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길을 걷고 있었다.

소년이 걷는 길은 흙길이기도, 자갈길이기도, 잘 닦인 시멘트 길이기도 했으며,

소년이 걷는 주변 역시 시골이기도, 도시이기도,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숲속이기도 했다.

기묘하고도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소년은 그런 것들은 사소하다는 듯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걷고 있었다.

한동안 씩씩하게 걷던 소년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를 알아챈 소년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소년의 옆을 따라 걸으며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정중하고도 기묘한 그 목소리에 소년은 기분이 좋은지 한껏 미소 지어 보이고는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남자는 계속해서 바뀌는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어디처럼 보여요?”

“음…. 천국인 것 같아요. 이렇게 예쁜 건 처음 보거든요.”

남자는 조금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천국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비슷할 수도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삶을 다시금 돌아본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여긴 천국으로 가는 길 정도 될 거예요.”

소년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보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예뻐서 좋아요.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몇 살이죠? 그러니까 지금이요.”

소년은 잠시 생각한 뒤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7살이요!”

“그렇다면 아직 많이 남았겠네요.

아마도 걸으면 걸을수록 나이를 먹고,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는 것 같거든요.”

소년은 역시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화려하게 변하는 주변으로 관심을 돌렸다.

“제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남자의 질문에 소년은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요! 천사님이잖아요.”

대답하려던 남자는 소년의 해맑은 미소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네. 천사…. 지금은 그렇게 부르시는 게 더 편하겠네요.”

그러는 동안에도 길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걸으면 걸을수록 소년의 키는 자라났다.

다만 여전히 소년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좋은 어린 시절을 보내셨나 보네요. 한결같이 즐거워 보여요. 지금은 몇 살이죠?”

“12살이요, 천사님. 부모님도 자상하시고 친구들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너무너무 행복해요.”

학교 운동장과 정겨운 골목길, 그리고 오래된 교실들을 지나치며 소년은 자라났다.

“점심시간엔 매일 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어요. 이 골목은 친구들하고 놀았던 곳이고.

여긴 제가 있던 반이네요. 난로 가까운 자리가 제자리에요.

제일 따뜻한 곳이라 모두 부러워했어요.”

어릴 때만큼 다채롭고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누구든 추억을 떠올리고 웃음 지을 만한 풍경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소년은 어느새 교복을 입고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셨네요. 여전히 행복해 보여요.”

소년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고민도 많고, 슬픔도 많았을 시기에요. 그래도 여전히 순수하고 행복했네요.”

이제 숲길도, 흙길도 없이 콘크리트 길뿐이었지만, 때 묻지 않는 순수함이 있는 때였다.

말하는 동안 시간을 빠르게 돌린 듯 소년의 키는 점차 커져

이제는 남자와 거의 비슷한 정도였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소년은 언젠가부터 웃음을 잃어 있었다.

“고등학생. 표정이 너무 안 좋네요. 무슨 일인가요?”

소년은 슬프게 이야기했다.

“아버지 사업이 잘못되었거든요.

금세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결국은 실패 하셨어요.

가족들이 지하 단칸방에 내던져졌죠.

어린 마음에 아빠가 참 많이 미웠어요.”

소년의 감정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름답던 풍경이 어두워지고 무거워졌다.

달동네로 올라가는 계단, 좁디좁은 지하 방.

멀고도 먼 학교 가는 길.

웃음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성인이네요. 어때요? 지금은 좀 나아졌나요?”

소년은. 아니 청년은 크게 한숨을 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아버지께서 쓰러지시고 당장 먹고살 걱정을 해야 했어요.

어떻게 공장에 취직은 했는데 햇병아리 취급당하면서 싼값에 굴려졌어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가족들이랑 밥 한 끼 먹기도 벅차더라고요.”

화려하게 변하던 풍경은 이제는 별다른 변화도 보이지 않고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그 때문인지 청년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나란히 걷던 둘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걸었다.

