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주민규는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주민규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미친 사람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겁니까?”

고석재였다.

“맞아요. 사실 그 분은 우리 병원에 자주 오시던 분이었어요.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아... 나를 구해주셨던... 안지수였던가...?’

주민규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근육통 심해지며 무의식적으로 신음소리를 내었다. 고석재가 신음소리를 듣고 말했다.

“민규씨? 민규씨? 정신이 듭니까?”

고석재가 주민규에게 다가갔다. 안지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만요. 지금 이 분, 민...규씨는 안정이 필요해요. 이름이 민규 맞지요? 민규씨가 아까 권순자씨에게 공격 받았어요. 지금 많이 놀란 상태일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그 쪽도 믿음이 가지 않아요. 가족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고석재는 한걸음 물러섰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자신과 주민규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었다. 단지 주민규가 주종호와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주민규가 이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민규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고석재는 품에서 틴 케이스를 꺼냈다.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틴 케이스를 안지수에게 건네며 말했다.

“하지만 관련이 없진 않습니다. 보험 조사 중에 주민규씨가 말려든 상황이라, 제게 과실이 없다고 할 순 없습니다. 개인적인 판단에 이곳이 위험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큰 상황에 말려들기 전에 주민규씨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했을 뿐입니다.”

안지수는 고석재가 건네는 사탕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곳이라는 것은 제가 일하고 있는 이 병원을 말하는 건가요?”

고석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는 틴케이스를 다시 품에 넣고는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나쁜 의도로 말씀드린 것은 아닌데...”

고석재는 열었던 입을 닫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복혼회라는 종교를 쫓고 있습니다. 보험 사기가 의심이 되는데, 혹시 병원 내에서 종교인의 모임이 있거나 한 적이 있었습니까?”

안지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규 쪽으로 더 바짝 붙어서 고석재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석재 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석재는 안지수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고석재 뒤로는 로비로 이어지는 복도가 있었는데, 복도 천장을 따라 검은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고석재는 자신이 피워두었던 불이 떠올랐다.

“설마 불이 번지고 있는 건가?”

고석재가 작가 혼잣말을 했지만 안지수는 그 말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불이라뇨? 설마 화재 경보가 울린 이유가 그 쪽 때문이란 말인가요?”

고석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고석재는 고개를 돌리고 주민규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불이 번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주민규씨를 업을 테니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시죠. 자세한 설명은 밖에서 해드리겠습니다.”

안지수는 다가오는 고석재를 밀쳐냈다. 안지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고석재가 뒤로 밀렸다. 고석재는 안지수가 생각보다 힘이 세어 놀랐다. 안지수가 낮은 톤으로 말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부축해서 데려가도록 할게요. 그쪽보다는 제가 더 전문가니까요.”

안지수는 주민규의 팔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

“힘드실 테지만 참으세요.”

그리고는 주민규의 겨드랑이에 자신의 어깨를 넣고는 그대로 부축하여 주민규를 일으켜 세웠다.

“끄으윽!”

주민규는 머리를 세우지 못하고 축 처진 채 벌어진 입으로 침을 흘렸다. 안지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침을 닦아 주었다.

고석재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 보다 등을 돌려 1층 로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내 다시 안지수와 주민규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로비 쪽은 이제 위험한 것 같습니다. 연기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출구는 없습니까?”

안지수는 말없이 복도의 갈림길의 한 쪽을 가리켰다. 고석재는 안지수 등 뒤로 보이는 응급 센터를 보며 말했다.

“혹시 저 쪽은...”

안지수는 발걸음을 옮기기며 말했다. 흥분한 듯 톤이 높았다.

“아까 미친년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고석재는 응급센터 쪽을 바라보다가 안지수의 뒤를 따라 갔다.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안지수와 주민규는 얼마 걷지 않아서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철문 앞에 섰다. 안지수가 고석재를 바라보고 있자 고석재는 앞으로 나서서 철문을 열었다. 쇳소리가 메아리치며 계단을 타고 울려 퍼졌다.

고석재가 안으로 들어가 철문을 붙잡으며 말했다.

“여기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출구는 어느 방향입니까?”

안지수가 철문을 지나며 말했다.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아래로 가면 지하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요. 거기를 통해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안지수는 고개를 돌려 고석재를 바라보았다. 고석재는 그녀의 눈에서 어딘가 서늘함을 느꼈다. 손끝이 저릿해지며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을 훑고 지나는 느낌이었다.

안지수가 말을 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병원장님이 오늘 이상하게 보이긴 했어요. 찾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불이 번지기 전에 2층 원장실에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원하시는 것을 찾을 지도 모를 텐데...”

그리고는 안지수는 주민규를 부축한 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석재는 안지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꺼림칙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이 시점에 굳이 알려주는 이유가 뭘까. 병원 내에 어떤 알력싸움이라도 있는 건가.’

