날 내가 화장실 거울에서 마주친 수는 ‘714’이었다. 왜 굳이 714인지는 나도 모른다（다른 누구는 알겠냐마는）. 그리고 나는 이제 고작 스물여덟에 말짱한 신체를 가진 청년이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아직 살아온 나날보다 살아갈 나날이 더 많아 보인다.

한때 사람들은 숫자가 0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토론을 시도 때도 없이 나누었다. 여러 의견이 나오긴 했으나, 비상식적인 주제에 걸맞게 결국에는 항상 같은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근거는 전혀 없지만 아무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라는 결론 말이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달리 벌어질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보다 그럴듯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숫자가 나타나고 처음으로 학원에 나갔을 때는（나는 학원 강사다） 동료 선생님들이 나를 귀신이라도 본 듯 쳐다보았다. 그러고선 아차 싶었는지, 이러쿵저러쿵 위로의 말을 던지고 커피를 사다 주었다. 학원 안에서 그 정도로 관심을 받아본 건, 툭 튀어나온 의자에 발이 걸려 넘어졌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호들갑에 비해 정작 나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폐쇄적인 성격의 사람이다. 두고두고 만나는 친구나 애인 따위는 전혀 없으며, 숫자가 0이 될 염려 또한 없다. 물론 사회성이 부족하다거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면 강사 일도 이미 잘렸을 것이다. 나는 단지 타인과의 관계를 이어 나가는 데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구태여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어릴 적부터 나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없었다.

가족은 부모님뿐이며, 두 분 모두 나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머무를 공간을 주고 끼니를 챙겨주는 정도가 한계였나보다. 가족 간의 정 따위는 눈 씻고 들여다봐도 찾을 수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부모님이 갑자기 ‘너는 사실 주워 온 아이란다’라고 말해도 그다지 이상할 건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고 함께 운동장을 달리며 축구공을 찼지만, 허물없는 관계까지 발전한 친구는 없었다. 내가 진심을 공유할 수 있었던 상대는 오직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수컷 셰퍼드뿐이었다. 그마저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검은색 SUV에 치여 죽었지만.

덕분에 나는 눈에 띄게 작은 수를 가졌음에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숫자가 생긴 지 반년이 지나도 내 머리 위에 쓰인 숫자는 712였다. 반년 동안 사적인 만남을 고작 두 번 가진 것이다.

남들에게는 좁쌀만하게 느껴질 수의 크기가 나에게는 광활한 우주의 크기와도 같았다.

*

이변의 틈새는 다음 해 1월에 생겨났다.

“그럼 당신은 이미 숫자가 0인 거나 다름없네요.” 그녀는 유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날 동료 선생님의 결혼식에 와 있었다. 서슬 푸른 바람이 살을 에는 날이었다.

도로가 한참이나 밀린 탓에 나는 그만 식에 조금 늦고 말았다. 가까스로 식장에 도착한 나는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급히 앉았고, 결혼 행진곡과 함께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흰 테이블 맞은편에서 한 여성이 내가 자리에 앉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처음 보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머리 위에 쓰인 숫자가 ‘948’이었기 때문이다. 나 이외에 숫자가 세 자리인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미 내 숫자를 확인했는지 살며시 입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터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이제 막 내가 머리 위에 달린 숫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 참이었다.

“저희가 앞에서 입을 모아 말했잖아요. 0이 되면 죽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 말은…… 제가 죽은 사람이랑 다를 바가 없다는 건가요?”

“그렇게 되죠.”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쪽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포크와 나이프로 가볍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나는 그녀의 저의가 궁금해졌다.

“제가 왜 죽은 상태라는 거죠?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저는 지금 이렇게 숨을 쉬고, 그쪽과 대화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녀는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 숫자가 몇이었나요?”

“712였습니다.”

“저는 949였어요.”

지금 그녀의 머리 위에는 948이 적혀 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 카메라를 켜 내 머리 위를 확인했다. 여전히 712였다.

“그래서, 그게 앞의 이야기랑 무슨 상관이란 겁니까?” 나는 어쩐지 불편해져 약간 삐딱하게 물었다.

“간단해요. 당신은 숫자가 처음 생겼을 때랑 지금이랑 큰 차이가 없죠?”

“714에서 시작했습니다.”

“저는 1,121에서 시작했어요.”

“네?” 나는 칼질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고작 9개월 동안 150번이나 넘게 사람을 만나고 다닌 건가요?”

