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만 있으면 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앞에 있는 소영이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에 찰랑이는 머리.

그리고 슬픔과 사랑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미소.

다시 한번 소영이를 안고 싶어 그녀에게 팔을 뻗어 보려 했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소음에 머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소영이의 세상이 내게서 멀어져 갔다.




“아....”

빗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천장 너머가 곧바로 지붕인지라 꼭 백 명의 아이들이 발이라도 구르는 듯한 소리가 난다.

옥탑방 주제에 이런 층간소음이라니.

“하.. 시끄러워....”

소영이의 얼굴을 더 보고 싶어 구시렁거리면서 귀를 틀어막고 다시 잠이 들려 해봐도 역시나 무리였다.

어차피 허기가 졌으니 뭐가 되었건 배를 채워야 했기에 뻐근한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오후 한 시 이십 분.

자다 깨다 하긴 했지만, 어제저녁 열 시부터 잤으니 거의 15시간은 내리 잔 셈이다.

마음만 같아선 24시간 자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그것은 무리였고,

최소한의 생명 활동은 해야 한다.

주방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아보았다.

라면은 다 떨어졌고, 반찬도 없다.

그나마 밥솥에 눌은밥 한 덩이가 남아있어 물에 말아서는 반찬통에 남은 김 가루를 뿌려 퍼먹었다.

맛이야 있을 리 없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나에게 이건 현실이 아니니까.

소영이가 있는 곳. 내가 잠이 들었을 때만 갈 수 있는 그곳이 진짜 현실이다.

이곳은 그냥 날 억지로 잡아두고 있는 세계. 떠나야 할 세계일 뿐.

밥 같지도 않은 밥을 전부 뱃속에 밀어 넣자 좋든 싫든 포만감이 찾아왔다.

문득 슬픔이 몰려와서는 그릇을 쓱 밀어놓고는 중얼거렸다.

“소영이 보고 싶다.”

물론 이 세계에 소영이는 없다.

안타깝게도 몇 번이나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것이 너무 서글퍼 한숨을 쉬고 있자니 누가 문을 두드려왔다.

“들어와.”

어차피 누구일지는 뻔했기에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제 일어났냐?”

지금 그나마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건 저 녀석 뿐이었다.

최진성.

그래봐야 하는 건 가끔 밥을 사주던가 인생에 대한 듣기 싫은 조언을 쏟아내는 것뿐이지만,

그나마 내 말을 비교적 진지하게 듣고 자기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충고를 해주곤 한다.

“밥은 먹었어? 뭐 자장면이라도 시켜줘?”

진성이의 말에 난 고개를 저으며 텅 빈 밥그릇을 가리켰다.

“뭐 좀 제대로 먹지 이게 뭐냐? 있어 봐 내가 시켜줄게.”

“됐어. 입맛도 없다.”

배달 어플을 뒤지던 진성이는 크게 한숨을 쉬며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생활비는 있냐?”

“이달까진 괜찮아. 저번에 받은 돈 아직 남았어.”

진성이는 각오를 다지듯 입술을 깨물었다.

저 이후에 나오는 건 보나 마나 잔소리겠지.

“야. 뭐 내가 이런 얘기 한두 번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또 한 번 할게.

너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언제까지 그렇게 부모님 돈 받아 가면서 이렇게 연명만 하고 살 거야?

취직도 하고 돈도 모으고 이사도 가고. 결혼도 해야 하지 않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꿈에 홀려가지고 누워서 잠만 자는 게 말이 되냐고.”

역시나 시작된 잔소리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봐. 나도 알아. 네가 하는 얘기 무슨 얘긴지 내가 다 알거든?

근데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래.”

하지만 진성이는 이번엔 완고했다.

“생각? 무슨 생각. 꿈에 나오는 그 소영인가 뭔가 하는 여자한테 홀려서

그쪽 세상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게 네 생각이고 계획이야?

현실에선 옥탑방에서 찬밥 말아먹으면서,

꿈에선 소영이가 밥도 차려주고, 안아주고, 예뻐해 주니까 거기가 진짜 같아?

정신 차려 너 나이가 몇이야? 우리 이제 어린 나이 아니야.

서른 되고 마흔 되는 거 진짜 한순간이다?”

