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엘... 같이 가 달라고요?"

"네."

참으로 뜬금없는 부탁이다. 나는 잠깐 속으로 절기나 명절 따위를 헤아려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알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녀의 설명은 장황했다. 타지에 나와 오래 살다보니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시다, 더구나 옛날 같으면 진작에 시집을 갔어도 두 번은 갔을 나이에 혼자라니 안심이 안되신단다, 그래서 일단 현재 사귀고 있는 사람이나마 소개시켜드리려 했다던가. 그리고 그 소개시켜드리려던 현재 남자친구가, 바로 그 폭력남이었던 것이다.

"이제와서 헤어졌다고 말씀드리면, 정말로 속상해하실 것 같아서요. 부끄럽게도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달리 부탁드릴만한 사람도..."

결국 나는 그저 그러마고 대답하고 말았다. 솔직히 웃기는 노릇이긴 했다. 평소엔 한 달을 못가 남자를 바꾸는 일도 드물지 않던 사람이 남친 대행을 해달라니. 물론 그 소리가 기어코 입에서 나오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내가 갖고 있던 관심과 의문이 원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조금 더 정희를 알고 싶었다.

그녀의 고향은 난약이라고 했다. 생전 듣도보도 못한 지명이었다. 정희의 말로는 도무지 유명해질 구석이 없는 시골 오지라던가. 네비에 주소를 찍어보니 검색 시간이 한참 걸리는 게, 여간 한미한 시골인가 싶었다. 그리고 과연 예상은 벗어나질 않아서, 아침 나절 출발한 차는 굽이굽이 국도를 헤메이다 저녁 나절이 다 되어서야 멈추었다.

"여기인... 가요?"

"네."

마침내 도착한 고향 앞에서, 정희는 어쩐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이상이라는 기분이었다. 뜨문뜨문 어깨를 기대고 선 마을엔 작은 밭 몇 뙤기, 혹은 슬레이트로 지붕을 댄 구식 가옥이 간신히 집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석면 문제로 난리가 난 게 언제인데, 요즘 세상에 슬레이트 지붕이라니? 처음엔 혹시 개발제한 구역에라도 걸쳐져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더구나 입구 아래로는 아스팔트조차 깔려있지 않아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결국 달리 들고 온 짐도 없겠다, 정희와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마을 입구에 댄 차에서 내렸다.

마을 안쪽으로 향하는 내내 정희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단단하고 창백한. 본인 말로는 오랜만이라고 하는데, 반가워하는 기색도 그리운 표정도 없었다. 멀미라도 왔냐며 농을 걸어 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기, 혹시라도 말이에요."

"네?"

"혹시라도 우리 부모님이 뭘 캐묻거나 하면, 굳이 자세하게는 대답하지 말아요."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지난 번처럼, 여전히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로. 결국 나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적당히 눈이나 굴리는 수 밖엔 없었다. 그러나 시간때우기로 시작한 구경에서, 곧 나는 마을의 풍경에 뭔가 미묘한 어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하지만 분명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그런 분위기. 나조차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뭔가가...

"다 왔어요."

앞장서서 걷던 정희가 몸을 멈춰세우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상념에 빠져있던 머리를 간신히 멈춰세워야만 했다. 그녀가 멈춰선 곳은 파란색 페인트 칠이 되어있는 대문 앞이었다. 최근에 칠을 새로 했는 지, 짙은 파란색이 햇빛을 받아 거의 번쩍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희는 내 옷깃을 좀 가다듬어주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대문을 열었다.

"오오라, 정희 왔구나."

"우리 딸, 왔니?"

야트막한 평상에 앉아있던 노부부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아마도 아버지쯤 되보이는 분이 달려와 정희를 끌어안았고, 어머니로 보이는 분은 말로 인사를 건네곤 내게 고개를 숙이셨다. 엉겁결에 마주 인사하고 나자, 어느샌가 다가온 아버지가 내게 악수를 내밀고 계셨다.

"자네가 정희 남자친구구먼! 이야, 반갑네, 반가워."

"아, 예, 예에. 처음 뵙겠습니다. 민 현도라고 합니다."

"그래그래, 어서들 들어와요."

