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학학학학학학..."
어느 대궐인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입술이 연신 달싹거렸다. 가슴팍에서 번져오는 붉은 기운은 하나의 물결이 되어 매끈한 턱을 적시고 있었다.
"학학학... 학학... 쿨럭..."
남자의 입에서도 붉은 기운이 터져나왔다. 처연한 눈빛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저 옷을 받드는 중이었는데... 난 왜... 이곳에 누워있는 거지. 춥다... 본능적으로 사타구니가 오그라들며 살을 쥐어짰으나 있을 것이 없는 곳에선 투명한 물만 나올 뿐이었다.
"하하하... 하하.."
어둠 한 켠에서 새어나온 것은 웃음소리였다. 번뜩이는 안광 속에 당황스러움이 읽어지나 싶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웃음소리의 주인은 화증이 내려감을 느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안면 근육을 들썩이며 내쉰 숨소리는 어느샌가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 숨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질기구나..."
"학... 학... ... 학..."
생명이 호흡을 쪼개며 꺼지고 있었다.
"빨리... 빨리 붓과 종이를 내오거라."
아무렇게나 흔든 손에 돌처럼 서있던 자들이 틀에서 깨어나 헐레벌떡 움직여 붓과 종이를 펼치고는 멀찌감치 떨어졌다. 안광의 주인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는 붓을 쥐었다.
"귀하다... 귀한 모습이야..."
붓을 적신 곳은 벼루가 아니었다. 검붉은 피가 끈적하게 종이를 가로질렀다.
적막해진 낙선당을 가득 채운 것은 종이를 긁는 붓소리 뿐이었다.
♬아니... 이 귀한 분 손에 칼이 왠 말인고.
그 칼로 사람을 치는 것은 또 무슨 말인고.
밤안개 짙게 끼고 아침 이슬 흠뻑 내리니.
시뻘건 피를 뒤짚어 쓴 용이 이슬로 비늘을 씻는구나♬
***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갔다. 왕세자가 긴장을 누그려뜨리기 위해 턱을 당기며 침을 삼켰다. 왕세자의 양손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뼈를 울리고 있었다.
또... 또... 화가 올라오는구나... 지난 번 차대에서는 괜찮았는데, 기가 격해져 가슴이 터질 것 같구나.
이 기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상（上）의 노여움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임금이 목을 긁으며 헛기침을 하자. 세자는 가다듬지 못한 호흡으로 차대를 시작했다.
"대... 대신들은 품달할 일들을 말해주시오."
영의정 김재로가 말했다.
"서쪽 바다에 외국배가 침입하여 약탈해 가는 근심으로 인하여 추포무사（追捕武士）를 창설하여 합이 6백 90인입니다. 그곳 주민과 힘을 합하여 방어하게 하였는데, 농사와 고기잡이도 폐하면서 포역과 신포를 더 받으니 백성들이 모두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정해진 수를 경감하고 역사를 헐하게 하소서."
빨리 답해야 한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느리게 답한다면 답답하다 혼날 것이고,
성에 조금이라도 차지 않은 답을 낸다면 공부가 게으르다고 혼날 것이었다.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문득 터져나온 말은.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가장 피해야 할 답이었다.
임금이 올커니 끼어들며 즉시 세자를 꾸짖었다.
"신하의 말에 생각도 없이 곧이 곧대로 그러라 하니. 이건 다 네가 편안함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초목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을진데, 어찌 학문에서 더 깊이 찾지 않는 것이냐. 만약 6백 90인을 편히 경감했다가 뒤늦게 일이 터져 다시 모은다면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지금 네가 했어야 하는 일은 영의정에게 더 자세히 물어 더 자세한 판단을 할 근거를 모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쯔쯔쯧.
"네가 바야흐로 대리 청정하여 팔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태평성대한 동산에서 놀게한다면 풍우의 기상이라 할만 하지만, 만약 내시와 더불어 후원에서 노닐면서 욕기라도 한다면 이는 걸주와 다름이 없다. 매사 이렇게 경솔하고 안이하게 처리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것이니 신중히 하고 신중히 하라."
세자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김상로가 임금께 눈빛으로 윤허를 받아 말했다.
"소강절의 시에 이르기를, '일할 때는 천균의 활을 단기는 것같이 하고, 연마할 때는 쇠를 백 번 단련하듯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활쏘는 자는 시위를 당길 때에 신중하게 살피지 않으면 안되고 대장장이는 주금할 때에 단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참으로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세자께오서 무슨 일이든 신중하게 살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새겨듣겠소."
