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어머니 아들 경욱이입니다.

진작에 인사드렸어야 하는데

그간 여러 가지로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다 보니 소식을 전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비록 못난 아들이지만 뒤늦게 찾아온 이 아들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니.

편하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올해로 스물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저를 가지셨을 때가 딱 열 여덟이셨으니

지금 제 나이의 어머니는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저를 키우고 계셨겠지요.

그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그때.

일찍이 남편을 여읜 아무런 연고도 없는 26살의 어머니께서

절 키우기 위해 대체 얼마만큼의 노고를 치르셨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이 기회를 빌어 어머님께 감사의 인사와 그간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이제 와서 꺼낼까 말까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만

그간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속에서 썩어 문드러진 이 이야기를

지금에라도 꺼내지 않으면 도저히 편치 않을 것 같아

어머님께서 속상해하실 걸 알면서도 이렇게 불효를 저지르려 합니다.

부디 못난 아들이 속 썩인다 생각지만 마시고 보듬어 주셨으면 합니다.



가난한 살림에 어머니께서 저 하나 가르치겠다고 백방으로 애를 쓰고 계실 때,

저 역시 저만의 처절하고도 괴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그걸 설명하고 이해시키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어렸고, 또 철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는 학교 안에서도 제 모습은 대번에 눈에 띄었습니다.

언제 감았는지도 모르는 떡진 머리에

콧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

옷은 며칠을 내리 입었는지 새카맣다 못해 번들거릴 지경이었으니까요.

저는 전혀 몰랐지만 퀴퀴한 냄새도 많이 났던 모양입니다.

무리도 아니지요.

여기저기 발품 팔아가며 일손을 돕고 삯을 받으시는 어머님은

제 곁에 붙어서 절 돌보실 여력이 없으실 테니까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이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지나가기만 하면 코를 틀어막거나

꼭 더러운 것이라도 본 양 얼굴을 찡그리기 일쑤였지요.

때문에 열심히 친구를 사귀려 해봐도 좀처럼 아이들 무리에 섞이지 못했습니다.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도 제가 다가가면 차가운 얼굴을 하며 말을 멈추었고

그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면 그제야 다시 분위기가 풀리곤 했습니다.

결국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하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외롭긴 했지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오기 전엔 아무도 없는 지하 단칸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그저 어머니께서 빨리 돌아오시길 기다리기만 했으니

그때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점심시간만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찐 감자 한 알이라도 챙겨올 수 있는 날조차 드문 그때,

밥때만 되면 슬쩍 사라져서 수돗물로 공복감을 채우고

혼자 아무도 없는 뒤뜰에서 서럽게 흐느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지요.

꼭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어머님을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어머님과 함께 큰집에서 진수성찬을 차려 먹는 모습도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몹시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아마 어딘가의 부녀회에서 학생들을 위해 커다란 수박을 잔뜩 보내 주신 날이 있었습니다.

차갑게 식혀진 수박은 먹음직스럽게 잘려, 한 사람당 두 조각씩 분배되었습니다.

전 그날 수박이란 것을 처음 먹어보았습니다.

시원하고 탁 터지는 과즙에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져나가는 그 맛.

그 첫입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달콤한 수박의 맛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었고,

과일을 먹어본 경험 자체가 적다 보니

수박의 껍질까지 남김없이 우적우적 먹어 치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걸 발견한 아이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신기해하는 부류도 있었고, 한심하게 보는 부류도 있었고,

불쌍하게 보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 반응만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몇몇 아이들이

자기가 먹다 남긴 수박 껍질을 제게 던져주면서 일은 커졌습니다.

모처럼 받는 관심과 처음 먹어보는 과일.

전 주저하면서도 책상에 던져진 수박 껍질을 집어 들고 우적우적 씹어 삼켰습니다.

두 개 세 개.

먹으면 먹을수록 책상엔 던져진 껍질이 늘어갔습니다.

비릿함이 몰려와 더 이상 못 먹게 되었을 때쯤엔

반 아이들 대부분의 수박 껍질을 책상에 놓인 채였습니다.

더 먹지도 차마 버리지도 못하던 저를, 종례하러 오던 선생님이 발견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은 단단히 화를 내시며 저 혼자만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비 없이 회초리를 드셨을 거라 생각해 볼 뿐입니다.