마치 그림으로 그린 시골집 같은 풍경이었다.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곧 큰 상이 나왔고 기다렸다는 듯 근사한 만찬이 차려진다. 덕분에 나는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수저를 뜨는 꼴이 되었다. 음식은 정갈하고 맛이 있었다. 약간 간이 모자란 듯한 슴슴한 맛이었지만 하나같이 적잖은 품이 들어간 것이 여간 혀가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정희의 두 부모님들은 끊임없이 음식을 권하고 또 먹이시는 통에 나는 거의 세 공기 가까운 밥을 다 비우고서야 수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혀는 즐거웠다, 혀는. 하지만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등줄기를 자극하던 기시감은, 오히려 집에 들어온 이래 더 강렬하게 나를 쪼아대고 있었다. 오랜기간 집을 비웠다 돌아온 딸의 얼굴에 몇 개나 되는 반창고가 붙어있는 이유를 한 번도 묻지 않을 수가 있나? 내 얼굴도 아직 다 낫질 않아서 엉망진창인데, 거기에 관해서도 궁금한 기색이 없었다. 더구나 부모라는 사람들은 물론 인자하고 다정한 얼굴이었지만, 정희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거의 남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치 연극 대본처럼 들어와 반겨준 일도, 이렇게나 많은 만찬이 순식간애 차려진 것도, 하나같이 정상적인 범주에서 보기에 미묘한 이질감을 풀풀 풍겼다.

그제야 나는 마을에 들어서서 느낀 미묘한 어색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은 10월, 한창 추수철이 다가오는 시기인 것이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몇 개나 되는 논과 밭에 금색 파도가 치는 것을 보았으니 분명하다. 하지만 마을에 널린 논과 밭에 종자가 심겨진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행여나 내 생각이 들킬까 마냥 즐거운 듯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식은땀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이상한 장소였다.

"어디, 식사가 입에 맞았을 지 모르겠어. 우리 딸 사윗감이라니까 우리 마누라가 아주 신이 나서는."

"어휴, 너무 맛있더라고요. 배가 부른데도 한참을 더 먹었네요."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리며, 아버지 쪽이 말을 걸어왔다. 영리하지 못한 듯 둔하고 푸근한 이미지지만, 방금 전까지 하던 생각 탓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걸 막느라 애를 먹었다. 그의 질문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어디 사느냐, 고향은 어디냐, 형제는 있느냐 등등. 대개는 그리 시답잖은 내용이라 하마터면 사실대로 답할 뻔 한 것을 참는다. 마을의 분위기와 주변의 기이함, 그리고 정희가 했던 말. '혹시라도 우리 부모님이 뭘 캐묻거나 하면, 굳이 자세하게는 대답하지 말아요.'

"아이 참, 아빠도. 벌써부터 그런 걸 캐묻고 그러면 어떡해요.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체하겠어요."

"아아... 그래, 응."

보다못한 정희가 나서서 그를 붙잡고서야 질문공세가 멎었다. 그처럼 살가운 말투로 말하는 정희는 적지않은 시간동안 함께 일했음에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마치 딸의 애교에 흐뭇하다는 듯 아비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그 뒤의 살풍경한 침묵. 내게는 정희의 시랍처럼 굳은 흰 얼굴과, 그 아버지의 뒤통수만이 보인다. 서로 손을 붙들고 있는데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고요한 방 속에서 설거지 소리만이 귀에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화라도 할 겸 산책을 하고 오겠노라 말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이상을 눈치챘다는 기미를 들키면 영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홀로 밖으로 나오자 이상한 기분은 더욱 심해졌다. 점점 이 마을이 무언가 정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들판마다 빈 논과 밭은 그러려니 하더라도, 어딘가에 분명 있음직한 짐승의 기척이 아무데도 없었다. 소 까지는 아니더라도 들고양이나 기르는 개 한 두 마리는 있을 법 한데도. 더욱이 이상한 것은 차량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포장 도로에 끌고 오기 싫어 주변에 차를 댈 때, 주변에 차가 한대라도 있었던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을 내부에도 차량이라고는 한 대도 없는 것이다. 근처에 상가나 백화점, 하다못해 아울렛 하나 없는 마을이다. 다시말해 온갖 모종이며 철물, 하다못해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선 가까운 도시까지 가야한다는 뜻이다. 시골생활의 필수품 하면 가장 먼저 차를 떠올리는 것은 그런 이유다. 버스마저 두 세 시간에 한 번 오는 오지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기동력은 충분해야 하니까. 그런데 집집마다 한 대씩 구비하고 있지는 못할 망정 차가 단 하나도 없다니.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생활감이 없는 마을.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그리고 그 때.

"...외투 받고, 쭉 앞으로 걸어요."

정희였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나타난 그녀는, 내가 집에 벗어두고 왔던 겉옷을 건네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굳이 사정을 캐묻는 대신 그녀의 말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둘러싼 산 때문에 그새 어둠이 사위를 잠식하고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농작로 사이를 걸으면서, 정희는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시골의 흔한 개 짖는 소리 한 번 없이 벌레 우는 찌르르 소리만이 뒤를 배웅하고 있었다.

