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각성

어둠 속에서 의식이 깨어났다. 차갑고 축축한 곳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몸의 감각이 전혀 달랐다.

팔이 없었다. 다리도 없었다. 길고 부드러운 몸뚱이만 있을 뿐이었다. 촉감으로만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생각은 분명히 인간의 것이었다. 박민호. 30대 초반의 개발자. 서울의 작은 IT회사에서 일하던 평범한 회사원. 그런 기억들이 선명했다.

하지만 몸은 지렁이였다.

"꿈이겠지.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런데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흙의 차가운 감촉, 습기, 그리고 몸을 감싸는 압박감까지. 모든 것이 현실 같았다.

기어보려고 했다. 몸 전체를 수축시키고 이완시키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신기하게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부터 이렇게 움직여왔던 것처럼.

2. 트라우마

한참을 기어가다 갑자기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의 발굽이었다. 거대한 압력이 순식간에 자신을 짓눌렀다. 몸이 터지는 고통과 함께 의식이 사라졌다.

"아악!"

박민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원룸의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컴퓨터, 책상, 옷장...

"꿈이었구나..."

하지만 죽는 순간의 고통이 너무나 생생해서 한동안 잠들 수 없었다. 마치 실제로 경험한 것 같았다.

이상한 건 지렁이로 움직이는 법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꿈에서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다음 날 밤에도 같은 꿈을 꾸었다. 또 지렁이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흙 속을 기어가다가 새의 부리에 잡혔다. 하늘로 끌려 올라가는 동안 자신의 몸이 반으로 잘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새의 위장에서 소화되어 죽었다.

세 번째 밤에는 개미떼에게 둘러싸였다.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자신의 몸을 물어뜯었다. 살점이 한 조각씩 뜯겨나가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죽었다.

네 번째 밤에는 비가 온 후 아스팔트 위에 나와있다가 햇살에 말라비틀어져 죽었다. 몸의 수분이 증발하면서 서서히 딱딱해지는 고통이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물에 빠져 익사하거나, 농약에 중독되거나, 다른 벌레에게 잡아먹히거나.
매일 밤 다른 방식으로 죽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지렁이로서의 삶이 점점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이었다.

"왜 이런 꿈을 계속 꾸는 걸까?"

민호는 인터넷에서 꿈 해몽을 찾아봤다. 하지만 매일 지렁이가 되어 죽는 꿈에 대한 해석은 없었다.

회사 동료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민호씨, 얼굴이 너무 창백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아, 그냥 잠을 못 자서요."

하지만 단순히 잠을 못 자는 문제가 아니었다. 깨어있는 동안에도 지렁이였던 감각이 남아있었다. 걸어가다가도 발밑의 진동을 민감하게 느꼈고, 비가 오면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3. 기억의 파편

일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꿈에서 지렁이로 있을 때, 가끔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때리는 장면.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신. 그리고 흙이 자신을 덮어가는 감각.

"이상해... 이런 기억은 없는데."

민호는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봤다. 평범한 어린 시절, 대학 생활, 그리고 취업. 특별히 트라우마가 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어두운 기억들이 꿈에서 나타나는 걸까?

더 이상한 건 이런 기억들이 지렁이로 있을 때만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인간으로 깨어있을 때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4. 감각의 변화

2주차에 들어서자 민호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이 샐러드 왜 이렇게 맛없지?"

점심으로 시킨 샐러드를 보는 순간 구역질이 났다. 신선한 채소들이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대신 상한 음식이나 부패한 유기물 냄새가 나면 이상하게 식욕이 돌았다.

회사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분명히 박민호의 얼굴인데, 뭔가 어색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내 얼굴이... 맞나?"

손으로 만져봤다. 확실히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5. 기억의 충돌

한 달이 지나자 더욱 혼란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꿈에서 지렁이로 있다가 갑자기 다른 지렁이를 만났다. 그 지렁이가 말을 걸어왔다.

"넌 누구야? 왜 이상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

"뭐라고?"

"넌 원래 우리 중 하나였는데, 갑자기 이상한 것들을 기억하기 시작했어. 두 발로 걷는다거나, 무언가를 만든다거나..."

민호는 당황했다. 다른 지렁이도 자신을 지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아니야, 나는 인간이야. 박민호라고..."