세자는 속이 부글거렸다. 저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임금의 타박을 거들고 있었다. 망신이다. 망신이야.
차대가 끝나며 낙선당으로 돌아가는 세자의 등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손바닥에는 손톱이 파고든 자국이 벌겋게 자국을 내고 있었다.
***
뒤숭순한 소문이 궁궐 주변 민가에 퍼지고 있었다.
"잘린 팔 한 짝이 저고리를 곱게 입고, 그 짚신만드는 김씨 초가집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댜."
"내가 듣기로는 병조 옆 작은 골목 있잖은가. 거그서 발 달린 정강이가 글쎄 괭이 머리를 꽝꽝 찧고 있더라지 않은가. 떡판맹기로. 관리들이 소리에 놀라 나왔는디 벼룩마냥 지붕 위로 훌쩍 사라져 버렸다지..."
"산군이 입에 물고 흔든걸 사람들이 잘못 본 거라니께."
"무식한 놈아 산군이 한양에 나왔으면 착호갑사들이 벌씨 눈에 띄어겠지."
침을 튀기며 뱉어낸 것들은 하나같이 괴이한 이야기들 뿐. 잘려진 팔이 춤을 추고, 정강이가 흙바닥을 소리내 찧었다? 주막 한켠에서 국밥을 먹던 남자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저것은 6개월 전부터 들려오던 괴담이었다. 잘려진 신체 부위들이 거리 곳곳에서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육조거리 곳곳에서 발견되었다던 신체의 일부분이 사라져버린 시신... 그 일이 저렇게?'
국밥 뚝배기를 그릇 째 후루룩 마신 남자는 수염에 묻은 국물을 손으로 슥 닦아냈다. 이 덩치 큰 남자의 이름은 권문심（權問心）. 이황의 제자였던 권문하의 손자이다.
권문하는 숙종 8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과 예조, 병조 등에서 근무했는데, 불현듯 일을 그만두고 귀향했다. 이유인 즉슨 그의 부인이 조현병과 유사한 특이를 지닌 심질（心疾）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문하는 지극정성으로 부인을 돌보았고, 하늘도 감복했는지 부인의 병세는 완화되었다.
권문하는 부인을 간병하며 겪었던 일들을 자기 수양이라 생각하며 매일 기록했는데, 병증과 치료 과정을 매우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적어 놓았다. 권문하가 죽은 후 낱장으로 엮인 기록물을 필사하여 번듯한 책으로 만들어낸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손자인 권문심이었다. 이때 문심의 나이 아홉살이었다.
문심의 아버지 권솔은 그런 아들을 대견하게 생각하며 책의 첫 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도록 가르쳐서 아픈 이의 마음을 움직이지 말게 하여 위태할 때에도 진실로 큰 해가 없게 하고, 반드시 그 원하는 것을 곡진히 따르면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이 한낱 꿈은 아니니, 누군가 마음이 병든 이가 있다면 네 오롯한 마음이 도울 것이다.'
문심은 매우 영특해서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왕성했다. 아버지 역시 의 바람과 달리 벼슬엔 뜻이 없었다. 소년 문심이 가장 좋아했던 일은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만약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신이 난 얼굴로 싸움을 살피다가 가운데로 나아가 시시비비를 따져냈다. 잘못한 이는 곰살맞은 참견에 역정을 내려고 씩씩 대다가도 신기하게 문심의 말 몇 마디에 금새 화를 거두고 멎적게 웃음지으며 뒤돌아섰다.
할아버지가 남긴 책의 이름은
[무심결기（撫心潔記）].
마음을 어루만져 깨끗히 만든 기록이라는 뜻이었다.
문심은 친분이 있던 오작인 김도손에게 이미 이 괴이한 살인에 대해서는 전해 들었다.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춘 도손이 들려준 바.
발견된 시신의 수는 무려 10구.
"... 내 살면서 별별 시체들을 다 봤네만... 이렇게 기괴한 것은 처음이네."
신체의 큰 마디들이 하나씩 사라진 채였다고...
"여기, 여기, 손, 허벅지..."
"호환이던가."
"... 아냐..."
오작인 김도손의 얼굴에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차라리 인간의 피와 살맛을 본 호랑이였다면 착호갑사나 겸사복을 부르면 될 일. 하지만... 이건...
"... 잘려나간 부위가 참으로 예리했다네... 분명. 사람이 한 짓일세..."
끝.
현생도 바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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