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 한 달 전 부산에 놀러갔다가 만난 외국인 관광객은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금발 벽안의 외국인 남성은 자기 국적을 밝히기를 꺼렸지만, 한국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해변을 내려다보며 이방인과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다. 그도 혼자 여행 중이었고, 동양사를 전공하고 있기에 한국에 방문하는 일이 잦다고 했다.

"아하, 그래서 그 답답한 군대에 갇히기 전에 바닷가를 구경하고 싶었던 거군요."

"그렇죠. 요즘은 휴대전화 반입도 된다고 하는데, 그래도 군대는 군대니까요."

"그래서 어떤가요? 여행은 만족스럽습니까?"

"음."

심란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친구도 없이 도망치듯 혼자 떠난 여행은 만족스러움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난 그 유쾌한 대화를 망치지 않기 위해 애써 웃었다. 다행히 화제는 곧 다른 것으로 옮겨갔다.

"이곳 남자들은 전부 군대에 가는 건가요?"

"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요. 정말 심한 장애가 있지 않고서야 징집해서 '사회복무요원'으로라도 써먹어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전쟁 중이니까요."

"역시 그렇군요."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외국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휴전의 의미와 남북 간 적대관계에 대해 설명해줄 참이었던 난 김이 새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 동양사를 전공한댔지. 그럼 이미 알만큼 알고 있는데 그냥 물어본 모양이다.

화제는 다시 내 미래의 군생활로 옮겨갔다.

"어차피 가야하는 거, 후방에서 미적거리기보다는 꼭 최전방에 배치받고 싶어요."

"최전방이요?"

"네, 적들이랑 바로 얼굴 마주볼 수 있는 곳이요."

"흠..."

"개새끼들, 다 죽여버려야 하는데."

씨발것들 때문에 내 20대의 15퍼센트가 군대에서 낭비되어야 한다니.

듣자하니, GOP의 초소에서는 망원경 같은 것으로 북한 너머를 관측할 수 있고, 아예 비무장 지대 안에 있는 GP에서는 아예 직접 북괴놈들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고 들었다. 어차피 가야하는 곳이고, 어딜 가든 좆같다면, 나와서 썰이라도 많이 풀 수 있는 최전방이 낫지 않을까? 혹시 교전 같은 게 일어나서 북괴놈 사살이라도 한다면 포상휴가 149박 150일 같은 걸 받을지도 모르고.

그래, 망상에 불과하지만, 이게 제일 좋은 시나리오다. 공군이야 내 스펙으로는 가지도 못할 거고, 해군은 배를 타야하니 제끼고, 해병대는... 거긴 논외로 치고.

"그럼, 평양이나 신의주 부근으로 배치받고 싶은 건가요?"

잠시 내 두뇌회전이 멈췄다.

뭐지? 이 사람, 자기가 와있는 곳이 남한인지 북한인지도 모르는 건가.

"아뇨, 북한 말구요. 전방이요. 최전방."

상대도 당황한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옛 북한 지역이 아니라면... 설마."

깨달음의 눈빛이 파란 눈동자에 어린 것은 몇 초 뒤였다. 남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지자 고개를 돌렸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분명... 배우긴 했습니다. 결사항전 끝에 결국 최후의 최후까지 몰렸을 때는 베이징이나 셴양 같은 상륙지점으로 직접 특전부대를 보내기도 했다고...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원 자원했다더니 사실이었군요."

이번에는 역으로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남성은 벤치에서 일어서더니 눈썹에 손날을 붙이며 내게 군대식 경례를 했다.

"단결. 인류를 위한 투쟁에 경의를.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악수까지 나누고 남자는 질문했다.

"근데 지금이 정확히 몇 년도인가요?"

"지, 지금요? 지금이면, 그게... 2023년인데요."

남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진지함과 무표정함은 다시 피어난 웃음기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23년이요? 그럼 아직 미합중국이 멸망하기도 전인데. 아하... 바꿔넣었나보네. 어쩐지. 아무리 후방이라도 30년대인데 너무 평화롭다 싶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남자는 유쾌하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즐기세요, 할 수 있을 때. 좋은 추억이 많을수록 힘든 시기에 인간성을 지키기 수월하니까요."

남자는 사라졌고,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