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을 쫓아내는 법 - 3. 자살의 수혜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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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을 쫓아내는 법 - 3. 자살의 수혜 구조 [2]

작성자

을구릉

쪽지 | 작성자 글보기

번호 83531 추천 15 답글 2 조회 81,600 작성시간 2024-11-12 02: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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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살의 수혜 구조

극단주의와 이별,
두 조합이 써 내려간 단막극이 내 집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방송에 내보내면 모자이크된 얼굴 하단으로 '극단주의자, 50년 만에 차인 남자 （130세）' 라는 설명이 덧붙겠지.

살이 불타오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집 나간 연인을 찾아다니던 130년 된 뱀파이어가 메시지 한 줄에 무너져 내렸다. 이런 결과를 바라고 지우한테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닌데. 곤란하게 됐다.

굳이 죽고 싶단 말을 내뱉진 않았어도 온몸으로 농성 중이라서 그가 얼마나 좌절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그래서 이틀이 넘도록 그를 내쫓지 못했다. 출근했다 돌아오면 알아서 나가지 않을까, 조금 기대하기도 했고.

나는 이틀째 방에 처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김 부장은 시답잖은 일로 태클을 걸었고 박 과장은 옆에서 못된 시누이처럼 몇 마디 거들며 속을 뒤집어 놓았다. 원래대로라면 퇴근해서 맥주 한 캔을 따고 드라마를 보고 있었을 시간이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거예요?"

이불로 만들어진 무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기 이러고 있는다고 지우가 나타날 것도 아니고. 솔직히 좀 민폐거든요..."
"...... '

"이제 결정해야죠. 앞으로 어떻게 할 지. 다 잊고 새출발할 건지, 지우를 계속 찾을 건지, 아니면...."

정말 죽을 작정이에요?
130년이나 살았다면서 고작 이런 걸로?

하지만 고작이라고 하기엔 함께 한 시간이 까마득하게 길었고 인외종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그에게 지우는 단순한 연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터였다.

차마 말을 뱉지 못하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내가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도 방 안은 고요했다.

방에 저러고 있는데 저녁을 챙겨 먹을 기분이 나질 않아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우리 집 냉장고 사정이야 뻔했다.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와 계란 몇 알, 언제 주문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배달 음식이 고작이다. 나는 남은 우유를 입안에 몽땅 털어 넣었다.

집에는 마땅히 먹을 게 없고, 남자가 나갔다 온 흔적은 없었으니 이틀 넘도록 저렇게 방에만 있었다는 거겠지. 물도 안 마시고.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3일이면 탈수에 빠진다. 아니, 뱀파이어라서 해당이 안 되나.

학창 시절 식당에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지우를 떠올렸다. 그녀를 질투하던 애들은 서민 음식은 입에 안 맞나보지, 하고 비아냥거렸고 그녀를 동경하던 애들은 진짜 독하게 관리한다며 은근한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지우는 그저 알레르기가 심하다고 했고 같은 이유를 대면서 체육 시간에는 교실에 머물렀다.

음식을 안 먹으면 뱀파이어는 뭘 먹지?

꿀꺽.

나는 입안에 남은 우유를 끌어모아 꿀꺽 삼켰다. 혀끝에서 비릿한 피 맛이 퍼져나가는 착각이 일었다.

남자는 다음날 퇴근 후에도 어제와 똑같은 모양 그대로 누워있었다.

"얘기 좀 해요. 살아...있긴 하죠? 여기서 죽으면 안 돼요. 여기 제 집도 아니고 그쪽 잘못되기라도 하면 구급차에 경찰에... 복잡해지거든요. 집값 떨어진다고 얼마나 난리를 칠지. 아, 너무 현실적인 얘기인가. 미안해요, 인간들 사는 게 그래요. "

"......"

"궁금한게 있는데 그거나 대답해 줄래요?"

그의 흥미를 조금이라도 끌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지우는 왜 고등학교 같은 걸 다닌 거죠? 저번에 보니까 햇빛이 조금만 닿아도 큰일 나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지우는 낮에도 괜찮았던 것 같네요?"

".... 더 오래 살았으니까."

"네?"

"지우가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으니까. 나는 힘이 없어서 햇빛에 약해."

어느새 남자가 이불을 걷고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흥미를 끌겠다는 작전이 성공한 모양이다.