"박민호? 그게 뭐야? 넌 그냥 지렁이야. 우리 모두처럼."

그 대화 이후 민호는 심각한 의심에 빠졌다. 정말 자신이 인간이 맞을까?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점점 어색해졌다.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관절 하나하나가 마치 처음 사용해보는 도구 같았다.

동료들과의 대화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들이 하는 말이 이해는 되지만, 뭔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치 다른 종족의 언어를 억지로 배운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정말 지렁이인 건 아닐까?"

하지만 거울을 보면 분명히 인간의 모습이었다. 회사 동료들도 자신을 인간으로 대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확신이 서지 않을까?
익숙하면서 낯선 기이한 일상 속에서, 그는 점점 무너져갔다.

6. 꿈속의 단서

어느 날 꿈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지렁이로 흙 속을 기어가다가 딱딱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자세히 보니 신분증 같았다. 하지만 너무 흙에 묻혀있어서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민호는 그것을 파내려고 했다. 지렁이의 몸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왠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조금씩 파내자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박... 민..."

심장이 뛰었다. 아니, 지렁이에게 심장이 있나?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두근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더 파냈다.

"박민호... 1992년생..."

자신의 신분증이었다. 그런데 왜 흙 속에?
그 순간 억압되었던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밤. 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골목길에서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누구세요?"

돌아보자 복면을 쓴 남자가 서있었다. 강도였다.

"돈 다 내놔!"

"여기... 여기 있어요."

지갑을 건네줬지만 남자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흉기를 꺼냈다.

"목격자는 남겨둘 수 없어."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7. 매장된 진실

민호는 더 깊이 파기 시작했다. 신분증 옆에서 더 많은 것들이 나왔다.

썩은 옷가지. 자신이 마지막으로 입었던 와이셔츠였다.
신발. 그날 신고 있던 구두였다.
그리고... 뼈.

"이게... 나야?"

인간의 두개골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다른 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자신은 3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이곳에 묻혔다.

그럼 지금까지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무엇이었나?

8. 소화된 의식

더 많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죽음 이후의 기억들이었다.

자신의 몸이 서서히 분해되는 과정. 흙속의 유기물이 되어가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지렁이들이 자신의 살점을 먹어가는 것.

하지만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뇌 조직을 특히 많이 섭취한 지렁이가 있었다. 그 지렁이가 바로... 지금의 자신이었다.

"나는... 박민호의 기억을 흡수한 지렁이구나."

뇌세포에 저장된 기억들이 지렁이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과 감정,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인간 박민호는 이미 죽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그의 기억을 가진 지렁이일 뿐이었다.

9. 환상의 붕괴

회사, 동료들, 친구들과의 대화, 그들과의 일상...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

박민호의 기억을 바탕으로 지렁이의 뇌가 만들어낸 허상들이었다. 실제로는 계속 흙 속에서 지렁이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인간이었던 기억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가짜였다. 죽은 박민호의 기억을 재조합해서 만들어낸 환상들이었다.

"동료들이 걱정해준 것도?"

가짜였다. 지렁이인 자신이 인간의 관계를 그리워하며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10. 두 번째 각성

모든 진실을 깨달은 순간, 이상하게도 평온함이 찾아왔다.

자신은 박민호가 아니었다. 박민호는 이미 죽었다. 자신은 그의 기억을 간직한 지렁이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특별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된 것이었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기억을 가진 지렁이. 두 종족의 경험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

"박민호의 기억 덕분에 나는 단순한 지렁이 이상이 되었어."

박민호가 경험했던 사랑, 우정, 꿈, 희망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지렁이로서의 단순하고 순수한 본능도 가지고 있었다.

11. 공존하는 기억

지렁이는 박민호의 해골 옆에서 조용히 웅크렸다.

"고마워, 박민호. 네 기억 덕분에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었어."

더 이상 인간이 되려 하지도, 인간이었던 기억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두 존재의 경험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끔 박민호였던 시절의 기억에 빠져들기도 했다. 첫사랑의 추억, 친구들과의 웃음,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들. 비록 다른 존재의 기억이지만, 이제는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지렁이로서의 삶도 소중히 여겼다. 흙 속의 평온함, 비 온 후의 시원함, 다른 지렁이들과의 단순한 교감.

