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낯선 천장이었다.

말 그대로 익숙하지 않은 천장... 아마도 병원인 거겠지.

그렇다는 건 커뮤니티에 썰을 풀 수 있겠구나,

어쩌면 인기글에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죽다 살아난 주제에 이 따위 생각이나 하는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무언가 중얼거리려는 순간, 목 안이 긁히는 듯한 통증과 함께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목 안이 굉장히 칼칼했다.

그리고, 그 들에게 둘러 싸였다.

그 들은 한 마디로 정의하면 매우 시끄러운 인간들이었다. 저마다 괴성에 가까운 문장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모두, 진혁이란 이름을 문장에 덧붙여서 말이다. 진혁아, 이제야 정신이 드니 라던가 진혁아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느냐 라던가, 진혁아 어디 불편한 건 없니라던가.

불편한 거야 두 가지 있긴 했지. 하나는 병실이 누가 봐도 1인실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인테리어나 마감재 등만 봐도 꽤 비싼 병원일테니 의료비가 엄청나게 청구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절규에 가까운 형태로 부르짖고 있는 그 인간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니들이 불편한데." 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 그때까지도 목이 아팠고 그 인간들은 흡사 광신도와 같아서 무서워서 말하지 못 했다. 무엇보다 누군데, 진혁인가 뭔가 하는 놈이... 왜 걔를 나한테서 찾는건데.

"...누구지?"

내가 뱉은 짧은 문장은 그 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은 혼절했다. 

2

나는 아무래도 "기억 상실인 모양"이다. 의사의 주장에 따르면 그랬다. 그리고 나는 이진혁이라는 사람인 모양이고 27세 남성, 명문대 졸업, 가톨릭 신자인 모양이다. ...또 그 들은 나의 가족들이라는 모양이다. 적어도 그 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랬다.

"그럴리가 있나."

입 안에 사과를 밀어 넣으며 중얼 거려본다. 뭔가 이질적인 목소리지만 나는 기억 상실이 아니다. 이진혁도 아니고 그 들 역시 절대로 내 가족이 아니다. 왜냐? 나는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억 상실이 아니다. 내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최정민. 그러니 난 이진혁이란 놈이 아니다. 물론 내 가족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러니 그 들도 내 가족이 아닌 것이다.

명문대? 미안하지만 난 고졸이다. 정확히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자퇴했고 군대에서 검정고시에 합격한 인간이다. 자퇴한 이유도 당연히 기억하지. 수학 선생이 하도 여자애들을 성추행하고 다니길래 따지러 갔더니 뺨을 맞았다. 참았어야 했는데... 결과론적으로 수학의 왼 다리를 부러 뜨려 자퇴란 형식으로 퇴학 당했다. 여자애들는 많이 슬퍼해 줬지. 후회는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 간다 해도 왼 다리를 분질러 버릴 것이다. 

검정고시를 본 이유도 기억한다. 행보관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합격한다면 몽쉘 한 박스와 콜라 몇 병인가를 챙겨 주겠다고 했었지. 그땐 이등병 홀로 PX에 갈 순 없었으니까 매력적인 제안이었지. 

무엇보다 공부하러 가면 참으로 라면을 줬고.

직업은 Co2 용접사. 경력은 8년. 예수쟁이인 건 맞지만 가톨릭이 아니리 개신교. 나이도 27세가 아니라 31세. 아버지는 배관공, 어머니 뭐 그딴 건 없어. 계모라면 있다만 서로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지. 형은 항해사. 1년 중 절반 이상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인간이다.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내겐 가족이라 부를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이진혁이） 누구지?" 라는 내 의문을 그 들은 "당신들은 누구지?"로 이해한 모양이다. 그런 설정을 통해 나는 기억 상실이라는 모양이다. 이거, 몰래 카메라치곤 스케일이 굉장하지 않나. 뭐 상관이야 없지... 의료비야 그 들이 낸다는 모양이고 대충 속아 넘어가주다가 몰래 카메라였습니다!! 라고 할 때 고소하자는 게 내 계획이다.

일종의 감금이고 세뇌를 시도했으니 상당한 위자료를 받을 수 있을거다. 패소 가능성이 짙어지면 유튜버들에게 제보해 공론화시키면 되겠지? 가십거릴 찾는 렉카들은 넘쳐날 정도로 있으니.

3

종종 간호사가 다녀간다. 무식하게 큰 링거를 교체하기 위해서. 간혹 의사도 다녀간다. 이것 저것 물어보지만 내 답변은 대부분 모르겠다 다. 모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존재하지도 않는 여동생의 이름을 대답할 수 있는 30대 남성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 의사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갈 서류에 휘갈기곤 사라진다. 얼굴과 복부의 붕대는 언제 푸느냐는 물음엔 항상,

"지금처럼 행동하시는 것도 원래는 안 된다. 환자 분에겐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 는 답변만 기계처럼 돌아올 뿐이다. 제법 연기를 잘 해... 조금만 더 잘 생겼다면 드라마의 주인공 역도 맡을 만 한데.

