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주라!”

수아가 내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분명 신입생 환영회 때 처음 보고, 같은 수업도 몇 개쯤 들었지만,

서로 별다른 인사도 없이 존재만 알고 있던 동기.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쩌다 만들어진 중간고사 뒤풀이에서

술에 취해 벌개진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애초에 시끄럽게 노는것도 별로였고, 먹을 것도 충분히 먹었겠다

눈치봐서 일어나려던 차였으니 잘되었다 싶어

묘하게 하이텐션인 그 애와 함께 술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너 되게 귀엽게 생겼다.”

“그래? 너 닮았나 보네.”

뜬금없이 던지는 이상한 칭찬에 나도 맥락 없이 받아쳐 주었다.

하지만 수아는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한참을 웃어대었다.

“얘, 말하는거 봐. 이제 보니 너 아주 요물이구나?”

그날 이후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수업 때 옆자리에 앉기도 하고 가끔은 밥도 같이 먹었다.

다른 동기들이 끼는 경우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수아도 학교에서 늘 혼자 다녔던 것 같다.

나야 사람들과 어울리는게 부담스러우니 그렇다 치지만,

예쁘장한 수아는 왜 학과 내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도는 것일까?

우습게도 우연히 동기 여자애들끼리 떠드는게 귀에 들려온 통에 답을 알 수 있었다.

‘몸을 그리 헤프게 쓴다더라.’

‘남자를 홀려서 돈을 뜯어낸다더라.’

‘명품에 미친년이라더라.’

라는 그 출처도 근거도 희박한 소문.

다소 불량스런 이미지에 외모도 예쁘다 보니 질투심 때문에 그룹에서 밀려난 모양이었다.

물론 난 그런 소문 따윈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전부 진짜라고 해도 그다지 거부감 따윈 없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수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2학기 중간쯤 되어서는 휴학했는지 수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주라....’

새벽녘에 수아에게 전화가 왔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만 해도 소식이 궁금하거나 걱정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슬슬 두꺼운 패딩을 꺼내는 이 계절에 아이스크림 핑계를 대면서 라도

날 만나고 싶다면 그만큼 절실한 뭔가가 있겠거니 싶어 곧바로 자취방 근처 편의점에 있다는 수아를 찾아갔다.

어디서 얼마나 마셨는지 추운줄도 모르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수아를 보니 조금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믿을만한. 연락할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겠지.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수아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 궁금해?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무슨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그런데 왜 안 물어봐?”

“나한테 말하기 싫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기다리고 있어.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이렇게 얌전히 있으면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할 거 아니야?”

그 애는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곧 침울하게 변하며 물어왔다.

“나에 대해서 소문 들은거 뭐 있어?”

“몰라. 기억하고 있는 것도 없고.”

약간 감동한 표정이었지만, 이어지는 말은 우울한 것이었다.

“거의 다 사실이야.

외로움 많이 타서 남자 품 찾아다니고.

가지고 싶은건 빚내서라도 가져야 되고.

돈에 미친년. 남자에 미친년 맞아.”

딱히 거부감은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할 수 있었다.

“열정적으로 사네. 뭐 어때?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사는거지.”

어찌 보면 상당히 무례한 말일 수 있지만,

그 애는 오히려 가볍게 받아들이는 내 태도가 놀라운 듯 했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넌 되게 특이하다.

다들 반응은 비슷했거든.

여자들은 대놓고 혐오하고.

남자들은 혹시 대줄까 싶어서 착한 오빠 모드로 찝적거리고.”

“그따위 놈들이 뭐라하든 알게 뭐야?”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잘근잘근 씹고 있던 수아는 잠시간 조용히 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나... 오늘 재워주면 안돼? 지금 나 돈도 없고, 갈데도 없어.”

재워준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방이 좁지는 않으니까. 재워줄게. 가자.”






“추웠을 테니까 우선 따뜻한 물로 씻어.

좀 크긴 할텐데 내 옷 빌려줄게 입고.

속옷은 모르겠다.

내꺼 입던가 니꺼 다시 입던가 알아서 해.

남자꺼긴 한데 안 뜯은 새거 있어.”

무심하게 챙겨주자 조금 긴장했던 표정의 수아도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수아가 씻는 동안 난 조용히 방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망치? 이건 좀 힘드려나? 노끈 같은것도 있긴 한데 그건 좀 그렇고....

음... 에라 그냥 칼로 하자.”

과도를 꺼내 이리저리 살피고 있자니 수아가 내가 준 츄리닝을 꺼내 입고 나왔다.

“와! 이거 진짜 너무 편하다! 나두 이런거 몇 개 사다 입을까?”

연신 손으로 엉덩이께를 쓸어보며 다리를 움직이는 꼴을 보니 속옷까지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이왕 개시했으니 그거 가져. 그리고...”

난 수아에게 과도를 들이밀었다.

움찔하는 수아를 보며 아차 싶어 이번엔 얌전히 날을 잡아 손잡이 쪽을 내밀고는 재차 설명했다.

“베개는 두 갠데 이불이랑 전기장판이 하나라 붙어서 자야돼.

난 미라처럼 얌전히 자는 편이니까 이거 가지고 있다가

혹시라도 내 손이 이상한 데로 간다 싶으면 바로 찔러버려.”

멍하니 있던 수아는 처음 본 그날처럼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다짜고짜 칼 들이밀면서 한다는 소리가 그게 뭐야!

그렇게까지 안해도 돼.”

“신뢰라는건 말로만 하는게 아니야.

믿을만한 상황을 만들어야 믿지 않겠어?

