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근에 같이 놀 동무가 없어 그저 들풀이나 꺾으며 놀 요량으로 숲으로 간 소년은

정말이지 우연히 겁에 질린 작은 짐승을 발견하였다.

얼핏 토끼와 비슷하게 쫑긋 선 귀와 보드라운 털이 있었지만,

크기는 소년의 반은 됨직할 정도로 컸고 두 발로 걸어 다녔다.

또한 짧뚱한 대신 매끄럽고 길게 뻗은 꼬리 끝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날카로운 침이 있어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왜인지 도망칠 힘도 없이 바르르 떨고 있는 그 희한한 짐승을 보며 소년은 말했다.

“괜찮아. 작은 요괴야! 난 널 해치지 않아? 배고파? 먹을 거 줄까?”

소년은 산기슭에서 따온 산딸기 몇 알을 내어주었다.

요괴는 경계하면서도 오래도록 배를 곯았는지 허겁지겁 산딸기를 주워 삼켰다.

요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년은 알겠다는 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토끼 같은 귀에, 긴꼬리. 그리고 세 갈래 침. 알겠다!

네가 방동사니라는 요괴구나! 아버지한테 들은 적 있어!

온순하지만 침에 독이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그래도 이렇게 작은 거 보니까 너 어린애구나!

나랑 친구 할래? 우리 마을은 다 어른들 뿐이라 친구가 없거든. 말할 수 있어?”

어린 방동사니는 소년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구?”

“응! 친구! 나랑 친구 하자! 난 정이라고 해.”

“정...이....”

그렇게 요괴와 소년의 기묘한 우정이 시작되었다.




정이는 틈날 때마다 방동사니를 찾아갔고, 맛있는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

기력을 회복한 방동사니는 물고기와 나무 열매로 소년을 대접했다.

어눌하게 더듬거리던 방동사니의 말솜씨는 늘어갔고,

정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이어갔다.

“방이야. 아무래도 나 장가가게 될 것 같다.”

이제는 청년이 된 정이가 슬며시 말하자 어느새 정이의 키를 훌쩍 넘겨버린 방동사니가 대답했다.

“그런가. 친우로서 축하해주어야 할 일이지만. 난 조금 슬프다.

이제 새로운 가족이 생기면 더 이상 날 찾아오지 않을 텐가?”

“아냐. 넌 내 가족이나 다름없어.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꼭 찾아올게.

어떻게든 시간 내서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이가 약속했지만, 방동사니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인간과 요괴가 가까이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어린 요괴인 방동사니조차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방동사니는 정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함께한 우정이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후 약속대로 조금 뜸해졌을지언정 정이는 간간이 방동사니를 찾아왔다.

하지만 둘 사이는 이미 예전과 달라지고 있었다.

“방이야. 들어봐. 이번에도 그 고약한 토지주가 소작농들을 못살게 굴고 있어.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농작물을 다 떼가면 우린 뭘 먹고 살아야 해?

이제 아이가 태어나면 입도 하나 늘 텐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역시 사람들과 합심해서 강하게 이야기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괜히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돼.”

정이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지만, 방동사니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네가 힘들어 하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없다.

괴롭히는 이가 있다면 혼내주면 된다.

먹을 게 없다면 숲을 뒤져 과일을 따고 짐승을 잡으면 된다.

머물 곳이 없다면 굴을 파고 마른풀을 모으면 된다.

내가 잠을 자는 굴을 보지 않았나?

넌 내 가장 친한 벗이니 네 가족과 함께 내 굴에 기거해도 된다.

내가 허락하겠다.”

정이는 더욱더 깊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방이야. 우린 짐승이나 요괴가 아니야.

산짐승만 잡아먹고 살 수도 없고, 땅굴에 살 수도 없어.

농작물을 키우고 가축을 길러야 하고,

나무 기둥에 흙벽을 세워 집을 만들어야 해.

인간은 그렇게 사는 거야.”

방동사니는 입을 다물었다.

새삼 정이라는 인간과 방동사니라는 요괴 사이에 깊고 깊은 골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 아무튼 신경 써줘서 고마워. 이제 그만 내려가야겠다.”

정이의 말에 방동사니는 크게 아쉬워하며 붙잡았다.

“벌써 가려 하는가? 거진 달포 만에 보는 것이 아닌가?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다. 더 이야기하다 가는 것이 어떻겠나?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정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번 일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 해봐야 할 것 같거든.

늦기 전에 다들 불러 모아봐야겠어.

정신 없을 테니 또 당분간은 보기 힘들 거야. 잘 지내고 있어.”

