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소문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에 무슨 이유인 지 함부로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는 편. 그뿐이라면 그냥 요즘 흔한 젊은이려니, 하련만 내가 말한 소문은 다른 것이다.

"지난 번에 홍대에서..."

"아니 그렇게 안봤는데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상사가 권하는 회식은 죽어라 빠지면서, 게다가 회사에선 남들에게 먼저 말 붙이는 일 없는 소심한 사람 연기를 하더니 주말마다 클럽에 발도장을 찍더라. 게다가 어울리는 면면이 하나같이 척 보기에도 썩 변변한 인물은 아니라던가. 여직원들 사이에 흔한 알력인가 했지만, 그 소문이라는 것은 의외로 꽤나 유명한 것이었다.

"정희 씨? 아아, 인사팀 함 정희? 야야, 관둬라, 관둬. 예쁘장하고 얌전해보여서 딱 니가 좋아할 타입이긴 한데, 사람 겉만 보고는 모르는 거더라."

친한 옆 부서의 동기가 해준 말이었다.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말이면 주말마다 대학가며 유흥가를 전전하는 그가 한 두 번 마주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 뿐이면 어련할까마는, 볼때마다 곁에 선 남자가 다르더라나. 게다가 회사에서의 소문이 틀리지 않은 듯, 매번 더 불량하고 험악해보이는 남자로 바뀌더란다. 동기는 본인도 썩 깨끗한 사생활을 유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소릴 지어내서 할 인물은 아니었다. 나는 그 즈음해서 관심을 가지던 마음을 거의 포기하게 되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창 비가 오는 장마철의 일이었다. 뒤늦게 야근을 마치고 불꺼진 회사 로비를 나오던 무렵,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무려 조그마한 비단 주머니였다. 설이나 추석 근처에나 볼 법한 작고 색이 고운 복주머니 같은 것이, 로비 입구에 떨어져 있던 것이다. 들어올리자 마자 은은한 분내 같은 것이 풍기는 게 향낭인 듯 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요즘 세상에, 향수도 아니고 향낭? 그것도 비단으로 만든? 근처에 민속촌이라도 들어섰나? 나는 그 기이한 유실물 자체보다도, 그 유실물의 주인이 더 궁금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야 할 텐데... 데스크 직원은 이미 퇴근, 그렇다고 주인이 찾으러 오기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두자니 새어들어오는 비를 맞을 것 같아서, 나는 별 수 없이 그 비단향낭을 챙겨들고 퇴근하기로 결심했다. 천근만근 쳐지는 몸을 추스르며 지하철로 향하기를 아마도 10분 여. 집에 도착하거든 먹을 저녁 찬거리를 골몰하며 걷고 있던 나는, 반대편에서 이상한 인영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정희였다.

그녀는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자그마한 우산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허리를 굽혀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천둥도 드물잖게 치는 폭우 속에서 그런 꼴이니, 이미 우산은 안쓰니만 못했으리라. 옷은 다 젖고 빳빳하게 빗어넘긴 머리가 흐트러져 한 눈에 알아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뭘 찾고 있나?'

정희는 거의 10미터 앞까지 접근했음에도 나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열렬히 주변을 탐색 중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폭우에 가려서 흐릿하던 얼굴이 비와 땀에 젖어 창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호감이 있었다고는 해도 정희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말 몇 마디 붙여본 적도 적던 나는 순간 갈등했다. 모른 척 지나치자니 양심이 아프고 돕자니 삭신이 쑤셨다. 밤 늦도록 서류를 쳐낸 까닭에 전신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런데 순간, 낯 익은 향이 비를 뚫고 코에 와 닿았다. 향낭의 그것과 같은 냄새였다.

"저, 저기... 정희 씨?"

무척이나 놀란 듯 소스라쳐 허리를 펴는 그녀. 나는 행여나 오해를 살까 싶어 황급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기억할 지는 모르지만 같은 회사 사람이고, 몇 번 대화한 적도 있음을 열심히 어필했다. 그제야 흔들리던 정희의 검은 눈동자가 얌전히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목례만 까딱 하고 인사치레를 마친 그녀는 곧바로 또다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것이다. 우산으로 가리지 못한 옷이 순식간에 비에 젖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가방에 넣어두었던 비단 향낭을 꺼냈다.

"혹시 이거 찾으시는 거에요?"