"...여기, 도대체 뭐하는 곳입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한 게 한 두 군데가 아니에요. 하나같이 누가 시골 흉내만 내 놓은 것 처럼..."

"쉿, 조용히!"

마을 입구에 다다라 말을 건 내게, 돌아온 것은 목덜미를 짓누르는 손이었다. 그리 강하지 않은 압력, 그러나 그 손에 맺힌 차가운 땀이 내 오금을 풀었다. 나는 허물어지듯이 입구 근처에 있던 바위 뒤켠에 주저 앉았다. 짧은 침묵.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내 뒷덜미를 누르던 손은 이제 매달리듯 목깃을 붙들고 있었다. 정희의 하얗게 질린 표정이 입을 막는다. 입모양만이 간신히, 제발, 이라고 말한다.

"어디 갔어?"

"어디? 어디야?"

낯익은 목소리. 정희 아버지의 목소리다. 그러나 순간 그 익숙한 목소리가 정희의 손 보다도 더 축축하게 내 등을 적신 이유는, 그것이 제법 거리를 둔 여러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마치 메아리처럼, 똑같은 목소리 여럿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와 마주치고 있는 정희의 눈이 파르르 떨리다 질끈 감긴다. 주변은 그새 내려앉은 어둠으로 윤곽조차 희미하다. 어디? 어디야? 어디에 있어? 정희를 따라, 나도 눈을 힘껏 감았다.

아마도 5분, 혹은 그 이상. 한참이나 우리 주변을 배회하던 목소리들은 곧 멀어진다. 애원하듯 목깃을 붙잡고 있던 손이 간신히 떨어져나간다.

"가서 시동 걸어요. 출발해야 해요."

나는 홀린 듯 입도 열지 못하고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차 키를 꺼내고, 시동을 거는 동안 내 손에서 몇 번이나 열쇠가 헛돌았다. 캄캄한 물 속에 잠긴 듯 손도, 옷도, 이마도 차갑고 축축했다. 마침내 키가 돌아가고, 전구 네 칸짜리 실내등이 번쩍 빛을 뿜었다. 마치 등에 채찍을 맞은 것 처럼 나는 놀라 펄쩍 뛰었다.

"출발해요!"

정희의 비명같은 목소리와 함께 나는 힘껏 액셀을 밟는다. 고무가 미끌리는 섬뜩한 마찰음과 함께 차가 폭죽처럼 내달렸다. 네비를 볼 새도 없이, 그저 국도 방향쪽으로 차를 대 놓았었다는 사실 하나에 가슴 깊이 감사한다. 바퀴 아래로 포장 덜된 길 위의 돌들이 바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괴롭혔다.

마침내 국도에 올라타고,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정면의 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행여나 눈길만이라도 줬다간 라이트가 비추지 않는 길가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내 옆자리에 앉아 계속해서 뒤를 바라보고 있는 정희 때문에. 그녀는 수시로 뒤를 돌아보고, 백미러를 흘끔거리고, 종내는 아예 몸을 돌려 차의 뒷창을 노려본다. 마치 내가 알 수 없는,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에 의해 쫓기고 있는 것 처럼. 그것이 내 다리를 힘껏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차는 한참을 내달렸다. 마침내 정희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쉰 것은, 난약으로부터 30km이상 떨어진 작은 휴게소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밤의 새벽 속에서 불꺼진 휴게소의 주차장은, 평소라면 으스스하다고 생각할 만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지만 적어도 아까의 마을보다야 훨씬 안심이 되었다. 드문드문 세워진 차 속에는 장거리 운전 끝에 실신하듯 잠자는 운전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에서 내려, 전조등 아래로 벌레가 우글거리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 물을 목이 다 젖도록 얼굴에 끼얹고 나서야 짜르르 피가 도는 기분이 느껴졌다. 한참동안, 양 손으로 입가에 대고는 숨을 골랐다. 입에서 뿜어지는 더운 숨은 방금 전까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내가 헐떡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간신히 화장실 밖을 나서자, 나와 별달리 차이도 없이 희게 질린 정희의 얼굴이 보였다. 벌레가 우글거리는 탓에 수시로 모양이 변하는 전조등 불빛 아래에서, 정희는 또 울고 있었다. 나는 비척거리는 그녀를 데리고 차로 돌아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정희는 내내 울었고 나는 시트를 젖힌 운전석에서 잠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먼데서부터 동이 터 올 무렵 즈음이었다.

"...미안해요. 언젠가 꼭 설명할게요. 머지 않아서."

