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수집가에요. 실화만 고집해 모읍니다.
지난 얘기 많이 읽어주셔서,
이번엔 전직 호텔리어였던 여성 P씨의 얘기를 가져왔어요.
 
이른바 ‘귀신’ 혹은 ‘혼’의 존재, 어디까지 긍정하시나요?

이번 얘기는 길어서 조금 지루할 수 있겠군요.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시면 또 가져오겠습니다.
 


————————————————————————

벌써 20여년이 흘렀네요.
제가 한 호텔체인점에서 근무했을 때 일입니다.
 
첫 직장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차.
신입티도 막 벗고 회사생활에 만족할 때였죠.
 
본사는 외국, 지점은 세계에 있었어요. 저도 당시 일본 중소도시 지점에서 근무했고요. 제법 알려진 곳이라 댓글추측 받을까봐 무섭긴 합니다; 호텔 측에서 괜히 명예훼손 같은 걸로 고소장 보낼까봐요. ㅎㅎ 그러니 수집가님께서 적당히 둥글려 주세요. 저에겐 참 신기했던 사례라 공유해보고 싶거든요. 벌써 옛날 얘기가 됐지만..
 




아무튼 저는 3교대 근무로 24시간 돌아가는 호텔 리셉션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베트남 지점에서 일했던 한 일본인 남성 동료가 저희 지점으로 오게 됐습니다. 오다기리 조를 닮았으니, 앞으로 이 사람을 오다기리상이라고 칭해보겠습니다.
 
오다기리상과 자정 너머 같이 리셉션을 지키는데, 이 분 행동거지가 자꾸 눈에 거슬리더군요.. 벨이 울리면 과하게 놀란다던가, 갑자기 홱 뒤 돌아본다던가,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손수건으로 목을 닦는 일이 많았습니다. 에어컨도 빵빵한데.
 
자꾸 그러니까 무섭더라고요. 왜 그러느냐 물었어요. 점차 안면이 트자 오다기리상이 입을 열었습니다.
 
“P상. 사실 저 다음 달에 퇴사합니다. 고향 돌아가 조금 쉴 참이에요.”
“네? 정말요? 왜 갑자기?”

여기부턴 오다기리상이 그날 저녁 맥주 한 잔 하며 말해준 얘기입니다.
 
“P상, 혹시 재작년에 회사 인트라넷에서 베트남 000지점 때문에 조금 시끌시끌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그 사건의 중심에 있던 두 명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그 때 인트라넷에 올라왔던 내용은 반은 거짓이에요. 사측에선 그런 실체 없는 소문이 좋을 게 없으니. 유야무야 마무리한 거죠. 사실은 말입니다···”
 
오다기리상이 계속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습니다.
 




오다기리상이 한때 머물렀던 베트남 000지점에서, 어느날부터 비슷한 민원이 종종 들어오기 시작했답니다.
‘어떤 남자가 자꾸 중얼중얼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겁니다.
 
저도 기억을 더듬어보니, 실제로 저희 사내 인트라넷에서 며칠 얘기가 돌았던 사건이었어요. 그 시기 거기서 근무했던 분이라면 어렴풋 기억나실 분도 계실 겁니다.
 
처음엔 한 객실에서 자정 무렵에, ‘옆 방 소음이 심하다’고 클레임이 왔답니다. 베트남어나 영어가 아닌 외국어인데, 마치 벽에 대고 주문을 외듯 쟁쟁거리는게 소름이 끼친다며.. 옆 방 체크 좀 해달라고 전화가 왔다는 거죠.
 
그래서 오다기리상이 그 옆 방을 체크해봤는데, 체크인이 안 된 빈 방이었습니다.
 
“P상. 저는 그 때 그만뒀어야 했어요. 모든 공포물의 시작이 원래 그렇잖아요?”
 
오다기리상이 애써 농담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비슷한 클레임이 다른 방에서도 한 주에 한 번씩은 오는데, 원인은 모르겠고···. 그저 어떤 설비 문제 아닐까 싶었던 거죠. 유독 날이 과하게 습하거나 비가 와서 불쾌지수가 좀 높아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클레임이 들어왔던 것도 같아서, 혹시 배수관 문제 아닐까 싶어 점검했던 날도 있었고요.”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가던 어느 날 밤.

며칠째 이어진 호우로 습도계 바늘이 max를 향해가고, 유독 무겁고 불쾌한 공기로 서로 땀만 연신 닦던 날이었습니다. 동료였던 베트남인 직원이 비품 체크 차 2층에 올라갔다가 벌벌 떨며 숨죽이고 내려오더랍니다. ‘복도 끝에 총을 든 군인이 우두커니 서 있더라, 한 눈에 봐도 뭔가 정상이 아니다’라며, 경찰에 신고하자는 겁니다.
 
오다기리상은, 말리는 동료를 뒤로 하고 위층으로 뛰어갔답니다. 여차하면 객실 사람들 대피도 시켜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때가 미국에선 911 테러가 터진 직후여서, 오다기리상은 이것도 어떤 테러 아닐까 했던 겁니다.
 