“아뇨.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 반년 동안 150번 넘게 만난 거예요.”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년 동안 150번을 채운 거면, 처음 3개월 동안은 무엇을 한 것인가. 게다가 숫자가 0이 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째서 헤프게 숫자를 줄이고 다니는 것인가.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는 턱을 괸 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도 숫자가 처음 생긴 때부터 3개월 동안은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았어요. 그때는 막연히 숫자가 0이 되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그다지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과 사회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긴 했지만, 그래도 1,121이라는 수가 터무니없이 작은 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친구를 만난다 하더라도, 20년을 고작 넘기는 게 전부잖아요.

한동안은 거울을 보면서 온갖 심술을 부렸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10,000이 넘는데 왜 나만 이런 숫자를 갖고 있나, 하면서요.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죠.

그렇게 3개월 동안 기계처럼 집과 직장을 오가기만 했을 때였어요.

문득 퇴근을 하는데,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뭐,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었을 테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거 있죠?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울어본 횟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잘 울지 않는 사람인데 말이에요. 아무튼 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어요. 나는 정말로 숫자밖에 모르는 기계가 되어버렸구나. 나는 그림자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하고요.”

“그래서,” 나는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마구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겁니까?”

“만나고 다닌다고 하니 어감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 말대로예요. 친구들과 같이 산책도 가고, 해외여행도 가고, 소개팅에도 나갔어요.”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약간 우스웠다. 그녀는 그저 감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는 그쪽과 달리 현재 제 생활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데요.”

나는 허를 찌르는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가슴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 점에서 이미 숫자가 0이 된 거나 다름없다고 말한 거예요.”

“네?”

“한번 눈을 감고 상상해 보실래요? 당신은 지금 금속으로 된 인공위성이고, 지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요. 보이는 거라곤 어둠밖에 없는 우주를 일정한 궤도를 따라 떠돌고 있죠.”

허무맹랑한 요구를 나는 거절하려 했으나, 딱 잘라 거절할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눈을 감고 인공위성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밑에는 지구가 여리고 푸른 빛을 띠고 있어요. 그걸 내려다보면 구름과 바다, 육지밖에 보이지 않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요. 그들이 지금쯤이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겠구나, 커튼을 치고 잠을 자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전부죠. 그들과 당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텅 빈 공간을 유영하던 어느 날, 당신은 다른 인공위성을 마주치게 돼요. 우연히 궤도가 겹치게 된 거죠. 하지만 당신과 그 인공위성은 그저 서로 지나칠 뿐이에요. 안부를 묻는 인사도 없이, 다음에는 어디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그러니까,” 나는 그만 눈을 떴다. 더 어울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쪽은 제 생활방식이 떠돌이 인공위성이랑 같고, 그런 삶은 죽은 사람의 삶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는 거네요?”

“정확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약간 화가 나서 말했다.

“저기요, 내가 어떻게 살든—가령 시체로서 살아간다고 해도—간에 그건 남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나는 내 삶에 아무런 불만이 없단 말입니다. 그쪽이 아무리 설교를 해도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고,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도 압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숫자에 불만이 있더라도, 나는 당신같이 숫자를 마구 남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결말이 빤히 보이는데도 굳이 그 앞으로 나아가는 불나방 같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가 다소 중의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그게 무엇에 관한 질문인지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어느덧 신랑 신부가 퇴장을 하고 있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때가 됐다는 듯 검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사진 촬영 준비를 하러 가야 할 것 같네요. 만나서 즐거웠어요. 부디 지구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기를 바라요.”

조용히 속삭인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신랑 신부를 향해 박수를 치더니, 이내 식장 가장자리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념사진 촬영 과정을 건너뛴 나는 홀로 건물을 나왔다. 거리는 여전히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와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나는 말보로 갑을 꺼내 마지막 남은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금속같이 두꺼운 바람이 자꾸만 불어와 라이터 불을 반대쪽으로 실어 갔다.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몇 번이고 라이터 버튼을 연타해야 했다.

나는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추위도 바람도 모두 그 여자 탓인 것 같았다.

어렵사리 불을 붙인 나는 폐 속까지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으나,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마구 기침이 나왔다. 누군가 기도 속으로 불쑥 손가락을 넣은 것처럼. 정말 되는 게 없다 싶어서 나는 아예 담배를 갑과 함께 땅바닥에다 내던져버리고는, 개미를 짓밟는 것처럼 담뱃불의 목숨을 끊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잠시 핸들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그녀가 마지막에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머리를 떼고 핸드폰을 켰다. 그러고선 곧장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시체라고 말하던 그녀의 주장에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은 총 300명가량이었으나, 전화를 걸어볼 만한 사람으로 폭을 좁혀보니 고작 10명이 남았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는 오직 냉담하고 기계적인 연결음뿐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바쁜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명씩 전화를 받지 않을 때마다 나는 까닭 모를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명당 10번씩, 나는 앉은 자리에서 15분 동안 통화 연결음만 100번이나 듣게 되었다.

그동안 껌껌한 지하 주차장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