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주민규는 회색빛 황무지에 서있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눈을 도려낼 기세로 불어 눈을 뜰 수 없었고, 광풍이 일으키는 굉음에 귀가 멀어버릴 것 같았다.
고통을 피해 실눈을 뜨자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수십 개는 되는 것 같았고, 자신을 향해 뭉개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주민규는 움직이려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석상이 된 것 같았다. 멀리서 누군가의 비웃음이 실려 왔다. 웃음소리는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짐승이 울부짖듯 것 같았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김찬의 목소리였다.
“내...내가...내 손으로...”
죄책감이 뒤따라왔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몸과 마찬가지로 입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 소리과 비명 소리가 화음을 이루듯 기괴한 높낮이를 내며 규칙적으로 반복 되었다. 누군가가 마귀를 찬양한다면 이런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소리는 그림자 속에서 실체 갖추는 듯 했다.
그림자가 어느새 주민규 코앞까지 다가왔다. 흐릿한 경계가 형태를 갖추더니 작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했다. 형상은 입을 벌려 무어라 말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함.께.하.라.’
작은 아버지는 입고 있던 상의를 들어올렸다. 검은 구멍. 그 안에 김찬의 얼굴이 뭉개진 채 있었다. 핏발이 선 눈은 주민규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민규는 감았던 눈을 떴다.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얀 바탕 위로 울긋불긋한 빛이 점멸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비상벨이 울리는 것도 들렸다. 몸은 어째서인지 움직여지질 않았다. 두통이 몰려왔다.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유리가루를 흩뿌려놓은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꿈...”
안도감이 몸을 돌았다. 이내 자신이 저지른 일이 떠올라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쉽게 차리기 어려웠다. 몸은 뜻대로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눈을 몇 번 더 깜빡이자 시야가 더 선명해졌다. 하얀 천장이 보였고 가림막이 둘러쳐져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빈 행거가 보였다. 병원인 것 같았다. 비상벨 소리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뭐지...화잰가?’
-덜컥
옆자리였다.
‘사람이 있었네.’
주민규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병상에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다. 커튼 위로 붉은 조명이 깜빡였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상황 파악을 해야 해.’
주민규는 몸을 일으켜보려 했다. 어째서인지 몸은 마비가 된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두통이 심해지면서 사물들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또각또각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 다른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는 잠깐 환해질 때마다 점점 주민규 쪽으로 다가 왔다.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 또한 점점 또렷해졌다. 발걸음은 무척 규칙적이었다. 반대로 말소리는 무어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기분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처럼 고저마저 들쑥날쑥했다. 소름끼쳤다.
‘눈을 감아? 눈을 떴는데 사라지면?’
그림자는 주민규를 지나쳤다. 계속 이동하더니 옆자리 앞에서 멈췄다.
-차르륵
커튼을 여는 소리가 났다. 커튼이 어둠이 잠길 때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쇠가 갈리는 소리. 그림자는 팔을 높이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커튼이 흔들리며 붉은 액체가 튀었다.
‘피...!’
비릿한 피 냄새가 금세 퍼졌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옆자리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희생자의 절박한 손짓이 커튼 위로 맺혔다. 그림자는 팔을 더 올리지 않았다.
-또각또각
그림자는 주민규 앞으로 이동을 했다. 왔을 때처럼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소리를 내면서. 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커튼 위로 더 이상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발걸음 소리는 작게 들려왔다. 이 병실 어딘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주민규는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식은땀이 멈추질 않았다.
‘시발...PC방 칼부림 사건...’
이곳을 벗어나야했다.
주민규는 발끝과 손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점점 움직임을 크게 했다. 긴장감에 숨마저 멎는 듯했다. 이 행동이 효과가 있는지 마비가 점점 풀려갔다.
‘젠장, 얼마나 누워있던거지?’
온몸이 저릿저릿하며 근육통이 몰려왔다. 혹시나 살인마가 들을까 숨소리도 제대로 내질 못 했다.
‘혹시 가윈가? 아님 아직도 꿈?’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근육통과 분명히 다른 통증이 느껴졌다. 꿈은 아니었다.
주민규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불이 내려갔다. 이불은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옷 위에 아직 친구의 피가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친구의 초점 잃은 눈빛이 다시 보이는 듯 했다.
‘...미안하다.’
주먹을 꽉 쥐며 애써 그 기억을 지웠다. 그것은 정당방위였다. 본 적도 없는 그런 모습에 겁먹지 않을 사람이 있을 것인가. 머리가 아파왔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했다. 주민규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주민규는 온몸을 타고 도는 근육통을 참아내며 조심스럽게 병상 아래로 내려왔다. 비상벨 소리가 너무 큰 탓에 발걸음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시발, 미친 살인마가 어딨는지 감이 안 오네.’