그녀를 어떻게 다시 돌려보냈던가, 나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던가,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빙글빙글 챗바퀴를 도는 악몽 속에서 남은 주말이 다 지나도록 꿈을 꾸었다. 형체 없는 어둠이 내 발목을 잡아 자꾸만 뒤로 끌어당기는 꿈이었다.

나는 그 뒤로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일체의 흥미가 사라져버린 내 태도에 간혹 동기가 말을 붙였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희는 어쩌다 마주치면 유별나게 내게 죄스러워하고 있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것을 달래줄 만한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내가 아는 분명한 단 한가지 사실은, 그 마을이 대단히 위험했고 그녀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 일로부터 몇 주쯤 뒤, 퇴근시간 그녀가 갑작스레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희는 마치 다 털어낸 것 처럼 말간, 그러나 여전히 희고 혈색없는 얼굴로 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알고 지낸 이후로 참 험한 일 많았지요. 사정도 모르고 나쁜 일을 겪게 해 미안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부디 다 잊고, 행복하시길."

정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자그마한 꾸러미를 내밀었다. 종이로 감싼 조그마한 꾸러미 속에서는 지난 비오던 날, 그녀에게 돌려주었던 비단 향낭의 냄새가 풍겼다. 문을 열어 사라지는 정희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종이뭉치를 열어보지 못했다. 그날 밤의 기억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밤을 거의 다 지새고 나서야 꾸러미를 열어본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동안 품고 있던 의문 때문이었다. 정희가 말한 '설명'이 그 안에 들어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풀어본 꾸러미 속에 든 것은, 예상대로 그날의 비단 주머니와, 곱게 접힌 편지지 몇 장이었다.

[제가 이렇듯 몰라도 좋을 사정을 전하는 것은, 현도 씨가 그저 모른다는 사실 하나로 괴로와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내용을 읽어버리고 난 후엔, 부디 전부 잊어주세요.]

받는 이름도 전하는 인사도 없이 시작된 편지를 읽고, 나는 다급하게 차의 시동을 걸었다. 몇 달 전 데려다 주었던 그녀의 집 주소가 간신히 남아있었다. 익숙치 않은 도로를 따라 달리는 내내, 편지의 내용물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어디서 부터 설명해야 좋을까요. 아마도 당신의 첫 질문 부터 대답하는 것이 순서상 옳겠지요. 현도 씨의 첫 질문이 아마도, 왜 그런 남자들을 만나느냐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것은 분명 제가 지난 몇 달간 여러 남자들을 바꾸어 만났던 사실까지 이미 알고 계시다는 거겠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염치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데려갈 이가 가능하면 나쁜 사람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염치였고, 부끄러움의 문제였으며, 스스로에게 주는 필요 최저한의 면죄부였습니다.

아마 현도 씨도 나의 고향이라 말했던 난약이 결코 평범한 마을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짐작할 줄로 압니다. 나의 부모라던 인물들이, 마을의 풍경이, 그 속의 곳곳이 기이했음을 아실 테지요. 그 모든 것들이 마치 꾸며낸 듯 이상했을 테니까요.]

미친 듯 액셀을 밟아 도착한 곳에, 그러나 정희는 없었다. 좁고 작은 방은 문이 활짝 열린 채였다. 깨져나간 세간 살이와 널부러진 짐들, 깜빡거리는 형광등 만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직 문을 열고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중년 여성이 깜짝 놀라며 일어나 내게 인사했다.

"저기, 혹시 저 앞의 집 말입니다. 저기 살던 여자, 어디 갔나요?"

"어느 집 말씀이세요? ...아, 저 집. 저 집 여자라면 남자친구랑 아까 차 타고 어디 가던데?"

여자는 아직 졸린 지 때끈한 눈으로 답했다. 저토록 난장판이 났음에도 졸음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정희가 사라진 것이 생각보다도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남자친구라면..."

"동거 중이던 남자친구요. 동네 유명한 개망나니인데, 어쩌다 그런 놈을 만났는 지. 얼마 전엔 경찰서에 붙들려 갔던 놈이 돌아오자마자 아주 난리를 피웠거든요. 아까도 새벽시간인데 여자앨 마당에 데려다 놓고 아주 두들겨 패더라고요. 신고가 어쩌구, 그 놈팽이가 어쩌구 하면서요. 어디로 갔는 지는, 저도 모르겠고."

