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히 말씀하세요.”

긴 의자에 몸을 파묻듯 누워있는 내게 상담사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느긋해 보이는 그 말에 순간 분노가 일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었다.

차분히 생각한다면 특별히 그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그의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작부터 이렇다면 더 이야기해 봐야 치료될 리 없겠다 싶었지만,

나 역시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으니 한번 참아보기로 했다.

“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떻게 표현이 안 돼요. 가슴속에서 뭐가 응어리가 진 느낌이에요. 슬픈 거랑은 또 다른 감정인게.. 몸속에서 불이 난 것처럼 타들어 가는데... 무슨짓을 해도 해소가 안 돼요.”

우선 그렇게 입을 연 것까진 좋은데 다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이 보였는지 상담사라는 양반은 안경을 벗고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딴에는 인자한 미소였겠지만 지금 내 눈엔 그냥 가식적인 멍청이의 연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꼴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힘드시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고 또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쉽지 않다는 건 저도 알지만 이겨낼 수 있어요. 자, 심호흡 한번 하시고 제게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해한다고? 아니, 당신은 이해 못 해. 이해한다면 그런 식으로 입을 놀리지는 못하겠지.’

상담사의 말에 난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멍청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잊고 싶지 않은 사람.

하지만 기억할수록 내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사람.

결혼을 약속했던 내 애인의 모습이었다.

다시 몸속에서 뜨거운 불이 번져나감을 느끼며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얕은 신음을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이미 늦었다.

떠오른 기억은 내게 끔찍한 현실을 자각시키며 점차 온몸으로 흘러갔다.

옆에서 상담사가 내게 어디 불편하냐는 투의 이야기를 던진 듯하지만,

난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떠올랐던 그 기억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영사기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마치 수면 수백 미터 아래 심해에 가라앉는 듯 고통에 잠식당해 갔다.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 앞으로 일평생을 함께할 사람.

그 사람을 하루아침에 잃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난 가슴을 쥐어뜯던 손에 힘을 주고는 세차게 두드렸다.

내 속에서 퍼져나가는 그 불길을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었다.

그때 내 귓가에 상담사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전 이해 합니다.”

가슴속에 있던 뜨거운 것이 머리 위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분노. 저 멍청이의 헛소리 때문에 불길은 이제 머리를 통해 몸 밖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해해? 네가 뭘 알아!”

벽력같이 소리쳤지만, 상담사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꿋꿋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아뇨. 전 이해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이해 할 수 있어요.”

다시 한번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의 분노를 느끼며 소리치려는 순간,

상담사의 한마디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박혔다.

“저도 당신과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죠.”

그 말에 열이 식으며 머리가 차가워졌다.

상담사는 내가 진정하는 듯 보이자 잠시 기다려 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으니까요. 저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말이죠. 화재였습니다. 제 아내 그리고 너무도 소중한 두 딸의 새까만 시신을 보았을 때, 저도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겨냈지요. 그러니 제게 이야기해 보세요. 저도 당신의 마음을 아니까,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상담사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지지도, 슬픔에 파묻히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할 뿐.

예전엔 그의 몸속에서도 나와 같이 불길이 일었을 테지만 그는 잘 이겨낸 듯했다.

그 때문에 나도 조금은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내 가슴속 불길이 완전히 꺼지진 않았어도 조금 더 이해해볼 마음은 들었다.

난 가슴을 움켜쥐었던 손을 내리고 조금은 편안해진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결혼이 한 달도 안 남았었을 때였어요. 준비할 게 너무 많았죠. 저도 그렇고 와이프도 그렇고 정말 바빴어요. 그날 좀 먼 곳에 사는 녀석들에게 청첩장을 돌리러 갔다 오는 바람에 와이프 마중을 못 나갔어요. 와이프 직장이 걸어서 15분 거리라 뭐 별일 있겠냐 싶었죠. 가끔 혼자 왔다 갔다 했으니까. 근데 하필 그날 웬 미친놈이...”

