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끝자락에 걸쳐진 하늘은 그 이름만큼이나 차가운 눈송이를 흩뿌리고 있었다.

연말 분위기에 취한 대학생들이며, 차마 술에 취하지 못한 직장인들.

그리고 그냥 서로에게 취한 연인들마저 슬쩍 자리를 피한 카페.

남은 시간 제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나 같은 아르바이트생에겐

눈에 시선을 빼앗겨 감상에 젖는 일 따윈 없다.

다만 그럼에도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얇은 옷만 간신히 걸친 채 추위에 떨며 카페 앞 광장에 서 있는 여인 한 명이 신경 쓰여서였다.

눈이 올 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녀였지만

누군가 그녀를 데리러 오는 일은 본 적이 없다.

새벽녘이 되면 엄마 잃은 아기 새처럼 축 처진 채 터벅터벅 돌아갈 뿐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카페에서 시간을 때워도 괜찮을 텐데,

굳이 밖에서 기다리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그녀의 지독하게 허름한 옷차림이 보여주듯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킬 돈도,

그 한잔으로 몇 시간이나 뭉개고 있을 만한 염치도 없어서일 것이다.

그냥 그게 궁금할 뿐이라면 움직이지 않았겠지만,

그녀의 매력적이고도 안쓰러운 모습은 따뜻한 카페를 벗어나 말을 붙일 사유로 충분할 만큼 내 마음을 끌었다.

“저, 혹시….”

누군가 다가오자 기대감 어린 얼굴이었던 그녀는 금세 실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기다리던 이가 아니어서인 듯했다.

“네?”

“누굴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안으로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

어차피 손님도 없고. 또 밖이 너무 추우니까.

제가. 따뜻한 거 한잔 정도는 대접해 드릴 수 있어요.”

그녀는 주변을 흘끗거리며 눈치를 살폈지만,

그러기에는 눈발이 성난 가시처럼 휘몰아쳤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밝은 곳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한층 더 초라했으나, 그래서인지 내겐 더 아름다워 보였다.

“감사합니다.”

정성스레 내린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손을 녹이며 그녀는 연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누굴 기다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고 순순히 말해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실망스러움을 감추기는 힘들었다.

“아주 멋진 사람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없는 저를 너무너무 아껴주었죠.

잠깐이었지만, 정말 행복했어요.”

기운 없던 그녀의 눈에 잠시나마 생기가 돌았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났지만, 그이는 꼭 돌아올 거에요. 저랑 약속했으니까.

첫눈 오는 날 우리가 처음 만났던 여기로 돌아올 거라고 약속했으니까.”

“첫눈이요? 오늘은 첫눈이 아닌데요? 아마…. 세 번째나…. 네 번째 쯤….”

내 의문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네 번째요. 네.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이가 착각했을 수도 있잖아요.

어디 사는지는 모르지만 거긴 눈이 안 왔을 수도 있고….

사실 네 번째도 아니에요. 올해로 벌써 3년째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기다림은 좋은 결말이 기다리지 않을 거란 뜻이기도 했다.

“그…. 제가 감히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아닐 수도 있지만, 기다리시는 그분은….”

“무슨 말씀을 하실지 잘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거예요.

그이는 능력 있는 남자예요. 제가 비록 공장일을 하면서 비루하게 살고 있지만,

그이가 돌아오면 절 구원해 줄 거에요.

저 혼자선 이 비참한 삶을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절대 포기 안 해요. 저한텐 그거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겐 그녀를 나무랄 자격도 없고, 바보라고 몰아세울 자격도 없다.

그저 따뜻한 커피와 잠시 머물 자리 정도가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응원할게요. 그리고. 언제가 되었건 제가 있을 때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들어오세요.

제가 따뜻한 것 한잔 정도는 내어드릴 테니까.

그거 드시면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셔도 돼요.”

그녀는 염치없고 죄송하단 말을 잠시 웅얼거렸으나 차마 거절하진 못했다.

어쩌면 내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어 하는 그녀였기에

물어보면 곧바로 대답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안 그래도 차가운 이 공기를 더욱 떨어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평범한 일상의 대화로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데워 보기로 했다.

“아, 혹시 책 같은 건 좋아하세요?”

“네! 시립도서관에 자주 가서 빌려봐요!

가끔은 운 좋게 폐지 버리는 데서 책 무더기 발견하기도 하고요.

정말 가지고 싶었던 책을 주웠을 때 얼마나 기쁜지 눈물까지 났었다니까요?”

책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창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볼 정도로 흥분했다.

그리고 다행히 난 그녀와 책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을 만큼의 문학도였다.





새벽이 깊어지자 그녀의 마음이 데워지듯 성난 눈발도 시들어갔다.

한동안 밖을 보는 것도 잊고 나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몹시 아쉽다는 얼굴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오늘도 오지 않을 모양이네요.

눈도 그쳤고. 오늘은 오전 조 출근이라 집에 가서 잠깐이라도 눈 좀 붙여야겠어요.”

“아 잠시만요.”

마침 심심풀이용으로 가져온 책 두어 권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이에요. 빌려드릴게요.”

그녀는 이번에도 염치 때문에 주저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책을 받아들었다.

“다음 눈 올 때 꼭 돌려드릴게요!”

꾸벅 인사를 해 보인 뒤 카페를 나선 그녀에게. 눈 아니라 언제든 와도 좋다는 내 웅얼거림은 닿지 못했다.