며칠째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얼굴이 어째 피부관리 풀코스로 받고 나온 사람처럼 반짝반짝하다. 이런 게 후광이라는 건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과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가 지우와 닮았다.

"지우는 늘 신경 써."

알고 보니 연하남이었던 130살 뱀파이어가 이불을 걷고 완전히 일어나 앉았다.
알면 알수록 현기증이 일었다.
지우야, 대체 몇 살인 거니. '할머니'라고 부르기에도 죄송스러운 살아있는 화석이었던 거니.

"유행에 뒤처지는 걸 싫어한단 말야. 요즘 애들이 얼마나 빠른지 알아? 너만 해도 지금 고등학생들이랑 대화가 안 통할 걸. 주기적으로 세상과 소통해야 된다는 게 지우의 신념이었어."

죽음과도 같은 잠에서 깨어난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하여간, 지우 얘기만 나왔다 하면.
지우에게선 더 이상 연락도 없었고 나를 차단한 건지 메시지를 보내도 읽지 않았다. 연락이 뜸한 동창들한테까지 그녀의 연락처나 근황을 수소문했지만 얻은 소득이 없어서 이 불청객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막막했다.

시체처럼 꼼짝하지 않고 누워서 눈물만 줄줄 흘리기에 위험하지 않은 것 같아 일단 내버려두긴 했지만.

어쨌거나 남자가 일어나서 다행이었다.

"이제 좀 진정됐어요? 계속 우는 것 같더니."

"응. 내내 울었더니 배고파."

간식을 원하는 고양이처럼 애교 섞인 표정이다. 이불 밖으로 걸어 나온 남자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댄 건 순식간이었다.
체온이 낮아, 닿은 부분에선 어떠한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만 줄래?"

예리한 송곳니가 따끔한 통증을 만들어내자 잠자고 있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내 목덜미에 송곳니를 살짝 박아 넣고 동의를 구하듯 잠깐 뜸을 들인 뒤 조심스레 입술을 파묻었다. 나는 망설이면서도 그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그는 뱀파이어니까.
그를 방에다 두고 나서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몇 모금의 피를 훔치듯 가져간 남자가 떨어져 나가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조금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 어느 시대에도 호불호가 없을 아름다운 얼굴. 불과 몇 초 전 송곳니를 목에 박아 넣고 흡혈을 한 존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 지우는 이 남자와 이렇게 지냈던 건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이제 다른 사람을, 인간을 만나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조금 이해됐다. 비현실적이야, 이런 건. 너무 비현실적이라 살아있는 느낌이 안들만큼.

안이하고 어리석은 나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목을 내어줬다.

빨리 기운 차려서 떠나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이불 속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그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좋아서였다. 남녀 간의 호감이 아닌 그것을 뛰어넘는 기묘한 감정이었다. 아름다운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그런 본능처럼. 게다가 정말 목만 축일 정도만 흡혈했으니까. 위험 신호가 느껴졌다면 당장 쫓아냈을 거다.

딱히 어지럽거나 아프지도 않았고 물린 자리도 벌레에게 물린 정도였으니 뭐, 이 정도면 괜찮겠지, 했다.

어리석게도.

그렇게 며칠, 가랑비에 젖어 들 듯 남자에게서 내 몸 안으로 무엇인가가 조금씩 퍼져 들었다.

점차 그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고 그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고 싶어졌다. 요구받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나 혼자 해주고 싶었다. 마치 열렬한 팬이 된 것 같은 마음으로.

이 변화는 자연스럽게 조금씩 몸을 침식해 갔다. 아, 뭔가 잘못됐구나.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오늘에 이어 내일까지 병가를 쓴 나를 발견하고 두 손 들고 말았다. 병가를 쓴 이유는 고작 남자와 떨어지기 싫어서였다. 한창 바쁜 시기에 목, 금 병가를 내고 4일을 연이어 쉬는 기특한 부하 직원을 칭찬하는 문자가 쏟아졌다. 보나 마나 박 과장이겠지.

"그래서 무슨 속셈이에요. 저를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을 것 아녜요."

"하수인이라니, 하하하.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 아냐?"

