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비참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대로 내 인생은 비참했다.

살아갈 이유가 없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죽을 용기가 없어서 비참하다.

이렇게 추잡하게 사느니 그냥 죽으면 좋을 것을, 오늘 하루도 살겠다고 발버둥이다.

한숨을 쉬며 식탁을 닦고 있자니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잔뜩 긴장한 채 몸을 돌리며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버지.”

아버지는 ‘크흠’ 하며 인사를 받고는 내가 닦고 있던 테이블을 쓱 바라보았다.

검사를 하듯 손가락으로 슬쩍 쓸어보는 걸 숨죽이고 지켜보던 나는

아버지가 다시금 ‘크흠’ 소리를 내며 식탁에 앉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이 이런 긴장의 연속이다.

“밥은?”

“네! 바로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난 다급히 미리 준비해둔 아침 식사를 꺼내 놓았다.

밥은 고슬하게. 계란은 노른자까지 푹 익혀서.

국은 너무 뜨겁지 않게 하고, 김치는 두 종류 이상.

생선보단 고기 위주로.

난 머릿속으로 아버지 취향을 되새기며 다시금 확인 하고

한 발 떨어져 아버지가 수저를 드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입. 두 입.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려나 싶은 그 순간,

“하. 이 새끼가 이거 또 정신 못 차리네.”

억 하는 순간, 내 얼굴로 국그릇이 날아들었다.

“이딴 흙냄새 나는 구정물은 너나 처먹어.”

“죄…. 죄송합니다.”

아픈 머리를 감쌀 새도 없이 바닥에 엎어진 국그릇을 치웠다.

그나마 적당히 식혀놓은 덕에 화상을 입지는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열심히 바닥을 닦는 동안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제 할 일을 못 하면 그건 사람 새끼가 아니야.

저 마당에 있는 닭새끼 개새끼만도 못한 거라고.

짐승 새끼만도 못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아버지는 거칠게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사람 노릇 할 때까지 그냥 개 맞듯이 맞는 거야.”

이후로 끔찍한 고통이 한동안 이어졌다.

되는대로 싹싹 빌면서

‘죄송합니다. 잘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따위의 말을 한 것 같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매질이 멈추었구나 싶을 뿐이었다.

“며칠 내로 너희 엄마가 올라올 거다. 그전까지 집 정리 싹 해놓고 준비해.

이불도 전부 꺼내서 빨고.

먼지 한 톨이라도 남아있으면 쫄쫄 굶길 테니 그리 알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걸레를 집어 들고 바닥을 닦는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해서

쉴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온몸이 녹초가 된 채 쓰러지듯 내방 침대에 엎어졌다.

내일은 매 맞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다시금 비참함이 몰려왔지만 그런 와중에도 속절없이 잠이 쏟아진다.

눈을 감으니 조금씩 몽롱해지며 몸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티브이를 켜놓고 잠들었는지 먹먹하게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 가만히 잠에 빠져들었다.

[.... 사…. 랑…. 사랑…. 해요….]

얼핏 잠들었던 것 같은데 아침에 얻어맞은 상처가 욱신거리는 바람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 여전히 들려오는 티브이 소리.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니 혹시 티브이가 아니라 환청 같은 것일까?

멍한 상태에서 귀를 기울여 봤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 많이 사랑해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애절한 그 목소리에 울컥하며 눈물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 사랑한다 말해준 게 얼마 만일까?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짐승 취급을 받는 동안 사랑받는다는 감정을 아예 잃어버린 것 같았다.

환청인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도 모르게 그 말에 대답했다.

“저도…. 저도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사랑해줘서.”

방안에 달빛이 비치자 천장에 어떤 형체가 아른아른 떠오르는 게 보였다.

저것도 내 상상일까? 아니 뭐든 상관없었다.

이 비참함을 위로해주기만 한다면.

난 그 형체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다시금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진심으로. 너무너무 많이 사랑해요.”

머릿속을 울리듯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듣고 비로소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내가 정신이 나가서 머리가 돌아버린 게 아니라면,

이 목소리는 진짜다.

저 알 수 없는 형체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 사실은 소름이 돋으면서도 한편으론 말 못 할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난 다시금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사랑해요. 저도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그러니 같이 있어 주세요.

절 버리지 마세요. 제발. 절 사랑해주세요.”

역시나 머릿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사랑해요…. 아주 많이….]

밤새 속삭이다 어느 순간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아침 6시가 되자, 알람이 울린 것도 아닌데 발작을 하듯 잠이 깼다.

자칫 늦잠이라도 잤다간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맞을 테니 본능적으로 깨어난 것이다.

피곤함에 눈을 비빌 새도 없이 조용히 뛰어나가 식사 준비를 하고,

구석구석 닦아내기 시작했다.

여지없이 아버지가 일어났고, 긴장한 채 아침을 맞았고,

숟가락이 더럽다며 발길질을 당했다.

우습게도 어제만큼의 비참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밤새 마음의 위안을 받아서였을까?

