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육포: https://humoruniv.com/fear81735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 말수가 적으셨다.

잔소리도, 훈계도, 칭찬도 잘 안 하시는 분이었지만,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저녁이면 바닥에 등을 대는 생활이 몸에 밴 분이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애착을 보이던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바둑판이었다.




검은 상자안에 오래된 나무 바둑판을 방 안 한쪽에 소중히 모셔두었고,

가끔은 마루 끝에 앉아 혼자서 바둑알을 굴리셨다.




"할아버지 누구랑 두는 거예요?"

어릴 적 내가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짧게 대답하셨다.


"내 혼자 흑돌놓고 백돌 놓는다."


우리는 그걸 농담처럼 여겼다.

형은 “할아버지랑 바둑 두면 맨날 비기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바둑판이 이상하게도 자꾸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그 바둑판에 대해 유독 민감하셨다.

고모나 큰엄마, 숙모들 중 누군가가 청소중에 잠시 바닥을 닦는다고 바둑판이 든 상자를 조금 건드렸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온 집안이 뒤집혔다.



한번은 형이 나랑 알까기하겠다고 바둑판과 바둑알을 몰래 꺼내려다가,

그날 할아버지의 회초리 맛을 정통으로 본 이후, 우리 형제는 바둑판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기심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혹시 그 상자 안에 뭐 숨겨두신 거 아냐?”

“용돈 봉투 같은 거 있으면 어떡할래?”



그날따라 마침 집엔 어른들이 아무도 없었고, 할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형과 나는 결국 바둑판이 든 상자를 열어보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검은 상자 입구를 열고, 바둑판을 들어 상자 밖으로 꺼내려할 때—

먼지와 함께 희미한 누런 가루가 흘러나왔다.

곰팡이인지, 오래된 나무 냄새인지 모를 냄새가 코를 찔렀고,

상자안에는 비닐에 싸인 정체불명의 뭉치들과 편지 봉투 몇 개,

그리고 잔뜩 붙은 국제 우편 스티커가 있는 소포 영수증들이 들어 있었다.





"형... 이거 뭐야?"



우리는 조심스레 봉투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삐뚤하지만 정성스러운 필체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
“아버지, 여기 캐나다는 겨울이 길고 춥습니다.

막내는 유치원에 잘 다니고 있고, 아내는 피아노 교습소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아이들 재우고 나면 저도 혼자 바둑판을 펍니다.

제가 흑, 아버지가 백입니다. 먼저 한 수 두겠습니다. 정석으로 받아주세요.”





편지는 한두 통이 아니었다.

예전에 해외로 일하러 갔다던 삼촌이 보낸 것으로 보였고,

그 하나하나에 바둑 수가 적혀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등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야."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뒤돌아보니, 깜빡 잠드신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문턱에 기대서 계셨다.



"그거… 열지 말라캤제."


그 말에 형은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고,

나는 상자 뚜껑을 조심스레 덮었다.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우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바둑은 함부로 두는 기 아니다.

그건… 내 아들이랑 같이 두는 기다.”




우리는 그 말뜻을 곧 알게 되었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마루 끝에 앉아 바둑판을 펼쳤다.

편지를 꺼내 펼치고, 천천히 백돌하나를 들었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건너편을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정중하게 한 수를 두었다.




우리는 그 장면을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안방 문을 닫았다.



그날 이후,

우리 형제는 다시는 그 바둑판을 몰래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