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빛이 피어나는 숲속의 상처

달빛이 젖어드는 밤이면, 나는 어머니의 흰 머리카락 냄새를 맡는다. 그 향기는 산전수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흙벽에서 우러나오는 습기와 닮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버려진 고향집에 도착한 날, 문짝을 밀자 먼지가 마치 오래된 상처에서 터져 나온 고름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 돌아온 자리의 공허

### 흙벽에 스민 그림자

창가에 걸린 거울은 시간의 갈라진 틈을 비추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찻잔은 여전히 찬장에 놓여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는 벌써 몇 해 전에 증발한 듯 말라 있었다. 밤마다 벽 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은 할머니의 목소리인지, 내 머릿속을 맴도는 과거의 메아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네가 돌아왔을 때쯤이면, 이 집은 이미 그놈의 땅이 되어 있을 거다."

어머니의 유언처럼, 마당 한구석에 심어둔 회양목 뿌리 밑에서는 검은 액체가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빗물이 스민 줄 알았으나, 그 액체는 달빛을 받으면 은빛으로 변하며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 나무줄기에 새겨진 이름

### 뿌리 깊은 저주

옛날 이 마을에서는 매년 가을, 숲 속 신에게 처녀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발견한 낙서들은 그 의식의 잔혹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에 사람 이름을 새기면 그 영혼이 뿌리로 스며든다고 믿었어." 발목까지 차오른 검은 액체 속에서 나무뿌리 같은 것이 내 피부를 휘감는 걸 느꼈을 때,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할머니가 평생 마당을 가꾼 진짜 이유를

> "신의 목소리는 바람이 아니라
> 뼈 사이를 흐르는 모래소리야."

## 달빛 아래 피어나는 것

### 피어오르는 공포의 꽃

닷새째 되는 밤, 창밖에서 울려오는 발소리는 더 이상 도깨비불의 장난이 아니었다. 몸속을 타고 올라오는 가려움은 피부 밑에서 싹트는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어깨에는 회양목 잎사귀 모양의 반점이 피어나고 있었고, 손가락 끝에서는 흙냄새가 진동했다

첫 서리 내린 아침, 마당 한가운데서 발견한 것은 할머니가 묻었던 그릇이 아니라 인간 형상의 나무뿌리였다. 가지 끝에 매달린 열매들은 눈알처럼 동그랗게 떠서 나를 응시했고, 뿌리 사이로 걸려있는 백골은 익숙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 영원히 잠들지 않는 뿌리

### 합일의 순간

의식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이 집은 결코 유산이 아니라 문이었음을. 할머니가 평생을 바쳐 지키던 것은 우리 혈통의 저주가 아니라, 신과의 계약이었음을. 창밖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발걸음 소리는 조상들이 아니라 내가 부른 것이었다.

달빛이 가장 밝을 때, 나는 마당에 누워 흙을 머금었다. 척추에서 터져 나온 뿌리들이 대지를 뚫고 자라나 하늘을 향해 뻗는 순간, 수천 개의 목소리가 내 신경줄기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 소리는 공포가 아니라 영원한 잠에서 깨어난 고요함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어머니의 속삭임이 아니라, 내가 새긴 나무 이름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였다

> "이제 우리는
> 뿌리가 되어
> 별빛을 마시리."

창백한 달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 마당에는 새로 심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줄기에 새겨진 이름은 바람에 닿을 때마다 은빛으로 반짝였고, 땅속에서는 먼 옛날 바쳐진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모래알처럼 굴러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