멀어지는 정이에 뒤에 대고 방동사니가 소리쳤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한다. 요즘 들어 그대가 몹시도 그립다.”

정이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대. 어찌 이리 늦은 것인가? 난 자네가 죽은 줄로만 알고 몹시도 걱정했다.

혹여나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마을로 뛰쳐 내려갔을 거다!”

석 달 만에 나타난 정이를 보며 방동사니는 반가움 반 서러움 반에 격정적으로 말했다.

“미안해. 정말 정신없었거든.

마음 같아선 매일 오고 싶은데 신경 쓸게 한둘이 아니야.

무거운 직책을 맡게 되어서 갑자기 자리를 비우기도 힘들고.

저번에 사람들을 모은 덕에 내가 소작농 대표가 되었거든.

요샌 정말 잠잘 시간도 부족하게 바빠.

아이가 태어나면 이젠 언제 시간이 날지 알 수가 없어.”

방동사니는 서운한 마음에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그대를 보러 마을로 몰래 내려가면 안 되나?”

정이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안돼, 안돼. 혹여라도 눈에 띄면 정말 난리가 날거야.

너도 알잖아. 난 너에 대해 잘 알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요괴들을 얼마나 무서워하는데.”

방동사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정이와 만나지 못하는 건 너무도 서러웠다.

“너무 외롭고 무료해서 견디기 힘들다. 그러니 네가 사람들에게 잘 말해주는 건 어떻나?

내가 위험하지 않다고. 너의 벗이라고 말하는 거다.

그럼 나도 마을에서 지낼 수 있지 않겠나?

번거롭게 만들지 않겠다. 너희 집 근처에 굴을 파서 살고,

먹을 것도 알아서 챙겨 먹겠다.

그러니 마을에서 살게 해 다오. 친우로서 이렇게 부탁한다.”

정이는 할 말을 찾듯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미안해. 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

그리고 세상엔 무서운 요괴 사냥꾼들이 많아. 아마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서 그들이 찾아올 거야.”

“내가 위험한 요괴라 그런가? 꼬리에 독이 있는 무서운 요괴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스스로 꼬리를 자르겠다.

독이 있는 꼬리를 자르고 위험하지 않은 요괴가 되겠다.”

방동사니는 정말 당장이라도 꼬리를 잘라버릴 기세로 말했다.

그러자 정이는 언성을 높였다.

“왜 이해를 못하는 거야! 다 널 위해서라고. 세상엔 네 생각 이상으로 요괴를 두려워해.

그리고 그만큼 증오하지! 네가 위험하고 안전하고, 착하고 나쁘고가 문제가 아니야.

내가 이야기해 줬잖아! 불같은 기세로 차가운 살기를 내뿜는 괴이한 낭인의 이야기.

요괴만 보면 그게 무엇이든 수십 갈래로 토막 내버리는 요괴 사냥꾼이 있다고 말해 줬잖아.

그렇게 끔찍하게 죽고 싶어?”

방동사니도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건 사는 게 아니다! 내가 비록 하찮은 요괴일지언정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

친우와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함께 음식을 먹고.

또 친우의 가족을 지켜보며 그렇게 살고 싶다.

벗이라지만 난 아직 그대의 짝도, 그대의 동료란 자들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그대가 앉아있던 그 바위만 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그 빈자리만 보며 쓸쓸히 기다린단 말이다.

내가 그대의 가장 가까운 벗이 맞는가?

아니면 그대는 나를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 정도로만 생각하는가?”

정이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방이야.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후... 그래.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당장 일이 있어서 내려가 봐야 해.

다음에 올 테니까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방동사니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절망적으로 말했다.

“또 가는 것인가? 이다음엔 언제 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정말 돌아오긴 하는 건가?

내가 심기를 건드렸다면 사과하겠다. 그러니 다시 돌아오겠다 약조해 줄 수 있겠나?”

정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빠르지는 않겠지만 꼭 돌아올게.

나도 미안해. 무작정 숨기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겠지.

그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니까 마을로 내려올 생각만은 말고 몸조심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

마을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나도 꼭 돌아올 거야.”

“그러겠다. 절대 마을에 발을 들이지 않을 테니 반드시 돌아와다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려간 정이는 오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대! 나의 벗 정이, 그대가 온 것인가? 내 얼마나 그대를 기다렸는지....”

사람의 발소리에 빠르게 굴을 빠져나온 방동사니 앞에 있는 것은

그토록 기다리던 정이가 아니었다.

“이런 이런, 외로움에 지친 요괴라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기묘한 도롱이를 쓴 인간, 왠지 위험한 기운을 내뿜는 인간이었다.