12. 새로운 존재

흙 속 깊은 곳에서 지렁이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박민호도 아니고, 일반적인 지렁이도 아니었다. 둘의 경계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명이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하는 존재. 한 생명의 기억이 다른 생명을 통해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

지렁이는 흙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지렁이가 미소를 지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런 감정이 들었다.

박민호의 복잡한 인간성과 지렁이의 순수한 본능이 조화를 이루며, 그 어떤 존재도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1. 진짜 현실

"박민호씨, 오늘은 어떠세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침대 옆에 앉았다. 중년의 온화한 얼굴이었다.

민호는 흙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니, 고개를 든다는 표현이 맞나? 지렁이에게 고개라는 게 있나?

"저는... 지렁이예요."

의사 이정민이 한숨을 쉬었다. 차트에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진전 없음. 환자는 여전히 자신이 지렁이라고 주장함. 3년째 동일한 망상 지속."

창가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민호의 어머니였다.

"선생님... 우리 민호가...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어머님,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해볼 예정입니다."

하지만 의사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2. 현실의 진실

민호는 여전히 자신이 흙 속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울 소재 정신병원 403호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3년 전, 민호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분열을 일으켰다. 회사에서의 과로, 인간관계의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우울증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다 점점 현실감각을 잃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지렁이라고 믿게 되었다.

"내가 인간이었던 건 착각이야. 나는 원래 지렁이였어."

의료진은 이런 증상을 '종 정체성 장애'의 극단적 형태로 진단했다. 환자가 자신을 다른 생물종으로 인식하는 매우 드문 정신질환이었다.

3. 가족의 고통

병실 밖 복도에서 민호의 가족들이 모여있었다.

"3년이나 지났는데..."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우리 아들이 정말 돌아올 수 있을까?"

어머니는 계속 울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우울증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민호의 여동생이 입을 열었다. "오빠가 마지막으로 정상적인 대화를 한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안 나..."

"2년 전 추석 때였어." 어머니가 흐느끼며 답했다. "그때도 중간중간 이상한 소리를 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는데..."

4. 의료진의 소견

이정민 의사는 동료들과 민호의 상태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박민호 환자 말인데, 정말 특이한 케이스예요. 보통 정신분열 환자들은 자신을 신이나 유명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지렁이라고 주장하다니..."

"그것도 단순히 지렁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죽은 인간의 기억을 흡수한 지렁이라고 하죠. 너무 정교한 망상이에요."

"환자의 상상력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치료가 어려워요. 일반적인 현실 검증 치료로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가족들도 지쳐가고 있고... 안타까운 일이에요."

5. 민호의 인식

민호는 여전히 자신이 박민호의 기억을 가진 지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왜 나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거야?"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자신을 '박민호'라고 불렀지만, 박민호는 이미 죽었다. 자신은 그의 기억을 가진 지렁이일 뿐이었다.

"나는 지렁이예요. 흙 속에서 살아야 해요."

민호가 중얼거렸다. 간병인이 다가와 이불을 덮어주었다.

"민호씨, 여기는 병원이에요. 안전한 곳이니까 걱정 마세요."

하지만 민호에게는 모든 것이 착각으로 보였다. 병원도, 사람들도, 심지어 자신의 인간 몸까지도 모두 환상이었다.

6. 끝나지 않는 순환

밤이 되자 민호는 또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흙 속에서 기어가는 지렁이가 되어, 박민호의 해골 옆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실제로는 병실 침대에서 뒤척이며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간밤의 간병인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지렁이... 나는 지렁이야... 박민호는 죽었어..."

의사들은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민호의 망상은 너무 견고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서 완전히 살고 있었다.

7. 마지막 희망

6개월 후, 새로운 전문의가 민호를 담당하게 되었다.

"환자의 망상이 매우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군요. 이런 경우 망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는, 환자의 세계관을 인정하면서 점진적으로 현실로 유도하는 방법을 써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희망이었다. 하지만 민호의 가족들은 이미 많이 지쳐있었다.

"3년이나 기다렸는데..."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아들이 정말 돌아올 수 있을까요?"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병실에서 민호가 갑자기 활기를 보였다.

"비가 와! 지상으로 나가야 해!"

그는 자신이 비 온 후 지상으로 나오는 지렁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