고석재는 주민규를 보았다. 고통 때문인지 부축을 받은 상태에서도 덜덜 떠는 것이 보였다.

‘내가 옆에 있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안 되겠지. 먼저 조사를 하자. 지금 같은 기회가 다시없을 것 같으니...’

고석재는 발걸음을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옮겼다. 최대한 빨리 살펴보고 돌아오리라.

“끄으윽...”

주민규는 자신의 등 뒤로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어째서인지 근육통은 점점 심해져가고 몸이 마비되어가는 느낌이 강해지고 있었다. 말소리조차 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자신이 본 것을 고석재에게 전달을 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저씨! 목덜미를, 이 간호사의 목덜미에 문신을 보시라고요! 아저씨가 말한 그 문양이 있다고요!’

주민규의 생각과는 다르게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소리 말고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지수는 그런 주민규를 흘깃 보고서는 번지는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

안지수가 주민규를 병상 위에 눕히며 말했다. 방 안은 어두웠다. 아주 약한 녹색 빛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지수는 이런 방을 익숙하게 돌아다녔다.

주민규는 몸을 움직이지 못 했다. 부릅뜬 눈으로 안지수를 쫓을 뿐이었다.

안지수는 수납장 안에서 가위를 하나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가위를 들어 올렸다. 주민규는 가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진이라니, 이 한국에서 말이야.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 믿음이 없었더라면, 나는 개미처럼 허둥대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발을 동동 굴렀을지도 몰라.”

안지수는 가위를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내려 주민규를 보았다. 그림자가 내려 앉아있음에도 어둠 속에서 안광이 일렁였다. 안지수가 가위를 든 손을 주민규 쪽으로 내렸다.

“끄으윽!”

주민규는 안지수의 눈과 가위를 빠르게 번갈아 보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신음만 나올 뿐이었다.

안지수는 가위를 내려놓고 병상에 놓여있던 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주민규의 입가로 흐르는 침을 닦아주었다.

“어머, 침 때문에 숨이 막히면 곤란해. 안 그래도 근육이 말을 안 들을 텐데, 숨 쉬기가 조금 어렵지? 조금만 참아.”

안지수는 다시 가위를 들고 주민규의 옷 자르기 시작했다. 주민규의 몸에 가위가 닿을 때마다 경련을 일으켰다. 예민해진 감각 탓에 차갑다 못 해 고통스러웠다. 천을 가르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가 되는 것처럼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안지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계시라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 내 신앙심이 부족한 탓에 너무 늦게 깨달은 거야. 때가 되었던 거지. 이 세계에 끝날 때 말이야.”

안지수는 주민규의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귀면석이었다.

“이건가보네. 병원장이 그렇게 찾던 것이. 이런 물질적인 것이 영적이고 고차원적인 것보다 더 값지다는 것이 말이 될까? 어때?”

안지수가 귀면석을 주민규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주민규는 눈알을 굴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병원장은 위대한 분의 말씀을 이 돌덩어리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 돌은 그저 상징일 뿐인 걸 인정하지 못 했어. 더 높은 곳으로 다다르라는 말씀은 이 돌이 아니더라도 실천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야.”

안지수는 귀면석을 상의 주머니 넣었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서 작은 튜브 하나를 꺼냈다. 하얀 색의 액상 약이었다. 안지수는 병상에 놓여있던 주사기를 들어 올려 튜브 안에 꼽아 넣었다.

“그래도 필요한 약품을 만드는 능력은 탁월했었어. 그건 인정해야지. 덕분에 네가 우리의 살아있는 첫 공양물이 될 수 있었으니까.”

안지수는 주사기를 주민규의 팔에 꼽았다.

“한 번 맞아 봤으니까, 느낌 알거야. 네 감상을 듣고 싶지만, 약효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 걸?”

안지수는 싱긋 웃고는 병상에 메어있던 벨트로 주민규의 팔다리를 묶기 시작했다. 주민규는 다시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대로 의식을 잃는다면 그 끝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언제까지 의식이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주민규는 어떻게 해서든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제 가자. 네 친구 만나러.”

안지수는 병상을 밀어 방을 나섰다. 지하층은 벽을 따라 붉은 글귀로 가득했다. 바닥에는 곳곳에 양초와 검붉은 액체 웅덩이가 있었고 한쪽에는 검은 비닐 백들이 일정한 모양으로 배열되어있었다.

안지수는 그것들을 피해 지나가며 출입을 금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길로 들어갔다. 그 길 끝에는 횃불에 일렁이는 빛이 보였고 여러 사람들이 낮게 무어라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민규는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익숙한 소리였던 탓이다. 바로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들었던, 작은 아버지가 읊조린 바로 그 소리였다.

안지수가 눈을 점점 크게 뜨며 읊조리는 소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민규는 몸을 비틀고자 했다. 경련만 일으킬 뿐 움직이지 못 했다. 병상은 지옥의 아가리를 향해 밀려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