오늘따라 기분 나쁘게 찔러대는 진성이의 말에 안 좋은 감정이 들끓어 댔다.

그래서 평소답지 않게 혼잣말하듯 비아냥을 뱉어냈다.

“씨발.. 그냥 죽고 말지 뭔...”

“야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넌 진짜 그냥 죽으면 그만이야?

너 욕실에서 손목 그었을 때, 너희 엄마 충격으로 쓰러지셨었어.

어? 너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을 때 네 여동생이 네 다리 붙잡고 울면서 말린 거는 기억 안 나?

집으로 들어 오라는 거 네가 악착같이 우겨서 안 간 거잖아.

이 거지 같은 옥탑방에 있어야 꿈에 소영이 나와서 그런 거 아니야?

너희 아버지가 나한테 무릎 꿇고 부탁하시더라.

네가 가족들은 꼴도 보기 싫어하니까 나라도 주기적으로 들러서 돌봐달라고.

뭐든 좋으니까 우리 아들 죽을 생각만 안 하게 해달라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애초부터 이 녀석도 그 가족이라는 작자들도 날 이해하지 못한다.

더 이상 대화를 하는 건 무의미하다.

“됐으니까 나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하지만 오늘만은 진성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신 좀 차리라고 이 개새끼야! 언제까지 그따위 귀신 년한테 홀려서 병신같이 살 거야!”

귀신 소리에 나 역시 더 참지 못하고 진성이의 멱살을 잡았다.

“귀신 아니라고 내가 몇 번 말했어. 어? 네가 뭘 알아? 넌 아무것도 몰라.

너한텐 여기가 현실이겠지만, 나한텐 아니야. 나한테는 소영이가 현실이야. 알아?”

진성이는 내 손을 뿌리치고는 한참을 날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진짜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하냐고.

잠이 들면 나타났다가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 그게 진짜 현실이야?

눈을 뜨면 보이는 여기가. 이 빗물 떨어지는 옥탑방이. 널 걱정하는 가족들이 전부 가짜고?

고작 눈감으면 나타나는 그 허상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난 대답하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뭐래도 소영이는 진짜다. 소영이가 있는 세계가 진짜 현실이다.

이것 하나만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진실이니까.

“나가.”

진성이는 한동안 분을 삼키듯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 퉁명스럽게 내뱉는 것은 잊지 않았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어. 너희 엄마 또 쓰러지시는 거 보기 싫으면.”

마지막까지 속을 긁어놓는 녀석의 말에 더 참지 못하고 밥그릇을 들어 벽에 던져버렸다.

한동안 씩씩대고 있어도 화가 풀리지 않아 문을 벌컥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비가 축축이 내리는 도시의 하늘은 우울한 회색빛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과 건물들. 지나가는 기차. 바쁘게 오고 가는 자동차들.

내려다본 공원에는 수많은 사람이 산책과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각자 사연을 가지고 또 인연을 가지고 살고 있겠지만, 이 세상에 소영이는 없다.

그 옥탑방에서 잠이 들면 꿈을 꾸듯 만날 수 있을 뿐.

그 사실 하나만이 날 미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소영이만 기억해. 다른 건 다 무시해. 저 새끼 말도, 여동생이며 엄마며 아빠며 이딴 거 전부 다 무시해! 소영이만 기억하는 거야.”

나 자신에게 세뇌를 걸듯 몇 번이나 외치고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높이. 여기서 뛰어내리면 이 가짜 세상을 끝내고 소영이에게 갈 수 있다.

하지만 쉬이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죽겠다고 나설 때마다 누군가 나타나 날 말렸으니까.

무시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이 세상은 가짜고 저 인간들이 뭐라 하든 내 알 바는 없으니.

하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죽어야지 마음먹었음에도 결국 그 사람들 얼굴이 계속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도 괴로운 기분에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맡을 뒤져 수면제를 찾았다.

자주쓰면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소영이가 보고 싶었다.

사랑하는 소영이가 날 쓰다듬고 안아주고 또 입을 맞춰주길 원했다.

난 되는대로 수면제를 입에 털어놓고는 비에 푹 젖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제 이 가짜 세상을 벗어나 진짜 현실로 갈 시간이다.






‘사랑해. 정말 많이.’

소영이가 보였다.