회초리가 제법 매서웠는지 다음날 아이들의 태도는 싸늘함을 넘어 경멸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괴롭힘이 시작되었습니다.

책상에 쓰레기를 쑤셔 넣고, 뒤에서 발을 걸고,

먹기 싫은 도시락 반찬이 있으면 한데 섞어 제 자리에 던져 놓는 게 일과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음에도 전 그냥 참았습니다.

선생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건 이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고

또 우리 형편에 전학을 가거나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알았으니까요.

아마 아이들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더 스스럼없이 그런 짓을 벌였을 겁니다.





학년이 올라가도,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시골 학교답게 반이 바뀌고 학교가 바뀌어도 대부분 비슷한 아이들이었으니

당연히 저에 대한 취급은 똑같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머리 큰 녀석들은 더 대범하고 악랄해졌습니다.

때리고, 차고, 욕하고, 둘러싸서 밟고, 또 욕하고, 괴롭히고.

눈치가 보이면 뒷산으로 끌려가서 또 맞고, 쓰러지고, 다시 밟히고.

반항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울분을 참지 못해 덤벼들었다가 심한 꼴을 몇 번이나 당한 기억이 있었으니

그저 웅크리고 울면서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길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너무도 힘들어서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죽으려고 마음먹고 옥상으로 올라갔다가도

어머님 생각에 울면서 다시 내려와야 했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나 하나 키우겠다고 죽어라 고생하시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호강시켜 드려야 하니 전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꾹 참고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1등은 아니더라도. 최고는 아니더라도.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교과서를 수십 수백 번 다시 들여다보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대학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냥 잘 배워서 어디든 써먹을 수 있는 곳에 취직하고,

서둘러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하던 날.

어머니의 그 자랑스러운 표정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의 졸업이라며 일도 빼시고

온 산을 헤매어 당신이 보기에 가장 예쁜 꽃들을 따서

신문지에 정성스레 포장해 가져오신 어머니.

이제 지옥 같은 시간도 끝났고 우리 어머니 호강 시켜드릴 일만 남았구나.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건 금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햇병아리에,

나름 열심히 했다 생각했지만, 기껏해야 시골 학교에서 어중간한 성적을 낸 제가

좋은 곳에 취직될 리 만무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이곳저곳 열심히 기웃거려 면접을 볼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면접 자리에서 전 제가 무언가 크게 결여되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괴롭힘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던 그때의 기억들.

그것들이 몸에 배었는지 사람 앞에 나서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고개도 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고배를 마시기 수 차례.

직장도 잡지 못하고 허송세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급해졌지만,

머릿속은 갈수록 피폐해졌습니다.

어떻게든 잘 견디고 있다 생각했던 학창 시절의 기억이

이리도 끈질기게 제 인생을 발목 잡을 거란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졸업 후 수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한 저는

그만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집안에 틀어박히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어머님은 그때의 절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못난 아들이라 한숨을 쉬셨을지

답답함에 눈물을 흘리셨을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한 번쯤 쓴소릴 하실 법도 하건만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셨습니다.

언제나처럼 밥을 차려 주시고 삯일을 하러 나가시는 어머님의 뒷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지만,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무서워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고 처절하게 공부하던,

수백 번 수천 번 다짐하고 약속했던 제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네. 사실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이건 그저 제가 못난 탓.

제가 너무 한심한 인간인 탓이겠지요.

전부가 제 탓입니다.

어머님이 밤을 새워가며 남의 일 하시던 것도.

과로로 쓰러지신 것도.

병원 문턱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신 것도.

전부 제 탓입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마음이 지치고, 슬픔에 지치고, 외로움에 지치고,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어머님이 떠나신 후 전 죄책감과 외로움에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못난 아들의 어리광 섞인 서툰 고해를 부디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더는 힘듭니다.

아득바득 버텨보지만 이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머님 곁으로 가려고 합니다.

저를 용서하신다면.

이 못난 아들의 어리광을 받아주신다면

다시 한번 어머니로서 절 안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님께 가는길이 고통스럽겠지만

어머님이 겪으셨던, 그리고 제가 겪었던 것들에 비하면 하잘 것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머니.

너무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를 뵈면 큰절을 하며 다시금 죄송하다 말씀드리며 용서를 빌겠습니다.

다시 만나는 그때까지 몸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어머니의 못난 아들 경욱이 드림.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