어머니를 맞이하기 위해 대청소까지 전부 마친 뒤,

저녁 무렵 내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지난밤 있었던 일을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본 형체. 그리고 목소리.

그건 대체 뭐였을까?

조용히 방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바닥에 뭔가 어두운 형체가 뭉쳐있는 게 보인 그 순간,

[사랑해요….]

다시금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진심이에요.]

난 엎어지듯 바닥에 엎드려 그 형체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촉감은 없지만 무언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린다.

이제 확신할 수 있다.

난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이 형체는 날 사랑하고 있다.

“정말 절 사랑해요? 정말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로…. 진심으로…. 당신의…. 당신의 아내가 될게요.]

“저도 사랑해요. 정말 너무 사랑해요. 당신을 너무너무 많이 사랑해요.

고마워요…. 너무 고맙고 또 사랑해요….”

엉엉 울면서 미친 사람처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동안 울고 나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흐릿한 형체와 목소리.

굳이 머리를 쓰지 않아도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했다.

귀신.

죽은 자가 내 눈앞에 나타나 내게 고백을 했다.

믿기 힘들지만, 이것이 현실이었고

이 현실이 난 눈물 날 정도고 감사했다.

연애는커녕 감히 친구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내게

사랑하는 귀신이 생겼다.

귀신이라면 아버지가 빼앗지도, 방해하지도 못한다.

내 방에서 언제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도 정 힘들고 괴로우면?

그땐 진짜 용기를 내어 죽으면 된다.

이제 죽을 용기가 생겼다.

그녀가. 날 사랑해주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사랑해요.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바닥에 누워 형체가 있는 곳을 쓰다듬으며 행복하게 잠을 청했다.





다시 찾아온 아침이 무섭고 힘들지 않았다.

내겐 그녀가 있었으니까.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조금만 집중하면 방이 아닌 곳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냉장고 앞이나 창가, 하얀 커튼 앞에서 그녀는 나를 따라오듯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덕에 긴장하지도 않고 차분하게 식사를 준비했고,

정말 오랜만에 매를 맞지 않고 넘어갔다.

그녀가 내게 힘을 주고 있다. 용기를 주고 있다.

그 사실이 너무도 행복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야 좀 쓸 만해졌네.

너희 엄마 데려올 테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잘해.

너희 엄마 계란말이 좋아한다니까 해놓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다녀오세요. 아버지.”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그녀를 찾았다.

고개를 돌릴 것도 없이 검은 구름처럼 몽실하게 피어나는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랑해요….”

수줍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내가 다가가는 것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왜 그래요?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왜 도망가는 거예요?”

당황해서 손을 뻗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조금 이상하다.

검은 형체. 저건 나와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난 설마 하는 마음으로 왼쪽 눈을 감아보았다.

그녀가 사라졌다.

이번엔 오른쪽 눈을 감아보았다.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어?”

그제야 조금 어색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실제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눈에 맺힌 형상.

처음부터 그녀 따위는 없었다.

그저 피로와 스트레스로 생긴 비문증이었을 뿐.

그럼 그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그때 문을 열고 아버지가 돌아왔다.

“자. 네 어머니다. 인사드려.”

아버지는 나보다 고작 두세 살 많을 법한 예쁜 여성을 데리고 들어왔다.

여자는 공포에 질려 보였고, 피로에 절어 보였고, 또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 같았다.

“사랑해요…. 사랑…. 네. 사랑할게요…. 아내가 될게요….”

익숙한 목소리에 난 절망감마저 느끼며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분명히 이 사람도 며칠간 지하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 아버지에게 세뇌당했겠지.

‘넌. 내 아내야. 날 사랑해야지.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는 거야. 뭐라고? 그래. 날 사랑해야 해.’

넉 달 전. 내가 잡혀 와서 아들이라 세뇌당했던 것처럼.

새삼 아버지에 대한 공포가 커지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인사하라니까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 혼나고 싶어?”

난 화들짝 놀라며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아들이 인사드려요.”

어색한 내 인사에도 어머니는 전혀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해요…. 사랑할게요…. 제발…. 진심으로 당신 아내가 될게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아무래도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네 동생은 좀 나중에 데려올 거다. 경찰들 좀 조용해지면 찾아봐야지.

당분간은 엄마 잘 챙겨. 짐승새끼 마냥 멍청하게 그러지 말고.

혹시라도 또 도망갈라치면 그땐 진짜 다리 두 짝 다 부숴 놓을 테니 허튼짓하지 마.”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비참했다.

그야말로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멍청한 생각을 했다.

귀신이라니…. 귀신의 고백이라니.

비참하고 비참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 역시나 내 몸은 집안일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동생….”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미친 사이코 새끼….”

소심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아버지의…. 아니 이 정신 나간 놈의 가족 만들기 놀이는 대체 언제 끝날까?

동생 다음은 어느 노부부를 납치해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삼촌이나 이모도.

사람들이 늘어나면 난 좀 편해질 수 있을까? 차라리 죽는 게 편할까?

난 불안감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내게 더이상 죽을 용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