용케도 내 말을 알아들은 창백한 얼굴이 고개를 돌려 내 손을 향했다. 순간 석고로 빚은 조각상에 회칠이라도 한 듯 창백하고 무표정하던 정희의 얼굴에 색이 돌아왔다. 스케치 위에 수채화를 그리듯 발간 활기가 퍼져나가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놀랄 정도로 빠르게 내게 다가온 그녀가 양손으로 향낭을 붙잡았다. 나는 불쑥 다가온 정희와, 흔들린 향낭 속에서 솟구친 이름 모를 단내에 놀라 주춤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드물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마친 그녀가 비단주머니를 가지고 사라질 때 까지,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꽃이 피는 것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기분이었다. 우울하고 무표정하던 얼굴이 단지 조금 웃은 것 뿐인데, 백랍같던 얼굴이 약간 붉었을 뿐인데. 가까이서 본 정희의 얼굴은 그날 저녁이 다 가도록 머리 속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나는 그때부터 시들어가던 관심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 전까지는 팔레트 사이에서 스치는 얼굴을 시선으로 쫓거나,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비오는 날 이후로 나는 그녀 자신에 대해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정희는 정말이지 외톨이 그 자체였다. 업무 시간에야 얼굴 볼 일 없어 잘 모르겠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거의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항상 혼자 있었다. 식사는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구내식당 구석에서 처리했고 무리에 끼는 일은 일절 없음. 정말로 주변 동료들과 전혀 섞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행여나 몇몇 직원이 말을 걸어오면 냉담하다기보다 쩔쩔 매는 듯한 느낌으로 대화가 끊어지기 일쑤였다.

보면 볼 수록 나는 정희가 정말로 소문의 그 사람인 지 믿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도도하거나 쌀쌀맞은 게 아니라 놀라울 만큼 인간관계에 서투를 뿐이었다. 저런 사람에게 유흥가를 전전하는 헤픈 여자라는 소문이 어떻게 붙었는 지조차 이해가 안될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심심하다는 핑계로 옆 부서 동기의 유흥행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술도 시끄러운 음악도 싫어 쉬는 날이면 집에 박혀있던 내게는 유일하게 단서를 잡을 수 있는 연줄이었다.

"야, 야. 저기 봐라."

그리고 정말로, 정희가 있었다.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네온 사인 아래에, 그것도 껄렁해보이는 남자의 어깨에 안겨서. 그것은 퍽 이상한 광경이었다. 평소 보던 모습과 달라 느끼는 괴리감이 아니었다. 마치 백화점의 주류코너에 잘못 진열된 우유팩처럼, 그녀 자신이 거기와 어울리고 있지 않았다. 정희의 표정을 바라본 나는 그녀 자신이 조금도 즐거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안겨있는 사내의 무리는 쉴새 없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웃고 떠들었지만, 정희는 플라스틱 모형물 처럼 입만 간신히 웃고 있을 뿐 말은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동기의 술자리를 따라다니며 몇 번이나 정희를 볼 수 있었다. 소문처럼 그녀는 수시로 곁에 있는 남자가 바뀌었고, 바뀐 남자는 반드시 전보다 월등히 못한 수준이었다. 처음엔 그래도 좀 껄렁거리는 정도였다면 날이 갈 수록 더 험상궂고 불량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플라스틱 모형 같은 얼굴로 웃는 시늉만 할 뿐이었디. 동기는 실망했냐며, 자기가 소개팅이라도 주선해주겠다며 내게 말을 붙였지만 난 실망한 게 아니라 궁금해졌다. 매번 남자가 바뀌는 걸 보니 억지로 묶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종의 화류계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나쁜 남자가 취향이라는 사람도 더러 있더라마는 정작 본인이 전혀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왜? 왜 그런 일을 하는 걸까?

물론 내 궁금증이 풀릴 수는 없다. 당장 타인에게 그의 뒷소문을 운운하는 것 부터가 에러인데다, 표정이 좋지 않더라느니 하는 식으로 얘길 했다간 스토커로 낙인 찍혀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내가 듣는 쪽이라도 소름이 돋을 상황인 것이다. 결국 나는 그 뒤로도 한동안 그저 속으로만 이런 저런 궁리를 끼워맞춰보며 의문을 삭힐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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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오늘 전체 회식이라는데?"

