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콘솔 게임을 엄청나게 좋아하거든요?

꽤 오래 즐기고 있는 누아르 장르? 뭐 갱스터 게임 같은 게 있는데,

원래 범죄 저지르고 하는 그런 게임 이긴 하지만 전 좀 과격하게 놀게 되더라구요.

퀘스트며 미션이며 이런 거 다 무시하고

그냥 훔치고, 불태우고, 다 죽여 대는 그런 거 있잖아요.

막 NPC 캐릭터가 자기 자식 끌어안고 애만이라도 살려달라면서 빌면

전 주저하지도 않고 싹 다 죽여요.

아니지 가끔은 일부러 애만 죽여요.

그게 더 미친놈 같잖아요.

NPC가 막 오열하는 그런 거 보면 희열 같은 것도 느끼구요.

그리고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장르를 보면

누아르 아님 호러. 이쪽이에요.

그것도 슬래셔무비 같은 거 좋아하고

뭔가 꿈도 희망도 없는 그런 다크한 이야기들 주로 보거든요?

그냥 피가 튀기든 멘탈이 갈리든 하는 게 재미있더라구요.

뭐 여기까지 보면 제가 엄청 냉혈한에 사이코 기질 있는 놈 같잖아요?

근데 현실에선 전혀 그렇지가 않단 거죠.

실제로 뭐 폭력이나 피의 향연을 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죠. 좀 과할 정도로.

전 파리 한 마리 제대로 못 죽여요.

뭐랄까? 불쌍하다기보단 좀 그렇잖아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다는 게.

가상이라면 오히려 남들이 인상 찌푸릴 만한 잔혹한 얘기를 좋아하는데

현실 이야기는 누가 다치는 것도 못 견뎌 하는 거죠.

오히려 우리 가족들은 걱정해요.

남자가 좀 대범하고 강인한 게 있어야지 너무 물러터져서 못쓴다고.

뭐 저희 집안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드세고 거칠거든요.

저 혼자만 주워온 자식마냥 여리여리 그랬는데

저야 그냥 착하면 좋지 뭐. 하고 말았어요.

근데 한 일이 년쯤 전인가? 부터 조금 불안해 지더라구요.

제가 게임 얘기했었잖아요.

거리낌 없이 나쁜 짓 하고 남의 고통을 즐기는 그런 광인의 모습.

그런 모습이 사실은 진짜 내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아뇨. 특별히 현실에서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아니구요.

그렇잖아요.

게임 속 나와 현실의 내가 너무 극단적일 정도로 차이가 나니까

좀 그런 걱정을 하게 된 거에요.

현실의 나는 사회화를 거쳐 상식으로 봉인된 거고

아무런 거리낌 없는 게임 속 가상세계에서의 모습이 진짜 내 본성일지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본성을 계속 억누르고 있었다 생각하면

과할 정도로 맹탕인 제 성격도 설명 되구요.

그러니까 어떤 계기만 있으면 현실의 제가 미친 살인마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인 거죠.

그냥 좀 찌질한 망상일 수도 있어요.

근데 전 좀 무섭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진짜 착한 사람이 되려고 했어요.

봉사 같은 것도 나가보고. 종교도 가져보고.

원래도 화내고 욕하고 그런 편은 아니긴 한데 아예 근절시켜 버렸어요.

술도 끊어버리고요.

그러면 이제 사람이 안심되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언젠간 내가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내 본성이 깨어나서 끔찍한 짓거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게임도 끊고, 영화든 뭐든 잔혹하고 무서운 건 전부 다 멀리했어요.

대신 다큐멘터리 영화나 힐링 영화, 멜로 영화 같은 거만 죽어라 팠죠.

거의 억지로 보긴 했는데 끝까지 좋아지진 않더라구요.

아무튼 그렇게 수양 아닌 수양을 하다 보니까 은근히 스트레스가 쌓여요.

좋아하는 취미 생활 못 하고, 뭔가 억지로 착한 사람이 되려다 보니까

이게 쉽지가 않은 거에요.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은 일에도 막 화가 나고 짜증이 나기 시작하니까 이게 무서운 거야.