“너...너는 누구냐? 요괴 사냥꾼인가? 나를 해치러 온 건가?”

방동사니가 꼬리를 세우며 말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사냥꾼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전 그저 지나가는 장사치입니다.

마을로 내려가던 도중에 서글프고 우울한 기운에 이끌려 혹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싶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인간 친우를 그리워하는 요괴라니 슬픔에 목이 메는군요.”

장사치의 말에 방동사니는 낯선 이를 경계하는 것도 잊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난 무서운 요괴가 아니다. 그런데 세상이 날 무서워한다기에 이리 숨은 꼴이다.

친우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친우의 짝도, 자손도 볼 수 없다.

내가 요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이리도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니....”

장사치는 혀를 쯧쯧거리고는 환약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참으로 딱한 사연입니다. 하지만 천운이 따르신 듯하군요.

마침 저에게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묘책이 있습니다.

자. 이걸 드시면 당신이 가진 독은 치유제가 될 것입니다.

즉, 당신이 꼬리 침에 맞기만 해도 근심 걱정은 물론 두려움마저 사라진단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당신을 좋아하게 될것입니다. 당신의 친우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당신은 그저 마을로 내려가 친우와 마을 사람들에게 치유제를 찔러주고

마음의 안정을 얻은 그들과 섞여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물론, 저 역시 장사치인지라 거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절 위한 돈벌이를 도와주신다고 약속해 드린다면 이걸 넘겨드리도록 하지요.”

장사치의 말은 솔깃한 것이었지만 역시나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하지만 난 친우와 약조했다. 마을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그리고 사람을 찌른다니. 난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혹여나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장사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를 믿으십시오. 이 약만 먹으면 스스로가 느끼실 겁니다. 몸 안에 새로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요.

그렇게 되면 주저하지 않으실 테니 염려 마시지요.

또한 친우와의 약조를 어기는 게 신경 쓰이신다면 제가 조금 도와드리지요.

마을 사람들을 당신의 은신처로 보내겠습니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렸다가 사람들에게 치유제를 찔러주면 되지요.

그럼 약조를 지키면서도 일을 진행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방동사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친우와 함께. 다른 이들과 함께 마을에서 지낼 수 있다.

더 이상 길고 긴 밤을 혼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지내지 않아도 된다.

모두와 어울려 행복하게 음식을 먹고 모두와 부대끼며 살 수 있다.

꿈같은 일이지만 언제나 바라왔던 것이었다.

즉시 환약을 삼키자 역시나 몸 안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알싸한 독이 화한 느낌으로 변하는 것이 붕 뜬 기분으로 만들어 주며 주저함을 없애 주었다.

모두 장사치 말대로였다.

“자 그럼,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계시지요. 제가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을 올려보내겠습니다.”

장사치는 느긋하게 마을로 내려갔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어디까지 기억나시나요?

설명해 드리자면 저에게 요괴 방동사니 건에 대해 상담받으시는 도중에

제가 슬며시 푼 독에 중독되셨지요.

세상에. 요괴와 어울려 사는 방법이라니 아무리 제가 오만 것을 다 파는 장사치라지만

그따위 물건을 가지고 있을 리 없죠.

돈이 되지 않는 물건을 왜 취급하겠습니까?

게다가 방동사니 라면 훨씬 좋은 활용도가 있지요.

당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당신의 벗을 만나고 왔습니다.

저 환락동굴에 사는 환락거미만큼은 아니지만

제 환약만 이용하면 방동사니 독을 쓸만한 환각제를 만들 수 있죠.

이제 전 중독된 당신을 구할 치료제는 산속에 숨은 방동사니 독뿐이라 이야기할 것입니다.

마을의 중책을 맡은 당신을 구하기 위해 방동사니를 잡으러 간 이들은 모두 그 꼬리에 찔려 중독될 것이고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며 앞장서서 그 침을 맡으려 하겠지요.

전 그때 나서서 방동사니를 마을에 앉혀 두고 중독된 고객을 늘려가며 돈을 쓸어모으면 되는 것입니다.

방동사니는 뜻대로 마을에서 부대끼고 살아서 좋고.

마을 사람들은 근심·걱정 잊고 환각 속에 살게 되니 행복한 결말 아닙니까?

당신은 이후 방동사니를 써먹을 때 필요한 귀중한 인질이니 제 꼭두각시가 되어주셔야겠습니다.

뇌를 파먹는 기생 요괴를 하나 붙여 드리지요.

당신은 죽었지만 죽지 못한 채로 제 수하가 되는 것입니다.”

장사치는 가볍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