오다기리상이 위층에 막 도착하자 긴 복도 저어- 쪽 끝에 정말로 한 군인이 홀연히 서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냥 직감이었대요. 아. 이상하다.
 

“P상. 내가 확신하는데. 그건 온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냥 어떤 기운이었죠. 분명 내가 눈으로 본 것이지만, 봤다고 하기보다 느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정도로. 왜 그런지 도대체가 설명은 못하겠지만.”
 

오다기리 상은 얼어붙은 채 그 ‘기운’을 바라봤습니다. 무엇보다도 눅진한 공기를 채우는 한기에 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답니다.

“너무나 낡은 군복이었어요. 군데군데 찢긴 곳도 있고. 희한하게 마른 흙이 군화부터 군모까지 잔뜩 묻어 있고. 날은 눅눅한데, 그 건 마치 사막에 있는 무덤에서 땅을 파고 올라온 냥.. 얼굴은 잿빛에, 군모를 깊이 눌러 써 눈은 볼 수 없었고.” 그렇게 군인은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저 그림자마냥 서있더랍니다.
 
뭔가 홀린 기분이었답니다. 멍하니 보는데 그 기운에게서 고장 난 라디오처럼 쟁쟁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란 겁니다. 억양과 음색을 듣고 확신했데요. ‘한,한국어 같은데..’ 그래서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을 걸었다는 거죠. 서툰 한국어로. “...한국인입니까?”
 
그러자 그 군인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답니다. 눈이 마주치고, 자신을 가만히 보더래요.
 
“그 눈빛.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눈에서 한기와 공허와 살기 같은 게 뒤죽박죽 섞여서 고스란히 전해지더라고. 눈물이 나더라고.”
 
더 이상 공포를 이기지 못한 오다기리상은, 결국 악! 비명을 지르며 1층으로 내달렸죠. 다음날 아침이 되자 호텔이 뜬소문에 어수선했답니다.
 

그런데 당시 거기에 한국인 4인 가족이 머물고 있었다고 해요.

“노년의 부부와 딸과 사위로 보였어요. 머리가 하얀 7-80대 어르신과 선해 보이는 40대 사위가 같이 오더니, 그 군인에 대해 이것저것 내게 물어보더라고.”


오다기리상은 설명 끝에, 그 군인이 입을 움직여 쟁쟁거리던 소리를 흉내 냈답니다.
‘아으지데가거싣쓰니다. 아으어나가버거싣쓰니다. 아으지데가거싣쓰니다···’ 귀에 꽂혀버린 그 소리, 버석거리는 그 쟁쟁거림을 주의 깊게 들은 40대 사위가 아! 하며,
 
“이거 한국어로 ‘나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 나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아닐까요?” 하더래요. 이걸 영어로 해석해 뜻을 알려주더래요.
 
그러자 70대 어르신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생각에 잠기더래요. 그리고 예의를 갖춰 자신에게 부탁 하나를 하더랍니다.

“혹시 여기서 한국음식을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 군인을 어디서 봤습니까. 밤에 우리 좀 거기로 데려다 줄 수 있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이니.”



 
그리고 모두가 잠든 시각.
 
한인마트에서 음식을 조금 사온 어르신이 그 날, 복도 끝에 작은 제사상을 차리더라는 겁니다. “많이 욕 보셨소. 우리랑 집으로 돌아갑시다.” 참관하던 오다기리상과 파트너도 더 길게 묻지 않고, 같이 절을 올리고 말이죠.
 
오다기리상이 말을 이었어요.
 
“며칠 후 그 한국인 어르신이 체크하웃 하는 날이 왔어. 나에게 오더니 걱정 말라며 허허 웃으시더라고. 그 군인 우리가 잘 모시고 가겠다며.”
 
이후 소음민원이 싹 사라지고, 오다기리상과 파트너도 다시는 그 군인을 보는 일이 없었답니다.
 



이야기를 마친 오다기리상이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호텔에서 일하면 별별 기묘한 걸 겪잖아요? 이후 그 베트남 동료는 ‘우리가 옛날에 베트병 파병 나왔던 한국인 귀신을 본 것’이라 아주 확신을 하더군요. 그런데 난 아녜요. 누가 장난을 쳤거나, 그냥 우리가 버섯이나 마약 같은 환각 성분을 우연히 먹었거나, 기후 탓에 헛것을 보고 겪은 거라고 믿고 있거든요. 애써 말이죠. 그럼에도, 나는 그 기이한 군인과 눈이 마주친 이후 가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꾸 느껴지는 거에요. 그렇게 2년이나 버틴 겁니다.”
 
오다기리상은 움추린 채 목소리를 떨었습니다.
 
“무엇보다 말이지.. ‘아으지데가거싣쓰니다. 아으어나가버거싣쓰니다.’ 이 반복되던 마른 쟁쟁거림이 잘 때 마다 귀에 꽂힐 듯 들려. 누구한테도 정신병자 소리 들을까봐 말을 못했는데, 당신이 한국인이니까 말하는 겁니다.”
 
그 모든 얘기를 들은 P는 무섭기보다 너무나 슬펐다고 합니다.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다고 해요. 맥주도 한 잔 했겠다, 문득 집이 그립겠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