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0원.
 
“와 진짜? 장난이지?”
 
통장에 남은 금액을 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난 현실을 부정하며 사용 내역을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치 이달 1일에 용돈 받았고.
 
고시원 방값 25만 원. 교재랑 인강비 15만 원.
 
식비랑 이거저거 합치면…. 이렇게 많이 썼다고?
 
미쳤네! 진짜….”
 
고시원 2년 차의 공무원 준비생.
 
4일은 지나야 용돈이 들어올 텐데 통장 잔고가 이 꼴이다.
 
집 눈치가 제법 매서워서 돈을 더 부쳐 달라고 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하루에 두 끼씩 4일이면 8끼인데 이걸 어떻게 하냐?”
 
매끼를 라면으로 버틴다면 그리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아니, 고시원에서 밥과 김치 정도는 제공하니 어찌 보면 그럭저럭 버틸 만한 정도는 된다.
 
하지만 이미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빈약한 식사를 해왔던 나로서는
 
남은 며칠을 후줄근하게 버틴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래. 이왕 이리된 거 맛난 거 하나 사 먹고 조금만 위안 삼자.”
 
남은 며칠을 대충 때우는 한이 있더라도 뭔가 맛있는 걸 입에 넣고 싶었기에
 
간단한 간식이라도 살 겸 편의점으로 향했다.
 
 
 
“뭐야, 왜 이리 비싸?”
 
시원하게 쓰자 마음먹고 당당히 들어온 편의점이었지만
 
과자나 아이스크림 따위의 가격을 보고는 순식간에 소심해졌다.
 
“과자 하나가 2,500원? 그 돈으로 소시지를 사면 두 끼는 먹겠다.
 
아이스크림은 뭔 3분 만에 다 먹을게 이따위로 비싸냐?”
 
따위의 찌질한 소리를 해가며 편의점을 두 바퀴쯤 돈 뒤,
 
소심하게 쥬시쿨 하나와 미니 약과를 사서 나왔다.
 
이따위 걸로 위안 삼는 내 꼴이 우스웠고
 
고작 천 원짜리 꿀 약과를 눈물 날 정도로 맛있게 먹는 내가 한심했다.
 
쥬시쿨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먹고는 허탈감에 빠져 편의점 야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 10분쯤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여자 한 명이 편의점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반투명한 비닐봉지 안에는 하겐다즈 대여섯 개가 아무렇지 않게 담겨있었다.
 
하겐다즈라니. 맹세코 지금껏 편의점에서 하겐다즈 냉장고를 열어본 기억도 없다.
 
나에겐 너무나도 멀리 있는 고급 아이스크림.
 
“맛있겠다.”
 
멍하니 내뱉은 나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생각한다는 걸 소리 내 말해버린 것이다.
 
민망함에 모른척하려 했지만, 여자는 그 말을 들었는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급히 변명하려는 내게 여자는 말없이 하겐다즈 하나를 내밀었다.
 
“예? 아니 그게 아닌데….”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는 내게 여자는 억지로 아이스크림을 쥐여주고는 가버렸다.
 
“어…. 가 감사합니다!”
 
여자의 등 뒤에 대고 다급히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는 멍하니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처음으로 먹은 하겐다즈의 맛이 너무도 강렬해서
 
내심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매일 같이 편의점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내 기대대로 가끔 편의점에서 그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나이는 서른 중반 정도 되었을까?
 
복장을 보니 그냥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였는데
 
언제나 피로에 찌든 얼굴로 편의점에서 하겐다즈나 수입 맥주, 간식 등을 잔뜩 사 가곤 했다.
 
그리고 근처를 기웃거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아무런 말도 없이 내게 초콜릿이나 맥주 등을 나누어 주곤 그대로 사라졌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부끄럽게도 그녀가 주는 이런 자잘한 것들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공부할 기운을 얻을 수 있었지만 역시나 의문은 있었다.
 
그녀가 날 왜 이리 챙겨주는 것일까?
 
매번 그녀와 대화를 시도해 보려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먹을 것만 쥐여주고 떠날 뿐
 
나와 이야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쯤 되자 나도 더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옛날 힘들던 때가 생각나 선의를 보이는 거겠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인 선의는 몇 주간 계속되었다.
 
 
 
 
 
 
“저기…. 매번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제가 너무 감사해서요.
 
나중에 제가 진짜 제대로 보답하고 싶거든요?
 
예. 제가 공무원 시험 합격하면 식사라도 한번 꼭 대접할게요.
 
내일 시험인데 그쪽 덕에 진짜 정말 너무 힘을 얻어서….
 
꼭 붙어서 제가 어떻게든 보답할게요.”
 
여느 때와 같이 편의점 앞에서 간식을 건네는 그녀에게 횡설수설 말했다.
 
언제나 대답 없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작은 보온병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긴장 풀어주는 차에요. 드시고 시험 잘 봐요.”
 
“아,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진짜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보온병을 받아들자 여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조용히 떠나갔다.
 
그녀 덕에 왠지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차를 살짝 음미하고는 일찍 잠이 들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저녘, 망연한 표정으로 편의점 앞에 있자니 여자가 다가왔다.
 
내 표정이 엉망이었는지 이례적으로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요? 시험 잘 못 봤어요?”
 
난 부끄러워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참고는 겨우 대답했다.
 
“아예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멍청하게 늦잠을 자버려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일찍 잤고 알람도 몇 개를 해놨는데.
 
어떻게 못 일어날 수 있지? 하….”
 
난 좌절감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여자는 말없이 편의점으로 들어가서는 맥주 두 캔과 육포를 사와 내게 내밀었다.
 
“괜찮아요. 다음에 잘하면 되죠. 힘내요.”
 
다시금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은 애틋함과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이렇게 제대로 표정을 본 적은 없기에 묘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뭐라고 할까?
 
사랑이나 연민과는 좀 다른 느낌.
 
마치 불쌍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흐뭇해하는 사람의 표정.
 
“포기하지 마요. 내가 계속 힘줄게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봐요. 우리.”
 
그렇게 말하곤 떠나가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내게 보여준 호의.
 
어쩌면 그녀는 하찮은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주며 우월감을 느끼듯
 
내게 도움을 주며 희열을 느끼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내가 언제까지고 굶주린 불쌍한 새끼고양이이길 바랬을 것이다.
 
시험에 합격해서 당당히 마주 서는 게 아니라
 
오늘처럼 비참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난 그녀에게 돌려주려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린 보온병을 내려다보았다.
 
어제저녁 내용물을 전부 마시고 깨끗하게 세척까지 해놓았기에
 
쳐다본다고 뭔가를 알 수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난 뭔가 볼 수 있기라도 한 양 보온병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