나는 직감적으로 내 몸뚱이를 두들기던 남자를 기억해낸다. 정희가 몇 달간 고르고 골라 만난, 아마도 최악의 사내. 웅얼거리듯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고, 나는 서둘러 다시 차에 올라탔다. 네비게이션의 기록을 뒤져 몇 시간 동안 내달렸던 그 길을 찾아낸다. 차가 둔중한 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실제로도 그 마을은 전부 꾸며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사실 난약이라는 건, 그 마을이 아니라 어느 괴물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괴물의 크기는 시오리 하고도 반. 땅 속에 살며 아가리를 지면에 내밀어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누군들 그런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에 발을 디딜까 우스워하실 지도 모르지만, 놀랍게도 난약이 주기적으로 땅 위에 입을 벌리는 동안 제법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곳에 발을 디디곤 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선망한 것이 아니라, 난약의 사냥방식 탓입니다.

난약에게는 여러 능력이 있는데, 그 중 첫째 가는 것이 바로 모습을 바꾸는 둔갑술입니다. 제 겉모습을 바꾸어 당대의 마을처럼 꾸밉니다. 혓바닥으로 논과 밭을, 이빨과 천장을 건물과 울타리로 바꾸지요. 그리하여 겉으로 보기엔 마치 사람도 짐승도 없는 마을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그 뿐이라면 그리 여러 사람이 잡아먹힐 까닭이 없을 터, 난약의 꾀는 거기에 그치질 않습니다. 난약의 가장 흉악한 비술이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제 놈이 이전에 잡아먹었던 사람의 혼백을 제 뜻대로 조종하는 것이지요. 죽어서도 괴물의 뱃속에 갖혀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는 혼백에 제 살점을 먹여 사람의 형상을 갖춥니다. 아름다운 형태를 빚고 어여쁘게 꾸며 밖으로 내보내지요. 이를테면 미끼입니다. 미끼를 따라 제 아가리 속으로 들어온 사람을 잡아먹는 게지요. 아마도 현도 씨는 깊은 바다속에 사는 초롱아귀를 아실런지요. 난약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배를 불립니다.

예, 제가 바로 난약의 미끼입니다. 전대에 잡아먹혀 그 뱃속을 떠돌던 혼이고, 그의 주술에 사로잡혀 사람을 이끌고 괴물의 뱃속으로 인도하는 초롱입니다. 제가 나쁜 사람을 골라 사귀는 것을 염치라 말한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가능하면, 죽어도 좋을 악한을 데려가는 것이 저의 마음을 덜 아프게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참 웃기는 일이지요. 어차피 사람을 죽여 괴물을 먹이는 주제에 염치를 운운하다니.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죽어도 좋을 사람 같은 것은 없고,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저 죄책감을 덜기 위한 헛수작질 이라는 것을. 이 모든 일이 지옥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제가 당신을 데리고 잠시나마 그 지옥으로 데려갔던 것은, 물론 괴물로부터 먹이를 가져오라 채근당한 것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제 추악한 욕망 탓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내게 유일하게 댓가 없는 후의를 베풀어준 사람을 데려간다면. 그러면 적어도 난약이 다시 지상에 아가리를 벌리기까지의 기나긴 시간 동안, 조금은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그러나 나는 그러면 안됐습니다. 당신같은 사람을 난약의 뱃속으로 이끈다면, 그것은 그나마도 나를 사람으로 여기게 하는 최후의 양심을 부술 테니까요. 그 후에 남는 것은, 주제도 정도도 모른 채 난약의 뜻대로 선량한 사람들을 이끌어 지옥으로 인도하는 마귀 뿐이겠지요.

나로 인해 당신이 겪어야 했던 모든 나쁜 일들을, 깊이 사죄합니다. 그 밤의 공포와, 번민과, 겁에 질려 토해냈을 모든 숨에 엎드립니다. 부디 잊어주세요. 다만 운이 나빠 잠시 이상한 일에 휘말렸을 뿐이라고, 그렇게 여겨 주십시오. 나 같은 자에게도 베풀어주셨던 친절만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동봉한 향낭은, 아직 제가 사람이었을 적에 아끼던 물건입니다. 제게 남은 유일한 사람의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현도 씨, 당신이 부디 행복하시길 빕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 종료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러나 내 시선은, 네비게이션이 아니라 창 밖으로 향해 있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멀쩡한 마을이 세워져 있던 그곳은 허허벌판으로 변해있었다. 풀 한포기 없이, 도려낸 듯 동그란 황무지는 어찌보면 거대한 동물의 아가리 처럼 보였다. 깜빡거리는 전조등 아래로,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귓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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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약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하셨을 지도 모르지만, 옛 홍콩영화 천녀유혼의 오마주 였습니다. 즐겁게 읽으셨는지요.

이후의 글들은 이제 브릿G에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행여나 생각나시거든 한 번 들러주세요. 그럼 좋은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