새삼스러운 것도 없는 불길이 크게 일렁였지만,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상담사는 인자한 표정으로 내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아까와는 달리 그 얼굴이 내게 조금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어린놈이었는데 집을 나와서 돈이 필요했나 봐요. 와이프 핸드백을 뺏으려다가 자기 맘대로 안되니까 들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어요. 자기 말로는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데....... 전 못 믿겠어요.”

한번 입이 열리자 수많은 감정과 함께 폭포수처럼 속 이야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와이프는 30분 동안 쓰러져 있다가 죽었대요. 피를 흘리면서. 누가 도와주길 바라면서... 그때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지 전 상상이 안 돼요. 제가 절 얼마나 원망했는지 아세요? 그날 제가 데리러만 갔어도... 진짜 너무 화나고 와이프가 너무 불쌍해서 약이라도 먹고 죽어버리려고 했는데... 다 버리고 와이프 따라가려고 했는데. 병신같이 그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죽고 싶다고 한 주제에 정신 차리면 또 잠이나 처자있고..... 그러다가 입에 밥 쑤셔 넣으면서 그렇게 추하고 한심하게 살고 있다구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몸속에서 불이 나서 죽을 것 같은데, 숨도 못 쉴 정도로 아픈데 죽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다구요!”

북받쳐 오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제 와서 체면치레할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그냥 다 내려놓고 울어버리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아내분도 당신이 죽기를 원하지 않을 겁니다. 힘이 드시겠죠. 자신이 원망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이겨내실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이겨내실 수 있어요. 저만 믿으세요. 저 역시 죽고 싶었지만 이렇게 이겨내고 저와 같은 사람들을 돕고 있지요. 괜찮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모든 게 좋아질 겁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껏 많은 사람에게 들었던 뻔한 말이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사람이 한 말이라서 그럴까? 이 사람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말씀해 주세요. 마음속에 있는 말. 응어리진 마음을 모두 풀어야 하니까요. 제가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난 큰 위안을 느끼며 그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음이 훨씬 좋아졌다.




그날의 상담을 마치고 일주일 뒤 다시 그를 만났을 때는 더욱더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상처와 고통을 극복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대로라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고통스러울 정도로 뜨거웠던 가슴속 불덩이도 이제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상담이 있는 날.

이제는 기대감까지 품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그의 사무실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문득, 첫날 소리를 지른 것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은 게 기억이 났다.

약소하게나마 선물이라도 사 올까 하던 그때 방안에서 상담사의 통화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다니까. 아까 아침에도 우리 공주님이 일찍 오라고 얼마나 당부했는데. 오늘은 일찍 끝내고 들어갈 거니까 당신도 애들이랑 준비 잘해놓고 있어. 우리 첫째 딸 생일인데 대충 먹을 수야 있나........ 응? 상담? 오늘 하나 남았지...... 맞아 그 약혼자 죽었다는 사람....... 그래. 나도 알지. 그러니까 굳이 우리 가족까지 죽은 사람 만들면서 마음 열게 한 거야. 많이 좋아졌으니 걱정하지 마. 오늘은 그리 오래 안 걸릴 거야. 그래. 끝나고 전화할게.”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의 가족이 죽었다고 말하던 그의 담담한 표정.

그것은 불길을 이겨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로운 표정이었을 뿐.

그걸 알자 내 맘속은 불이 일다 못해 새까만 재가 되어버렸다.

불타오를 때는 온갖 감정이 넘실대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몸도 마음도 그저 새하얀 재만이 날리는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잠시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나는 천천히 일어나 아무런 표정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일찍 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신가요?”

상담사가 미소를 지으며 날 맞아주었지만, 그 얼굴은 내게 더는 위안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도, 배신감도 느낄 수 없었다.

허망함을 넘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창가로 다가갔다.

느낄 수 없기에 주저함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다.

상담사가 내 모습에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난 그대로 창문 아래로 몸을 던졌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