그러니까 받아.”

수아는 웃음기 담긴 얼굴로 잠자코 과도를 받아들었다.

“손도 안 잡고 자겠다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시덥잖은 남자만 만났나 보네.”

기분이 완전히 풀렸는지 훨씬 밝은 얼굴로 자리에 눕는 수아를 보며 불을 껐다.

“잘자.”

“너도 잘자.”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자?”

수아의 목소리였다.

“아니.”

잠시 뜸을 들인 수아가 다시 말했다.

“내가 사연팔이 하면 들어 줄거야?”

“응. 동정하거나 조언하거나 위로해 주는건 못하겠지만,

들어 줄 수 있어.

그리고 토닥토닥 재워 줄 수도 있고.”

다시 약간 뜸을 들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안아달라고 하면?”

“안아줘야지. 너무 가깝게는 말고. 시상식에서 의례적으로 하는 로봇 허그 정도?”

“키스해 달라고 하면?”

“그건 안돼.”

“여기저기 막 만져달라고 하고 또 해달라고...”

“그것도 안돼.”

수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내가 매력없어? 아니면 더러워서?”

“아니. 넌 매력있고 예뻐. 더럽지도 않고.

근데 우린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잖아. 그치?

내가 널 사랑하게 되면. 그리고 네가 날 사랑하게 되면.

그러고 나서 누구든 고백하고. ‘오늘부터 1일’ 찍고.

데이트 하고. 맛난것도 먹으러 돌아다니다가.

한달이나 두달쯤 지났을 때.

일박으로 어디 멋있는 곳으로 여행가서 즐겁게 보내다가

해 떨어지고 둘만 남게 되면. 그때 무드있게 해야지.”

“난 그런거 없어도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래야 해.”

수아는 실망을 한건지 화가 난건지 알 수 없었지만, 더 고집부리는 대신 조용히 하소연 하기 시작했다.

“나 사실 돈 잘못 빌렸다가 못 갚아서... 엄청 더러운 일 했어.

어떻게든 꾹 참고 돈 모아서 다 갚고 나오긴 했는데,

내가 너무 혐오스럽고 징그러워서 미칠 것 같아.”

이후 수아의 고통스런 독백이 이어졌다.

자신의 가장 깊은 치부까지 드러내야 할 만큼 괴로웠고,

또 그걸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나를 믿었던 모양이었다.

길고 긴 이야기를 마친 수아에게 내가 말했다.

“말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그리 많지 않아.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해?”

“그냥 토닥토닥 해줘. 푹 잘 수 있게.”

난 순순히 몸을 옆으로 뉘이고는 내쪽을 보며 누운 수아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고마워....”

잠시간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얼마 안가 잠들었는지 수아는 규칙적으로 숨을 뱉어내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숙취가 주는 갈증으로 마른 기침을 하며 일어난 수아에게 말했다.

“응! 먹을래!”

기분 좋게 대답하는 수아에게 냉동실에서 꺼낸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고는 냄비를 꺼내 들었다.

“라면 끓여줄게. 주말인데 혹시 오늘 약속 같은거 있어?

없으면 어디 가지말고 여기 있자. 할말도 있고. 들어야 할 말도 있고.”

수아는 기대감 어린 얼굴로 이불을 빠져나왔다.

“무슨말?”

“음... 그러니까 일종의... 동의?”

그렇게 대답하며 라면 다섯 개를 꺼내 들었다.

“둘인데 그렇게 많이?”

“셋이야.”

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일찍 왔네. 소개할게. 이쪽은 내 애인 준성이.”

“애인?”

“응. 어제 얘기한 대로.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고. 고백해서 사귀다가 여행까지 같이 간 진짜 사랑하는 내 애인.”

수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집으로 들어오는 듬직한 준성이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아... 그랬구나. 남자 좋아 하는구나...”

난 끓는 냄비에 라면을 쏟아 넣으며 대답했다.

“어.. 좀 애매한게 일단 나는 남자 좋아하는게 맞는데. 준성이는 둘 다 좋아해.

아니 정확히는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더라.

내가 열심히 구애 했는데, 안 받아주길래 조건을 걸었어.

나랑 사귀면 이쁜 여자랑도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고.

우리 준성이가 여자 꼬시는 재주는 없거든.

나는 무조건 로맨스 먼저인데 준성이는 몸만 있어도 괜찮대.”

다가오는 준성이를 피해 물러서던 수아는 아이스크림마저 떨어트렸다.

“그래서 이제부터 네 동의를 얻으려고 하는거야.

우리 준성이는 야성미가 넘쳐서 나 혼자로는 감당이 안되거든.

그러니까... 자. 앞으로 네가 우리 준성이를 만족시켜 주면,

어젯밤 네가 한 이야기 이거 밖으로 새 나가는 일은 없을거야.”

녹음되었던 어젯밤 수아의 이야기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자,

수아는 충격을 받은 듯 꿈쩍도 않다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꾸 두리번 거리지마. 칼은 아까 치웠어. 혹시 우리 준성이한테 생채기라도 나면 안되니까.

좋게 생각해. 어제 나랑 하려고 했잖아. 준성이가 나라고 생각하고 좋게 좋게 즐겨 보자.

그리고 끝나면 뭐. 나랑 준성이랑 러블리한 시간 보내는거 구경해도 좋고.

일단은.... 배부터 채우자. 자기야. 밥상 좀 펴 줘.”

수아의 몸을 탐욕스레 훑어보던 준성이는 입맛을 다시며 밥상을 꺼내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