웃으니까 심각하게 잘 생기셨네요. 조각해서 가보로 물려주고 싶을 만큼.
나도 모르게 헤벌쭉 그를 따라 웃으려다가 떠올린 생각에 스스로 놀라 얼굴을 굳혔다.

"그럴 작정이었다면 2리터 정도는 쪽쪽 빨아 마셨겠지. 숨만 붙어있을 때까지."

"그럼 뭔데요."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야. 우리가 피를 취하면 인간은 피를 가져간 만큼 마음을 내어주지."

혼란스러워하는 날 보며 그가 살짝 웃었다.

"내일도 쉬기로 한 거지?"

저럴 때면 미칠 광이 아니라 빛 광자를 쓰는 광인이다. 그저 빛. 그에게 굴복하고 만 스스로가 치욕스럽다.

"그럼 바람 좀 쐬러 갈까?"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의지가 곧 내 의지이니. 정말 하수인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를 따라 외투를 꺼내 입었다.

밤의 산은 어둡고 적막했다. 시야가 차단되어 소리에 온 신경이 쏠렸다.
남자의 걸음은 거침없었고 돌멩이나 나뭇가지가 튀어나온 곳에서는 멈춰서서 나를 부축해 주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나는 봉사처럼 헤매며 더듬더듬 그를 따라갔다. 그 걸음이 등산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라서 이 겁 없는 산행이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등산로에서 벗어난 지 한참, 나 혼자선 돌아온 길을 되짚어 가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자 비로소 그가 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얼굴이 유달리 하얬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내가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조금 무서웠다. 생매장당하는거 아니야? 요 며칠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가 외투 주머니에서 로프와 칼을 꺼내어 내밀었다.
저런 걸 언제 챙긴 거지.

극단주의자와 이별.
뉴스에서 수차례 접한 칼부림 사건이 머리를 스쳤다.

도망쳐야 하는데, 도망칠 수 있을까?

지척까지 걸어온 그가 내 손을 잡더니 가만히 칼자루를 쥐여 주었다.
선물 받고 한번도 쓰지 않은 우리집 식칼이다. 언제 갈았는지 칼날이 예리해 손만 대도 베일 것 같았다.

"목을 자르면 누구나 죽어. 죽지 못하더라도 죽은 거나 다름없겠지."

그는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아름다운 얼굴이 목에서 분리되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상상이 일었다. 떨어져 나간 머리는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고 몸은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머리를 찾아 헤맸다. B급 슬래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피는 지나치게 많았고 동작은 로봇처럼 기괴했다.

".....설마, 제가 자르는 쪽인가요? 저보고 하라고요?"

"혼자서는 자르는 것까지는 못 하겠더라고."

"못해요. 다른 사람 알아봐요. 제가 어떻게."

"내가 그동안 모은 돈이 꽤 돼. 너한테 다 줄게. 네 집에 있는 동안 다 들었어. 회사 생활도 힘들고 이사 다니는 것도 힘들다고 했지. 날 조금만 도와주면 이제 고생 끝이야. 시체 처리는 걱정 안 해도 돼. 아침까지 내버려두면 알아서 다 탈 거야."

"그냥 묶어놓고 가면 안 돼요? 아침 되면 어차피..."

"죽을 정도로 타지는 않더라고."

90억 정도 돼, 조금만 도와주면 다 네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가 얼마나 감미롭던지.
그동안 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까지 퍼져나간 세뇌가 이 순간에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래. 순순히 도와줄 거라곤 생각 안 했어."

그가 로프를 풀어 왼쪽 손바닥에 둘둘 감더니 오른쪽 손바닥에도 둘둘 감았다.
잠깐, 저 모양 영화에서 많이 봤는데. 뒤에서 급습해서 목을 조를 때나 쓰던 그 모양이었다.

"고민할 시간 60초 줄게. 1분 뒤엔 둘 중의 하나는 죽는 거야."

내 목을 따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니.

이젠 장르가 바뀌어 세상에 이런 일이가 아니라 그것이 알고 싶다에 제보해야 한다.

나는 그가 첫 등장부터 범상찮은 미친놈이었다는 걸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커튼을 잡고 활활 타오를 때도,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지금처럼.

"....40....41........50...."

팔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 떨렸다.
58, 59... 천천히 숫자를 읊던 그가 빙긋 웃었다.

"60."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 죽을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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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마당 (2)

슬픈냥

와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