"아으... 딱 질색인데. 열외는 없대?"

"본부장이 단합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관혼상제 아니면 어림도 없겠더라, 야."

나는 동기의 대답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술이라고는 질색인 나에게 심지어 조직 상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란 고문 잔치나 다름없었다. 남들은 조직문화 개선이니 무슨 운동이니 하며 자유참여 회식이 기본이라는데, 우리 회사에도 문명화의 빛이 오긴 할런지.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는 것이 절로 두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시계를 흘깃 보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희 씨. 나도 지금까지는 다 이해해줬잖아. 근데 이렇게까지 빼려고만 들면 나 너무 섭섭하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혼자 너무 겉돌잖아."

문득, 짜증 섞인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자 파레트 너머로 한껏 성질을 내고 있는 인사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는, 평소처럼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희. 아마도 이번에도 회식을 빠지려다가 된통 걸려든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와 비슷한 시기에 회사에 들어와 벌써 반년 째.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뭐 부어라 마셔라 술 권하는 것도 아닌데, 진짜 좀 나와주라. 나 매번 눈치 보게 할 거야?"

"...네, 죄송해요. 참석하겠습니다."

정희는 기어코 꼬장을 부리기 시작한 인사팀장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제야 좀 기분이 풀린 듯 말을 주워섬기기 시작한 인사팀장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인상을 찌푸리곤 콧김을 흥 내뿜었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까지 참석하게 만든 회식이 무슨 재미가 있다는 건지. 역시나 예상대로 회식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마지막 양심인 지 술을 강권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마냥 날 위한 배려는 아닐 테지.

"예에, 부장님. 들어 가세요~"

아니나 다를까, 내 역할은 결국 운전기사였다. 다른 부서 차장이 끌고 온 중형 승합차에 온갖 주소지의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지나치게 거리가 멀거나 방향이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여덟 명 가까운 사람들을 집까지 마중한 것이다. 내일 아침 차를 반납할 생각까지 하니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 뜻밖인 건, 뒷좌석 맨 구석자리에 앉은 정희였다. 아마도 중간 즈음 빠져나갈 계획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인사팀장이 기회다 싶었는 지 기어코 회식자리의 마지막까지 그녀를 붙잡아 앉혀놓고는 버틴 듯 했다. 그렇잖아도 창백한 얼굴이 병원부터 가야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핏기가 가셔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나를 제외한 모든 윗직급들을 내려준 후에야 간신히 말을 붙였다.

"저기, 어디로 가세요?"

"아, 저, 신한은행 XX지점이요. ...지난 번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정희는 말을 마치고는 숨듯이 좌석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겸양을 떨 겨를도 없었다. 조금은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뭐. 기억해준 것만 해도 어딘가. 나는 굳이 말을 더 붙이는 대신 픽 웃고는 네비게이션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악셀을 밟았다. 안내음성이 인도하는 길은 점점 더 도시의 외곽으로 빠졌다. 드문드문 가로등 사이에 이가 빠진 곳이 보이고 도로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솔직히 말하면, 여자 혼자 살만한 동네는 절대로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갈 수록 험해지는 분위기에 차라리 집 바로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정희는 거절했다. 결국 처음 그녀가 말한 위치에 내려주는 수 밖에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마친 그녀가 골목길 안쪽으로 총총 사라져간다. 솔직히 말해 굉장히 불안했지만, 내가 따라가는 건 더더욱 언어도단이었다. 씁쓸한 마음에 나는 잠시 차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꺄아악!"

평소에는 들어볼 일 없는 하이톤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정희의 목소리였다. 나는 불이 붙지도 않은 장초를 내던지고 뛰었다. 그녀가 들어선 골목길 안쪽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팔목을 붙잡힌 채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여성, 아마도 정희인듯 한 실루엣과 거한의 모습. 얼굴을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눈에 익었다. 술자리에서 정희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이 씨벌년이, 내가 일찍일찍 다니라 했어, 안했어? 너 또 어디서 술 마시다 왔냐? 엉? 또 언 놈한테 꼬리치고 다니는 건데!"

