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하늘이다.’

지혁의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할머니께 손찌검할 때마다 입에 담던 말이다.

집에 빚을 주면 주었지 돈 한 푼 가져다주지 못한 그 노인네는

괄괄한 성격에 그 당시 기준으로도 과할 정도로 권위주의에 찌든 사람이었다.

때문에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셨을 때, 지혁을 포함한 가족들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기가 날아다니고 밥상이 엎어지던 지혁의 집은

한동안 전에 없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한동안이라고 한 것은 지혁의 집에 새로운 하늘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평소 입이 무거운데다 주변에서 심약해서 큰일이란 얘기까지 듣던 지혁의 아버지가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의 뒤를 잇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정도는 아니었지만, 달에 한두 번은 지혁이 엄마 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이웃들이 밖으로 나와 수군댈 정도로 언성을 높여댔다.

지혁이 성인이 될 때쯤,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지혁은 슬프지 않은 것을 넘어 아버지 영정 앞에서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을 정도였다.

쓰레기 같은 모습을 보인 할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변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지혁은 다짐했다.

자신만은 윗선에서 보여준 추악한 남자가 되지 않기로.

다짐이랄 것도 없이 자신은 자상한 사람이라 생각한 지혁이었지만 ,

그가 이변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좀 늦었….”

선아의 사과가 끝나기도 전에 지혁은 거칠게 선아의 뺨을 휘갈겼다.

“넌 내가 우습냐?”

지혁이 쏘아붙이자 선아는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뺨을 부여잡고 고개를 저었다.

“대답 똑바로 해.”

“아니. 아니야. 내가 미안해. 다음엔 안 늦을게….”

지혁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더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폭력성을 완전히 제어한 것은 아니었다.

“너 집에 가서 봐.”

선아는 덜덜 떨면서 지혁의 뒤를 따랐다.

데이트 시간에 5분 늦었단 사실 하나만으로 그날의 일정은 확실해졌다.

얼어붙은 분위기에서 간단히 밥을 먹은 다음,

함께 지혁의 집으로 가면 곧바로 매질이 시작된다.

실신할 때까지 휘둘리고 나면 선아는 그대로 방으로 끌려들어 가

지혁의 욕구까지 다 해소해 준 뒤,

너덜해진 옷을 주워입고는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하늘.”

지혁은 뒤따라오는 선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선아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엉망이 된 옷을 전부 벗어 던지고 거울 앞에 서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단정하게 정리했던 머리는 엉망으로 쥐어 뜯겨 있었고,

코와 입 주변엔 마른 핏자국이 눌어붙어 있었다.

몸 여기저기 성한 곳 없이 욱신거리는 꼴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누가 경찰에 신고 안 한 게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선아는 조심스레 터진 입술에 살짝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따끔한 통증이 목덜미를 짜르르 울리고 지나가자

눈물 몇 방울이 피딱지를 적시며 세면대로 떨어졌다.

“사랑해….”

선아는 거울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선아의 어머니는 마음 여린 분이었지만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는 못하셨다.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과격한 행동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덕에 선아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사랑이란 이름의 학대를 받았다.

혹여나 실수라도 한다 치면

밥을 굶기거나 어두운 옷장에 몇 시간씩 가둬두는 일도 흔했다.

체벌이 끝난 뒤엔 다정한 목소리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그 사랑이란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끌어안거나 멍이 들 정도로 꼬집고 때리는 행위였다.

때문에 선아의 애정관은 크게 비틀렸고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고통 없인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정스럽게 안아주는 남자. 듣기 좋은 말을 속삭이는 남자.

그런 남자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혁은 달랐다.





그날도 지혁의 집에선 거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짝! 짝!

선아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사정없이 따귀를 올려붙이던 지혁은 채 세대를 채우지 못하고 손을 멈추었다.

주저하던 손끝이 다시금 거칠게 휘둘러질 듯 높이 올라갔으나

채 목적을 다하지는 못하고 부들대며 떨구어졌다.

“나…. 나 못하겠어….”

지혁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다.

시뻘겋게 부어오른 볼을 쓰다듬으며 선아가 말했다.

“아니. 해야 해. 날 사랑하잖아?

넌 할 수 있어. 나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할 수 있어.

난 알아. 넌 하게 될 거야.”

잠시 어깨를 들썩이며 심호흡을 한 지혁은 조심스레 선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엉망이 된 얼굴의 선아의 눈을 마주한 순간,

조금씩 약해지던 지혁의 분노가 다시금 일렁였다.

“이 씨발년이!!”

거칠게 욕을 뱉어내며 휘두른 손바닥에 선아는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이 개년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죽어! 죽어 이 개년아!”

나 뒹굴고 있는 선아에게 지혁의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발길질은 선아가 실신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만. 그만하자. 이제 제발 그만하자.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선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지혁은 침대맡에 걸터앉아 울고 있었다.

선아는 지혁에게 다가가 뒤에서 꼭 안아주며 말했다.

“아니야. 자기는 정말 잘하고 있어.

날 이렇게 사랑해주잖아.

날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고 있잖아.

세상에서 딱 한 명.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난 처음 본 순간 바로 느꼈거든.

자기 마음속에 숨겨진 사랑.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진짜 사랑 말이야.”

지혁은 선아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더는 안돼. 내가 너무 괴로워.

이러면 안 되는데. 때리고 욕하는 건 안 되는 건데….”

선아는 웃으며 지혁의 앞에 서서는 억지로 지혁과 눈을 맞추었다.

그 순간 지혁의 마음속에 분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때? 느껴져? 자기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감정.

그게 진짜야. 다른 건 다 가짜지.

그러니까 참지 말고 보여줘.

죄책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어.

그게 진짜 사랑이라니까?”

그 말에 지혁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죄책감. 3대에 걸쳐 어떤 못된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지혁은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는 이를 보면 분노가 치솟는 증상을 겪었다.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탓에 욕설과 폭행은 예사였고

그 덕에 연인과 헤어지는 것은 물론 실형까지 살고 나와야 했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전철을 밟기 싫었던 지혁은 차라리 이성을 멀리하려 했지만

선아의 끈질긴 구애로 연인이 되었다.

선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지혁이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려 할 때,

선아는 오히려 지혁을 자극해 분노를 터트렸다.

그때마다 지혁은 괴로워하며 후회를 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선아의 눈을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힘들어할 필요 없어.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니까?

내가 나쁜 년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욕하고 때려야지.

안 그래? 자기는 날 사랑하니까 그래야 해.

알지? 자기는 하늘이야. 나만의 하늘.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

지혁은 다시금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

“그래. 우리 자기는 하늘이지. 그래서 난 너무 행복해.

행복해서 눈물이 나와. 행복해서 몸이 떨려.

자기가 때리고 목을 조르고 괴롭힐 때마다 행복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까 용서하지 말고 마음껏 화내고 마음껏 사랑해줘.”

지혁은 선아를 잡아 침대에 던지고는 그대로 목을 졸랐다.

자비 없이 힘을 주던 지혁은 선아의 눈에 핏줄이 터질 때에서야 힘이 풀렸다.

선아는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면서도 만족스럽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우리 자기 잘한다. 계속 이렇게만 사랑해줘.

자기의 사랑이 날 부술 때까지.

자기가 날 죽이면 진짜 사랑이 증명되는 거니까.”

“하늘…. 나는 하늘….”

지혁은 반쯤 광인이 된 듯 눈을 까뒤집으며 다시금 선아의 목을 졸랐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