이후 눈이 내리면 그녀는 수줍게 책을 안은 채 카페로 들어왔다.

난 커피를 내주었고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감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었다.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는 빈도가 줄어들수록 내 마음은 그녀에게 향했고,

돌아가는 그녀에게 또 다른 책들을 안겨주며 아쉬움을 달래었다.

언제든 와도 좋다는 말은 여전히 건네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면 간절한 그녀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였기도 했고,

눈 자체가 우리 관계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였기도 했다.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과 엮인 특별함을 잊을 정도로 더 현실적이고 가까운 특별함.

그것이 내게 기대감을 주었다.

우리가 함께하게 된다면. 우리가 연인이 된다면 어떨까?

아르바이트하며 학자금 대출이나 갚고 있는 내가

사정이 좋지 않은 그녀에게 백마탄 왕자님은 될 수는 없었다.

대신 둘이 함께 좋아하는 걸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미래를 준비할 수는 있다.

그 사실이 내게 적지 않은 용기를 가져다주었고,

마침내 그녀가 더는 눈이 내리는 밖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을 때,

난 그녀에게 말했다.

“그 남자. 오지 않을 거예요.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정말 오랜만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요.

당신을 사랑해 주었고, 힘들게 생활하는 당신을 구원해줄 사람이란 것도.

하지만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기다리는 건 그만 하세요.”

“그럴 수 없어요.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전 무너져 버릴 테니까.”

난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 능력 없는 사람이에요. 아마 그 남자보다 못났고 또 가난하죠.

제가 아무리 우겨도 당신의 구원이 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신 앞에 있잖아요.

제가 손을 잡아드릴 수 있어요.

눈 맞으면서 떠는 게 아니라 손을 녹이면서 책에 빠져들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도 힘겹게 살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둘이서라면 어떻게든 꾸려갈 수 있을 거예요.

화려한 데이트는 힘들겠지만,

같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날이 좋을 땐 산책을 하면서 책갈피로 쓰기 딱 좋은 단풍잎을 발견할지도 몰라요.

전 당신과 함께 하는 동안 힘을 얻겠죠.

난 못하지만, 당신은 제게 구원이 될 수 있어요.

아니.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도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꾸준히 돈을 모으면 둘이 같이 작은 헌책방을 열 수 있을 거예요.

부유하진 않지만, 행복하겠죠.

그런 삶을 살수도 있어요.”

그녀는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람을 잘 못 사귀었어요.

그나마 제게 다가온 친구가 있어서 최선을 다했는데,

그 친구한테 속아서 말도 안 되는 빚을 떠안았어요.

바보 같은 나 따위는 평생 가도 다 못 갚을 빚.

이 계절이 끝나면. 그러니까 봄이 오면 사채업자들이 절 찾을 거예요.

오래 기다렸으니 이번에야말로 돈을 갚으라면서.

전 갚지 못할 거고 그 사람들은 절 그냥 두지 않겠죠.

죽게 될지. 차라리 죽었으면 싶을 만큼 비참한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어요.

만약. 정말 만약 그 남자가 돌아온다면 절 구해주겠죠.

빚을 갚아주고 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해 줄 거예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도 절 위해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나요?

절 위해서 그 빚을 함께 떠안고,

비참함을 넘어 추악하게 살아도 행복할 거라 말씀하실 수 있나요?”

공기가 살을 베어낼 듯 차가워졌다.

난 그녀를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입은 얼어붙기라도 한 양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안고 있던 짐은 내 생각 이상으로 거대했고.

또 차갑고 날카로웠다.

눈보라 따위는 우습게 느껴질 만큼.

그리고 난 그녀처럼 그걸 다 맞고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주었지만 난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내가 아닌 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몸 녹이게 배려해주신 것도. 늘 따뜻한 거 내주신 것도.

책 빌려주신 것. 또 못난 저한테 마음 써주신 것까지.

하지만…. 당신은 절 구원하지 못해요.

반대로 저도 당신의 구원이 되지 못하고요.

지금 당신이 눈앞에 있어도 절 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니 전 차라리 올 리 없는 그 사람을 기다릴래요.

그 헛된 희망이 오히려 절 무너지지 않게 다잡아 줄 테니까.”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갔다.

난 떠나는 그녀에게 책을 안겨주기는커녕 감히 바라보지도 못했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땐 눈발이 점자 옅어지고 있었다.

올겨울 마지막 눈임을 말하고 싶은 듯 애처롭게.





봄이 되자 카페 사장은 가게를 내놓았고, 건강식품점이 들어서며 난 일자리를 잃었다.

학자금 대출을 갚고자 술집 서빙 일을 하게 된 후론 어떻게 계절이 바뀌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었다.

온갖 진상들에 시달리다가 해가 뜰 때 즈음에야 일이 끝나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상.

책을 읽을 시간도,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억지로 떠오르는 생각을 밀어 넣었는지도 모른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삼각김밥을 집어 들자니 밖에서 하얀 눈발이 날리는 것이 보였다.

첫눈. 벌써 첫눈 올 때가 되었던가?

그제야 억지로 외면했던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날 목메게 했지만,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그저 밖에서 내리는 눈이 나를 나무라고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너무 데워 눅눅해진 삼각김밥을 입에 밀어 넣을 뿐.

이거라도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낄 뿐.

앞으로도 난 언제까지고

눈이 오는 날. 눈이 오는 날만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죄인일 것이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