남자가 씹어뱉는 험한 말에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자켓 안쪽의 핸드폰으로 112를 눌렀다. 그러나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는 것도 잠시, 그새 사내는 정희의 머리채를 붙잡아 일으키려 들고 있었고 도저히 그것이 부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나는 전화를 연결상태로 둔 채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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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경찰은 금방 도착했다. 심지어 전화를 제대로 걸고 내용을 전달한 것도 아닌데, 거의 5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어쩌면 내 전화는 금방 끊겼고 그 소란 탓에 다른 누군가가 신고한 걸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나는 간신히 사지가 노곤하도록 얻어터지는 선에서 그칠 수 있었다. 기세를 몰아 달려들긴 했어도 덩치와 힘의 차이가 완연하다. 어디 부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정희는 날 때리려드는 남자친구를 적극적으로 말렸다. 팔에, 몸에 깍지를 껴 가며 분투하는 모습은 평소 모습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늠름함이 있었으나 상대가 나빴다. 덕분에 그녀도 경찰이 도착할 때 쯔음엔 이마와 팔뚝, 무릎에서 피를 흘리는 꼴이었다. 더더욱 우스웠던 점은, 막상 경찰이 도착하자 정희는 이번엔 남자친구의 역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내 입장에선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상황이었다.

물론 단순한 오해니 뭐니 해도 진작에 얼굴이 부어 터지고 이가 깨진 나와, 남자친구에게 휘말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터진 정희를 보면 상황은 일목요연했다. 정희의 묘하게 열정적인 강변이 안타깝게도, 사내는 폭행죄 현행범으로 구속되어 사라졌다. 골목길 너머로 사라지는 남자친구를 보며, 정희는 한동안 말없이 고개를 돌린 채 침묵했다. 뭐라도 말을 붙여볼까, 뭐라고 해야할까. 그런 고민이 잠시 오고 가다가, 그만 뒀다. 천운으로 머리만 다치지 않았을 뿐 머리가 몽롱한 게 몸상태가 최악이었다. 나는 액정이 깨진 핸드폰을 간신히 두드려 내일 하루 급한 병가를 신청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상처 흉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내가 몸을 다 추스르기까지 내내 골목 너머 경찰차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던 정희는, 그제사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새 턱을 지나 목깃을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편을 들더니, 놀랍게도 울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좀 전까지 남자친구 편을 들어 무마하려던 입장이니 선뜻 뭐라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 심사가 뒤틀려서 인지 생각이 영 꼬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외투를 다시 걸치고는 세워둔 차를 향해 걸어갔다. 얻어터지느라 담배갑이 찢어졌지만, 용케 멀쩡한 것을 한 개비 입에 문다. 으휴, 나도 꼬락서니 참 예술이다.

"저, 저기..."

고개를 돌리자, 정희가 흰 비닐봉투를 내민다. 아마 급하게 근처 편의점을 뒤적거린 모양이었다. 진통제며 상처연고 따위가 몇개나 들어있었다. 나는 봉투보다도, 그걸 내미는 정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좀 아까까지 황망하던 얼굴은, 다시 평소처럼 창백하고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기어코 입을 열어 물었다.

"도대체, 왜 저런 남자들을 만나는 겁니까?"

정희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무지막지하게 무례하고 불쾌한 질문이라서, 나는 뺨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찔끔했다. 하지만 평소에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 아까 그녀의 태도를 더해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마당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내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붉게 부은 뺨 위로 흰 것이 흘렀다.

"으흐흑, 나도, 나도 지겨워요... 지겹다고요..."

슬프다기보다, 정희의 말마따나 지겹고 분해보였다. 한사코 목소리를 억눌러 우는 탓에 어깨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날 밤, 결국 사정은 듣지 못했다. 간신히 허름한 집 앞까지 그녀를 바래다주는 동안, 정희는 끝끝내 억누르듯 소리를 낮춰 울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정희는 지겹고 분하고 피로해보였고 도무지 뭘 더 캐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당일 병가라니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노발대발하던 부장은, 다다음날 출근한 내 몰골을 보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하루가 지나 좀 가라앉긴 했어도 풍선처럼 부푼 얼굴을 보곤 차마 욕이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날 이후로 변한 것이 있다면, 정희와 가끔 인사를 주고 받게 된 정도. 그나마도 서로 고개만 까딱 하는 정도지만, 제법 장족의 발전이었다. 오죽하면 옆 부서의 동기가 몇 번이나 무슨 일 있던 것 아니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나날들이 지나가던 와중에, 나는 정희로부터 기이한 부탁을 하나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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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