이제 내 본성이 깨어나는구나.

그래서 나쁜 생각 들수록 더 바른생활 사나이가 되고.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는 더 쌓여서 속은 뒤집히고 악순환인 거죠.

계속 그렇게 살다 보면 진짜 뭔 사고를 쳐도 쳤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저희 삼촌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데,

작년에 그 태풍 피해 있었을 때 일손 도우러 내려간 적이 있거든요?

거기서 며칠 먹고 자고 하면서 벼 일으켜 세우고 둑 쌓고 이런 작업 했는데,

저희 삼촌도 좀 뭐랄까?

상남자라고 해야 할지 좀 거칠고 투박한 분이었어요.

다혈질이시기도 해서 뭐든 빨리 일처리가 안되면 버럭 화부터 내세요.

시골이라 쥐가 많을 거 아니에요.

삼촌네 집 그 창고 쪽에 큰 끈끈이 쥐덫이 있는데

거기에 생쥐들이 잔뜩 들러붙어서 죽어가는 거에요.

그거만 해도 끔찍한데 삼촌은 그거 편하게 처리하신다면서

토치 가져와서 그냥 덫째로 쥐를 태워버리시더라구요.

와. 진짜 그거 끔찍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도망 나왔어요.

두더지며 드렁허리며 논밭 망치는 것들은 그냥 주저 없이 삽으로 발로 으깨버리기도 하시고.

전 그걸 못 보는 거에요.

아무리 유해조수고 뭐고 간에 아예 멘탈이 받아들이질 못해요.

한번은 막 새벽녘에 술 냄새를 풍기시면서 절 막 깨우시더라구요.

왜 그러시냐 했더니

덫에 고라니가 걸려서 잡았다고 그놈 파묻으러 가야 된대요.

아무튼 전 잠결에 어어 하고 따라 나갔죠.

나가니까 피투성이가 된 쌀 포대가 딱 있는 거에요.

그거 보니까 뭔가 찜찜하고 기분이 확 나쁘대요.

아무튼 삼촌이랑 그 포대 트럭에 가져다 싣고 저 동네 외곽 쪽에 가서 삽질했어요.

졸려 죽겠지. 땅 파는 건 힘들지 기분은 별로지.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삼촌은 대충하시는 분이 아니라

진짜 완전 깊게 팔 때까지 쉬지도 못 하게 하셨어요.

그 와중에 고라니가 안 죽었는지 슬슬 자루가 움찔거리니까

삼촌은 그냥 번개처럼 가서 삽으로 후려치시더라구요.

퍽! 소리 나면서 고라니가 악! 하고 우는데.

와 고라니 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거든요?

진짜 사람이 비명 지르는 거랑 똑같아요.

이게 한 번에 안 죽으니까 삽에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패는데.

와 진짜 그때 그거 보면서 느낀 충격은….

삼촌은 저보고 멍청하게 있지 말고 빨리 옮겨라. 그러셔서

마지못해 자루 끌어 내리는데 그거 있죠?

살아있는 거 잡으면 느껴지는 온기.

그게 자루 너머로 느껴지니까 막 미치는 거예요.

토할 거 같고.

어찌어찌 구덩이 안에 넣고 묻어버리고 나니까 진이 다 빠져요.

집에 돌아가서 씻고 누워도 잠도 안 오고.

간신히 몇 술 뜬 아침밥도 다 토하고.

그때 제대로 느낀 거죠.

그래. 나 따위는 그냥 허약하고 담약한 청년이구나.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난 진짜 파리 하나 못죽이는 사람이구나.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맘이 편해요.

그래서 게임도 다시 시작하고 공포영화도 맘껏 봤죠.

그렇게 내 맘대로 하니까 이제 다시 평안해진 거예요.

오히려 그전보다 더 차분해지고 억지로 꾸민 착함이 아니라

그냥 성향 자체가 더 유해졌다고 해야 되나?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걱정 안 하기로 했어요.

전 완전한 정상인 맞더라구요.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