주민규는 바닥에 엎드려 주위를 살폈다. 혹시 살인마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병실은 꽤 넓어 보였다. 비상등이 계속 깜빡이고 있어서 병실 전체를 확인하긴 어려웠다. 병상이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빛이 닿는 곳에는 누군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 저거 출입군가?’
EXIT라고 쓰인 초록색 비상등이 보였다. 대략 병상 3개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저 정도면 전력질주로 금방 도달할 것 같은데...’
주민규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들어올렸다. 피가 닿았다. 따뜻했다. 따뜻함에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주민규는 눈앞에 있는 병상에서 최대한 눈을 두지 않았다. 곁눈질로 보이는 사람의 형상 위로 붉은 피들이 보였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날카롭게 베인 상처들은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심호흡을 하고, 셋 하면 뛰는 거다. 둘...셋!’
주민규는 출구를 향해 달렸다. 온몸이 근육이 고통을 호소했다. 저릿한 긴장감에 금세 잊혀졌다. 병실 한 쪽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주민규가 더 빨랐다.
“됐다!”
주민규는 순식간에 출입구에 다다르며 몸으로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텅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몸이 바스라질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튕겨나듯 뒤로 넘어졌다. 누군가 문을 잠근 것 같았다.
“아으...씨발...왜 문이 잠겨있어?”
주민규는 자신의 경솔함에 화가 났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시 근육통이 도지고 심지어 어지럼증까지 왔다. 멀리서 40대 정도 여자가 보였다. 한손에 매스를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여자는 소리 없이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웃고 있었다. 옷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어 결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또각또각
주민규는 숨이 막혀 왔다. 사방을 빠르게 살폈다.
‘다른 출구가 없나?’
주민규의 시선이 여자 뒤쪽에 있는 출입구에서 멈췄다. 그곳도 잠겨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유일한 탈출구였다.
‘씨양, 몸만 좀 정상이었으면, 문제도 아닌데’
지금은 호흡을 고르는 것도 버겁고 초점마저 맞추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본능적으로 여자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여자의 입 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 한번 덤벼봐! 어?”
주민규는 여자를 주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두통이 올라왔다. 몸이 휘청 이며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여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딱딱딱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여자는 눈을 한껏 치켜뜨고선 주민규에게 달려들었다. 붉은 경광등이 눈에 반사되어 마치 안광을 뿜어대는 것 같았다.
“으아앗!”
주민규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여자의 허리춤으로 몸을 던졌다. 여자는 주민규에게 들이 받혔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메스도 떨어트렸다. 여자는 칼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주민규를 미친 듯이 할퀴고 때렸다. 보통 여자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힘이 셌다.
“으아아, 씨발, 미친년아!”
주민규는 머리가 최대한 다치지 않게 여자 쪽으로 머리를 바짝 붙이며 그대로 밀었다.
-퍽
여자는 중심을 못 잡고서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여자는 넘어지며 큰 충격을 받았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허억, 허억”
주민규는 몸을 일으켰다. 옷은 찢어졌고, 팔이며 등허리에 상처가 났다. 할퀴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붉은 부어오른 곳도 있었다. 고통에 신음할 시간이 없었다. 몸을 움직여서 이 여자한테서 멀어져야했다.
“허억, 허억, 출입구...”
주민규는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끼아악!”
“뭐...뭐야?”
주민규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깨어나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마구 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뜨렸던 칼을 집어 올리고 핏발이 선 눈으로 주민규를 노려보았다.
“너어어!”
여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칼을 높이 치켜 올리고선 주민규에게 달려들었다.
“개같은!”
주민규는 피하고 싶었지만 몸이 물속에 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느리게 움직였다.
“으아악!”
주민규는 몸을 움츠렸다.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달려드는 여자에게 누군가 커튼을 던졌다. 여자는 갑자기 날아든 커튼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커튼을 뒤집어썼다. 여자는 균형을 잃으며 빈 병상 쪽으로 넘어졌다.
-콰장창
병상과 전자 기기들이 여자 위로 쓰러지면서 여자가 괴성을 질러댔다.
주민규는 누군가 자신을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주민규가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병상 사이에 단발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있었다.
“쉿!”
여자가 입술 위로 검지를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오른쪽 가슴 위에 ‘간호사 안지수’라고 적힌 이름표가 보였다. 안지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 내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빨리.”
주민규는 몸을 움직여 보지만 동작이 굼떴다. 안지수는 주민규의 팔을 잡고 잡아 당겼다.
‘뭐...뭔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
안지수는 주민규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병실 출구로 나갔다. 미친 여자가 괴성을 지르며 커튼을 치우려 했지만 발버둥 칠수록 몸에 엉기는 탓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안지수는 조용히 병실 문을 닫고는 등을 댔다. 병실 안쪽에서 미친 여자의 괴성이 들리더니 점점 멀어졌다. 안지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병실 안을 살폈다. 병실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감사합니...”
주민규는 더 말을 잇지 못 하고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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