언제나 와 같은 아름다운 미소. 하얗게 빛나는 피부.

그리고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맑은 눈동자.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손을 뻗어 소영이를 만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치 온몸이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것도 그 가짜 현실이 날 잡아두고 있어서다.

아까 뛰어내렸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소영이를 안아줄 텐데.

다시금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후회보다 소영이의 얼굴을 보는 게 더 중요하다.

소영이.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소영이.

내 전부이고 내 삶의 이유인 소영이.

난 머릿속에 박아넣으려는 듯이 소영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영이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 역시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는 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마음이 울고 있을 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곧 돌아올 거야. 약속할게.’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다시금 눈앞이 흔들리며 소영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뜨니 다시 그 옥탑방이다.

천장에 구멍이 났는지 이마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어 안 그래도 푹 젖은 침대를 적셔오고 있었다.

비참함과 서글픔에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이제 이 시궁창 같은 세상에선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았다.

곧장 문을 열고 나가서 옥상 난간 위에 섰다.

아찔한 높이 따위는 더 이상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얼굴 따위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뛰어내려 소영이에게 가면 된다.

소영이가 있는 진짜 세상으로.

각오를 다지고는 발을 떼려는 그 순간,

“오빠 안돼! 죽으면 안 돼!!!”

누군가가 내 다리를 잡아채었다.

또. 또 이렇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지지 않는다.

“놔! 놔! 난 갈 거야! 소영이한테 갈 거야!”

거칠게 발길질을 하고 있자 어느새 나타난 진성이가 날 끌어내렸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뭐라고 그랬어? 죽을 생각 말랬지?

지금 네 여동생 꼴 안 보여? 저걸 보고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난 진성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빗물에 젖고 내 발길질에 입술이 터진 여학생.

너무도 서럽다는 듯 오열하는 그 아이를 보고 역시나 마음이 안 좋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저 앤 내 여동생이 아니야. 쓰러진 여자도 내 엄마가 아니고 무릎 꿇은 그 사람도 내 아빠가 아니지.

그리고 너.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내 친구가 아니야. 난 너 같은 친구 없어.”

진성이는 분노 대신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 성훈아. 좀 진정하자. 진정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보자고.”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난! 성훈이가 아니야!!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봐! 저 하늘을 보라고! 비가 멈추질 않잖아. 벌써 몇 달 동안! 밤도 오질 않는데 해는 없어.

온 사방이 다 회색뿐이잖아.

이건 현실이 아니야. 너희한텐 현실일지 모르지만, 아니 너희가 뭔지도 난 잘 모르겠지만,

이건 현실이 아니야.

현실 하늘은 파란색이라고. 밤낮이 있고. 비가 멎으면 해가 뜨는 게 진짜 현실이라고.

내가 꿈으로 도망친다고? 아니야 여기가 꿈속이야!”

다시금 소영이를 생각했다.

내 사랑하는 아내 한소영. 내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음에도,

의식도 없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내 곁은 지켜주던 소영이.

하지만 이 꿈속 세계에선 잠이 들었을 때만 의식을 차리고 소영이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난 화를 내며 진성이를 바라보았다.

진성이는 아무런 감정이 있지 않은 마치 마네킹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내 여동생이라 주장하던 여학생도 어느새 진성이 옆에 서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내 부모라고 주장하는 남녀가 나란히 서서 날 가만히 보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기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자동차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공원에서 떠들던 사람들도 그 자리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마네킹 같은 얼굴로.

그 기괴함은 날 말 못 할 공포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이들은 날 두려워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네 사람. 그리고 멀리 공원에 있는 사람들까지 마치 입을 맞춘 듯 내게 말했다.

“성훈아. 아무래도 뭘 착각한 모양이네. 다시 말할게.

여긴 꿈이 아니야. 여기가 현실이야. 네가 잠들면 가는 곳이 꿈이지. 알아들어?”

섬뜩함에 비명을 지르며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지만,

진성이와 다른 이들의 우악스런 손이 날 잡아채서는 억지로 집안으로 끌고 들어가 침대에 눕혔다.

“알겠지? 여기가 현실이야. 그걸 절대 잊으면 안 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치 기절하듯 정신을 잃었다.




빗소리. 다시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엔 꿈에서 소영이를 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