나머지는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주로 어머니나 여동생이다. 어머니는 옛 추억에 대해 자주 말하곤 한다. 일관성이 있는걸로 보아 작가가 시나리오를 튼튼히 구성한 모양이다. 스케일이 큰 세트장, 배우, 시나리오... 생각보다 돈을 더 뜯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따금 찾아오는 복부의 통증은 불만이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은 무언갈 기대하는듯한 표정이지만 난 그걸 만족 시켜줄 수 없다. 기억 상실도 아닌데다 이 몰카 감독이 원하는 반응이 뭔지도 전혀 모르겠으니까. 간혹 어머니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인 기억상실이라는 게 있다는 둥, 어서 나아지길 바란다는 둥 그런 소리를 하고 간다.

그러니까 기억상실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설령 기억상실이라고 해도 그게 감기처럼 며칠 앓고 나을 수 있는것도 아닌데 뭘 어서 나아지길 바란다는 건지... 본인들 지능이 좀 더 나아지길 비는 게 훨씬 이로울 것 같은데.

4

꿈을 꿨다. 바이크를 타고 어두운 길을 달리는 꿈... 심야 시간대에 차량 통행량이 확연히 줄어드는 곳이라 이 곳을 지날 때 마다 엄청나게 밟곤 했다. 다만 꿈에선 트레일러와 마주쳤다. 가로등이 얼마 없는 구간이었고, 굽이 진 길목이라 트레일러는 갑작스레 나타났다. 순간 놀라 바이크 조작에 실수가 있었고 그대로 트레일러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바이크가 아작나는 듯한 소리, 그리고 엄청나게 빠르게 다가오는 무언가, 그 것이 검은 색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 꿈에서 깼다.

5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꿈이 아니다. 직접 겪은 일이다. 검은 색이었던 건 아마도 트레일러의 타이어였을 것이다. 헬멧을 쓰고 있긴 했지만 트레일러에게서 나를 지켜줄 수는 없었다. 이 기억이 맞다면 난 머리통이 으깨져 죽었어야 정상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지?"

중얼거림이 유난히 낯설다. 원래 이런 목소리였던가? 아니다. 병원에 입웜해 있은지도 2주... 목에 이상이 있었다고 해도 어느 정도 음색이 돌아와야 정상이 아닌가? 문득 든 생각에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거울 속 모습. 환자복을 입고 머리와 복부에 붕대를 감고 있는 남자의 모습... 내가 아닌 거 같은데. 난 이 정도로 키가 크지 않다. 사고를 당해 허리가 굽어 작아질 순 있어도 커지는 건 무리 아닌가?

얼굴의 붕대를 난폭하게 쥐어뜯듯이 풀어 낸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바늘로 기운 부분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아예 내 모습이 아니었다. 이건 대체 뭐지? 

6

나는 사고로 머리통이 날아갔다. 이진혁이란 놈은 건강상의 문제로 장기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했고. 누군가의 장기를 이식해야 하는데 타이밍 좋게도 내가... 정확히는 머리통을 잃은 내 몸뚱이가 들어 온 거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식에 큰 지장이 없어서 이식했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난 장기 기증따위에 서명한 기억이 없단 말이지. 내가 죽어갈 때 타인에게 내 장기를 나눠주는 서명이라니, 유서라도 적는 기분이라 분명히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즉 이 놈과 이 놈의 가족들은 무단으로 내 장기를 적출해 사용한 것이다. 의사도 공범이겠지. 꽤 많은 돈을 받았다는 소리다. 의사 면허가 걸린 일이니까. 그렇다는 건...

"부자겠네."

병실을 둘러 본 솔직한 감상이었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건 아마 이식한 장기 부분에 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겠지. 뭐가 어찌됐든 내가 내 정체를 밝힐 이유는 없다. 대형병원의 전문의와 원장, 간호사 등을 모두 매수할 정도의 재력가인 집의 아들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내가 포기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이제 공장에 다니며 철쟁이라고 무시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연봉도 낮은 비전문 인력들에게 무시 당할 일도 없고 사시사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지낼 수 있다. 대충 곤란한 문제는 "사고로 기억을..." 한 문장이면 대강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놈을 곤란하게 만들 녀석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죽다 살아난 자식이 곤경에 처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는 부모는 흔치 않으니까.

뭔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면 머리통 부여잡고 괴로운 척 나자빠지면 대부분 해결되겠지. 그래, 앞으론 진혁이란 놈으로 살자.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어.

...내 잘못도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