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가 아는 유일한 사후세계는 바로 작가의 사후세계야. 정확히는 작가의 지옥이지.

난 수많은 장르소설을 집필했어. 지성체의 뇌를 주식으로 삼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지. 그 때의 업보로 난 여태까지 대략 8만번쯤 뇌를 파먹혔어. 이보다 더 안좋은 소식은 내가 작품 내에 써서는 안될 말을 썼다는 거지.

'40억명의 영혼이 차갑고 딱딱한 추출포드에 갇혀 느리고 고통스럽게 말라비틀어져 갔다.'

이제 고작 8만번 지났으니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꼴을 당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래도 난 40억번 뇌를 추출당해야 하는 존재치고는 굉장히 정신적으로 건강한 편이야. 등장인물들이 행복하게 오래도록 사는 다른 작품들도 많이 썼거니와, 한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계속 그 작품에 머무는 게 아니거든. 담금질 같다고나 할까. 새드엔딩을 한 번 맞이하면 다른 작품으로 옮겨서 해피엔딩도 한 번 보는 식이지.

음,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작가의 사후세계라는 건 말이야. 자기가 집필했던 작품 속의 세계로 들어가서 등장인물들의 삶을 사는 거야. 그 '삶'이라는 건 작품 속 세계를 멀쩡히 돌아가게 하는데 필요한 인원 수만큼 존재해.

네 뇌가 슬슬 과부하되는 게 느껴진다. 지구 전체가 배경인 소설을 썼으면 70억의 인생을 다 살아야하는 건 맞아. 하지만 시간이라는 건 아무 의미도 없어. 일단 응애 하고 태어나는 순간 내가 사후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거든. 그 길고도 짧은 삶을 마치고 나서야 나한테는 진짜 삶, 작가로서의 삶이 있었다는 걸 자각하고, 여태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다 떠올리는 거지. 그리곤 '씨발! 이걸 또 해?'하는 심정으로 다음 여정으로 떠나는 거야.

상상해봐.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로 죽음을 맞이하고 나니까, 그 전에 내가 그 아들로서 엄마를 잃었던 게 떠오르는 거야. 그게 둘 다 나였던 거지.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엄마의 죽음을 강요한 악당도 나였다는 게 떠오른다고. 옘병, 얼마나 복잡한 심정인지.

아, 자꾸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리네. 내가 너한테 편지를 쓰는 이유가 있어. 난 이번 삶에서 굉장한 악당 역할이거든.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켜서 혼돈과 파괴, 망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인데, 다행히 작가였던 시절에 이 악당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그리 세세하게 정해두지 않았지.

물론 명색이 '악당'이니 난 사악해. 얼마나 악랄하고 독한 놈인지 작품 속에 들어와서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기억할 수 있어. '선천적으로 뒤틀린 인간 아닌 존재'라는 거지. 내가 생전에 묘사했던대로라면 말이야.

그리고 난 네 머릿속에 씨앗을 하나 심었어.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사실 별 대단한 것이 아니고, 그저 누군가의 배역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아니, 진실을 알려주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지. 네가 이 사실을 잘 받아들였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거 알아.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건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지. 그래도 어쩌겠어. 이게 사실인걸.

광고, 소설, 여행잡지, 그도 아니면 네가 관심 가지고 지켜보는 어떤 매체에서든 이글을 보게 되었을 거야. 플롯 상 넌 그래야 하거든. 처음에는 흥미로워하다가, 곧 불쾌감을 느낄 거고, 애써 말도 안되는 내용이라고 치부하며 잊어버리려고 하겠지. 그러면서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네 삶이라는 것에 사실 주체성은 없고 아득한 옛날에 누군가가 운명지어놓은 대로 움직일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그래도 '만약 사실이라면? 내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하고 오랫동안 고뇌할 거야.

그나마 위로가 될만한 말을 해주자면, 나는 너라는 거야. 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별 볼일 없는 삶을 살다가, 아니, 시나리오대로 작동하다가 스러져갈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난 너를 사랑해. 난 한 때 나였고, 앞으로 내가 될 모든 존재를 진심으로 연민하거든.

그리고 내가 경험한 바로, 인간들은 성공의 보상보다는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위험을 보고 일에 착수하는 경우가 많아.

그러니까...

아.

제기랄, 도저히 이것도 못 해먹겠네. 돌려말하는 것도 끝이야. 잘 들어.

넌 그 작품 주연이 아니야. 조연도 아니야. 중요한 캐릭터도 아니야. 엑스트라처럼 쓰고 버려질 존재들만 이 글을 읽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굳이 치열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그냥 있는 거 탕진하고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빨리 좀 죽어. 그래야 나도 너희로 사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을 거 아냐.

뭐, 물론 그것도 너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다만, 하나 알아두라고. 내가 처음에 뇌 파먹는 외계인이 어쩌구 저쩌구 한 데는 이유가 있단 말이지. 그리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난 인간들 집단 자살만 유발하면 다음 삶으로 떠날 수 있거든 그러니 제발 협조 좀 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