“이제 30대. 여전히 힘든가요?”

청년은 다행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네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도. 여전히 먹고살기 힘들지만 그래도 힘이 나요.

다시금 희망도 피어나고 있네요.”

회색뿐이던 풍경에 조금이나마 오색 빛이 피어났다.

청년은 새삼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던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앞으로 잘될 수 있겠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청년이었던 그의 얼굴은 점차 힘을 잃어 갔다.

중년이 된 그는 정말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전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세상이 그리 쉽지 않네요.

아내와 사이도 멀어지고.

먹고살 만할 것 같으면 꼭 뭐 하나씩 일이 터져서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네요.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자꾸 아들놈만 다그쳤어요.

제대로 공부시켜서 나처럼은 안 살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좀 더 좋게 다독여 줬으면 좋았을걸.

제가 너무 서툴렀어요.”

어두운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것은 가족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옆자리를 지키며 걸을 뿐이었다.



“후회. 후회가 많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후회.

아내를 좀 더 챙겨줄걸.

욕심부리지 말고 부지런할걸.

아들을 몰아세우지 말고 좋은 말만 해줄걸.

매일 같이 후회하면서도 돌이켜 보면 그 순간에도 후회할 짓을 하고 있었구먼.

이렇게 바싹 늙을 때까지 오로지 후회뿐이었어.”

소년이기도 청년이기도 했던 중년은

어느새 하얗게 센 머리의 노인이 되어 느릿한 걸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무도 느려진 노인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걷던 남자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떤 게 제일 후회 되시나요?”

노인은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 길은 거칠고 거칠었고 더는 풍경이랄 것도 없는 어둠이 가득한 모습.

아무래도 슬슬 길이 끝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서글프구먼. 그렇게도 아름다운 곳이 어쩌다 이렇게 처절하게 변했는지….”

혼잣말하듯 한숨을 내뱉고는 뒤늦은 대답을 이었다.

“후회라. 대답하기 어려워. 모든 게 다 후회스럽거든.

욕심에 눈이 멀어 아버지와 다름없는 길을 걸은 것도 후회스럽고.

죽도록 고생만 한 아내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그렇고.

몸뚱이 하나 관리 못 해서 아들한테 짐만 지워 버린 것도 그렇고.

치매라니. 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되었기에 그런 몹쓸 꼴을 보인 건지.”

노인은 씁쓸하게 숨을 들이쉬고는 옆에서 따라 걷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로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던 남자에게 노인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이 애비가 정말 면목 없다. 이제야 널 알아보겠구나.”

남자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다. 어떻게든 우리 가족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내 욕심이 너무 과했어.

거기에 추레한 짐까지 지워 줬으니 네가 어찌할 수 없었겠지.

치매 걸린 노인네에 감당 못 할 빚까지 있었느니. 다 이해한다.”

하지만 남자는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든 듯 괴로워하며 말했다.

“아뇨.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금만 참았으면 되는데.

너무 힘들어서…. 나도 아버지도 이게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해버리는 바람에.”

남자는 방에 가스를 틀어놓고 치매 걸린 아버지의 옆에 눕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오열했다.

그때 노인의 걸음이 멈추었다.

“괜찮다. 내가 얼마나 큰 짐이었을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다만. 난 떠나도 되지만, 넌 그랬으면 안 되었다.

난 죽어 마땅하지만, 넌 죽으면 안 되었다.

너만은. 너 하나만은 어떻게든 다시 살았어야지.”

하지만 남자는 진정하지 못했다.

“아뇨. 아버지. 도저히 그럴수는 없었어요.

혼자만 살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같이 가려고 했던건데,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너무 후회가 되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이제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돌아갈 수가 없어요.”

노인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길고도 먼 길.

아들의 말이 맞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죽음 문턱에서도 후회만 남기고 가는구나.

자. 가자. 너와 동무 삼아 걸을 만 한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걸어야지.”

둘은 무겁고도 힘든 걸음을 옮겼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