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그 때의 여름은 지금처럼 숨이 턱 막히지 않았다.
물감을 덧칠한 듯한 파란색의 하늘과 이따금씩 불어오는 기분좋은 바람.
그 때의 여름은 지금과는 달리 청량함과 활기를 띄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여름은 조금 달랐다.

우리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서 수퍼를 운영하고 있었다.
휴가철이 되면 붐비는 피서객들로 인해 부모님은 여름만 되면 눈코뜰새없이 바빴고
나는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집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초등학생 애 혼자서 텅 빈 집을 지킨다니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그 때는 그런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집에 들어온 나를 맞이하는건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닌 종이쪼가리에 적어놓은 글귀 몇 자 였다.
'문단속 잘하고 간식은 꼭 손 깨끗이 닦은 후에 먹어라. 너무 더우면 창문 닫고 에어컨 들고 있으렴.'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대부분의 집이 에어컨 대신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 바람으로 더위를 피하던 시절,
우리집은 다른 집에 비해 에어컨 사용에 관대했다.
그래서일까 텅 빈 집에 혼자 있다는 무서움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켠 후 엄마가 준비해둔 간식을 먹기 바빴다.
당연히 손은 씻지 않았다.

그래도 부모님은 하나뿐인 딸을 혼자 집에 두는게 걱정이었는지
에어컨 뿐만 아니라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것에도 관대하셨다.
다만 부모님이 몰랐던건 그 즈음 내 또래 애들은 학교가 끝나면 대부분 학원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것은 나와 민지 뿐이었다.
민지와 엄청 친한건 아니었지만
나는 항상 학교가 끝나면 민지에게
'우리 집에 아무도 없는데 우리 집에 가서 놀래?' 라고 물어봤고
민지는 '오늘도 가도 돼?' 라고 되물었다.
친구를 집에 데려온다고 하면 간식을 더 많이 준비해뒀기 때문에
내 대답은 언제나 '당연하지!' 였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은 여름 날이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민지와 같이 우리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제나처럼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켰다.
딱 하나 다른 점은 간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었다는 것이다.
TV를 보며 간식을 먹다보니 어느새 민지가 집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
간식이 너무 많았는지 절반이나 남았고
이미 배가 불렀던 나는 민지에게 남은 간식을 전부 주었다.
민지는 하얀 이를 드러낸 웃는 얼굴로 고맙다며 간식을 건내 받았다.
민지를 보내자마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물건이 들어와서 엄마랑 아빠는 조금 늦을것 같다고.
이럴줄 알았으면 간식을 조금 남겨둘걸 하고 생각했다.

민지가 떠나서 였는지 여름의 끝자락이 다 되어서 였는지
에어컨 바람이 춥게 느껴져서 에어컨을 끄러 거실로 나갔다.
에어컨을 끄고 다시 방에 들어가려고 뒤를 돌았을때 창 밖으로 무언가 보였다.
언제나 보던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분 나쁜 검은 형체가.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도 기억나는 건 검은 형체 뿐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사람이었다.
그 검은 형체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아니 가만히 서있지 않았다.
흰 종이에 물감을 쏟은 것 같은 검은 얼굴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남자아이가 줄지어 구멍으로 들어가는 개미떼를 보는 것처럼
창 밖에서 우두커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면 그것도 같이 움직일 것만 같았다.
내가 입을 떼면 그것도 같이 입을 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 시선에 묶인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여름보다 더 불쾌하고 끈적한 느낌이 나를 덮쳐왔다.
얼굴에서부터 흘러내린 물방울이 내 목을 타고 흘러 내렸지만 전혀 덥지 않았다.
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참고 참다 흘러내린 내 눈물이었다.
내가 울고 있다는걸 자각한 순간, 참았던 눈물과 함께 참고 있던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앞으론 에어컨도 조금만 틀게요
간식 먹기 전에 손도 잘 씻을게요
제발요
간식도 다 먹어서 없어요
남은 간식은 방금 민지가 들고 나갔어요
살려주세요

그렇게 비명 섞인 목소리로 절규를 마치고 나서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아까와 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다, 같지 않다.
웃고 있다.
입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했다.
검은 형체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내 눈 앞에 보인건 거실 천장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창 밖을 봤지만 보이는건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아빠가 들어오는소리가 들렸다.
'아유, 집이 왜 이리 더워. 에어컨 안키고 있었어?'
난 전혀 덥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 갈때까지 부모님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서웠다.
말을 하는 순간 다시 그 때로 돌아갈 것 같아서.
그래도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떠들다보니 무서움도 옅어졌다.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에게 맞장구를 치면서 나는 생각했다.
'민지를 보면 어제 있던 일을 얘기해줘야지, 분명 민지도 무서워서 놀랄거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제 민지가 실종됐다고.

민지의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을 수 있었다.
어른들은 쉬쉬했지만 그 시절의 입단속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민지는 근처 폐건물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손과 발은 묶여있고 입은 막혀있는 채로.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의 기억 속에서 민지는 잊혀져갔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민지는, 그 검은 형체는 내 눈꺼풀에 박혀 언제나 내 눈 앞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부모님은 수퍼를 접고 먼 도시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이사 간 우리집 창 밖으로는 콘크리트 건물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검은 형체도 서서히 옅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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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유독 덥고 습했다.
'폭염주의보, 열대야주의' 등의 문구가 적힌 재난문자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스마트폰을 울려댔다.
앞으로의 여름은 더 더워질거라는데
이러다가 인류가 멸종하는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문 앞에 서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편지봉투가 스카치 테이프로 붙어있었다.
보나마나 또 아랫집에서 붙인 것이리라.
내용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늦게 들어오시면 발소리 좀 죽여서 다녀달라'
'우리 애가 예민해서 밤마다 깬다'
요즘 부모들은 왜 이렇게 자기 애를 과보호 하는지.
이럴땐 차라리 시골이지만 주택이라서 맘껏 자유로웠던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도 부모가 좀 된 분들인지 직접 찾아와서 난리피우지 않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런데 항상 포스트잇을 붙여놓지 않았던가?
편지봉투는 처음보는데...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서 열어본 봉투 안에는 사진이 한 장 들어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다.
사진에는 한 여자아이가 손발이 묶인 채로 있었다.
아이의 입은 비닐봉지를 구긴 것으로 막혀 있었는데, 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릴 때 간식으로 즐겨먹던 과자봉지였다.
항상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짓던 내 친구는
사진 속에서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비로소 나는 돌아왔다.
지금의 여름보다 훨씬 불쾌하고 끈적했던 그 날의 여름으로.
그리고 뒤돌아본 그 곳엔 그 때와 같이 검은 형체가 나를 보며 서있었다.
아니, 그 때와 다르다.
지금 검은 형체는 창 밖이 아닌 내 두 눈앞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