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넌 얼마주면 사람 죽일 수 있겠냐?”
 
갑작스러운 혁수의 말에 난 당황하며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장난기 그득 담긴 얼굴을 보니 늘 하던 것처럼 실없는 소리인 것 같았기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나름 진지하게 대답했다.
 
“글쎄? 난 10억을 준대도 못할 거 같은데?”
 
내 대답이 우스웠는지 녀석은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거 이거 하여간 쫄보 새끼 이거.
 
하여튼 누가 샌님새끼 아니랄까봐.”
 
난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삽겹살을 잘랐다.
 
혁수는 소주와 함께 잘 익은 고기를 입안에 밀어 넣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봐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야? 돈이야. 돈.
 
돈이 있으면 권력도 생기고 또 명예도 따라오는 거라고.
 
괜히 체면치레 하면서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이 말이야.”
 
묵묵히 가위질을 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10년 지기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할 때마다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자. 날 봐. 눈치 안보고 신나게 버니까 어때?
 
사람이 때깔이 다르잖나?
 
돈 있지. 가오 있지. 또 이 동네에서 내 이름 석 자 모르는 사람 있냐?
 
이렇게 살아야지.
 
넌 새끼야 나한테 좀 배워야 돼.
 
내가 같이 큰형님 밑에 들어가자 할 때 말 들었으면 얼마나 좋냐?
 
떳떳하게 산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뭔 사업한다더니 그 따위로 후줄근하게 사냐.”
 
그때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혁수의 말대로 생활이 궁핍해 지다보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조금은 현실과 타협하기로 하고 혁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제라도 안 늦었어.
 
착한척도 좋고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해결해야지.
 
너도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니냐. 자. 이거 받아봐.”
 
혁수는 내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난 그냥 잡일이나 좀 달라고 부탁한 건데.”
 
“야 가오가 있지. 내가 너한테 잡일을 어떻게 시키냐?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내가 제대로 챙겨 줄테니까 한번 봐.”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차용증 따위의 문서 몇 개가 들어있었다.
 
“사람들한테 돈 빌려준 증빙서류랑 차용증.
 
이자는 대충 다 받았고 남은 건 원금인데 수금이 좀 늦어져서 말이지.
 
다 합치면 대충 1억은 될 걸?
 
뭐 내가 한 바퀴 싹 돌면 반나절이면 다 받기야 하겠지만
 
귀찮기도 하고 또 다른 할 일이 많잖냐.
 
그러니까 이걸 너한테 싸게 넘긴다는 거지.
 
반도 아니고 딱 4천.
 
4천만원에 이걸 넘겨주겠다 이거야.
 
당장 줄 필요는 없고 돈 받아서 천천히 주면 돼. 어때?
 
대충 계산해도 6천은 남지? 대박 아니냐?
 
딱히 불법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빌린 돈 정당하게 받는 거니까 너도 가오 안 상하고.
 
난 또 친구 노릇하면서 번거로운 일 해결되니 서로 윈윈 인거지.”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이자로 충분히 이득을 본 뒤, 더 이상 원활한 수금이 되지 않는 악성 빚을 나에게 판다는 의미였다.
 
“잘 안내준다곤 해도 아예 배 째라고 드러눕는 사람들은 다 뺐어.
 
귀찮기야 하겠지만 늦든 빠르든 다 내줄 만한 사람들이니까,
 
정중하게 부탁하든 겁을 주던 무릎을 꿇든 그건 네가 알아서해.
 
이제 너도 사람답게 살아야 될 거 아니야?”
 
빚을 사온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좋은 기회가 됨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혁수가 올곧은 녀석은 아니지만 친구를 등쳐먹거나 배신할 녀석도 아니다.
 
녀석의 말에 거짓이 없음은 분명했다.
 
결국 혁수가 나에게 4천을 투자해서 1억을 벌 수 있는 사업을 소개시켜 준 셈이었다.
 
정당하게 빌려준 돈을 정당하게 받는다.
 
다소 불법적인 일까지 각오했던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돈을 받아내는 방식이야 내 스타일대로 하면 된다.
 
“.... 고맙다.”
 
난 조용히 서류를 받아들었다.
 
 
 
 
수금은 내 생각 이상으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경우에 따라 어느 정도의 강경한 대응은 필요할거라 예상했지만 그럴 필요 조차 없었다.
 
그저 찾아가서 얌전히 빛 얘기를 하기만 해도 다들 굽실거리면서 돈을 내주었다.
 
‘죄송합니다. 당장은 이것뿐입니다.
 
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나머지도 꼭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닦달하기도 전에 그리 말하니 오히려 이쪽에서 천천히 하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10일 만에 수금한 금액이 5천만 원. 남은 5천만 원을 받는데도 보름이 걸리지 않았다.
 
혁수에게 4천만 원을 넘기고 나서도 6천만 원이라는 큰돈이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6천만 원. 한 달 만에 6천만 원.”
 
내 연봉보다 많은 돈을 한 달 만에 벌었다.
 
당장 급한 불부터 끄자 싶어 일을 벌였지만, 이쯤 되니 과거의 내가 한심해질 지경이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나만한 친구 없다니까?
 
얌전떨고 살다가 돈맛 보니까 어때? 죽이지?
 
돈 좀 생겼으니 차도 좀 바꾸고 옷도 좀 빼입고 해야지.”
 
다시 만난 혁수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난 주저하며 말했다.
 
“그래. 네 덕에 살았다. 근데 혹시 이런 일 또 맡겨줄거 있을까?”
 
“그치? 그 걸로는 약간 부족하지? 돈맛이란 게 그런거야.
 
찔끔찔끔 찍어먹을땐 모르는데 큰돈 확 들어오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거든.
 
근데 저번 같은 꿀 건은 별로 없고 조금 귀찮은 거만 남았어.
 
뭐 이거라도 가져가볼래? 대신 더 싸게 넘길게.”
 
기다렸다는 듯 받아든 서류들을 훑어보니 이 역시 대략 1억은 되는 것 같았다.
 
“드러눕는 정도는 아닌데 세월아 네월아 하는 양반들이야.
 
좋은 말은 안통할거고 적어도 언성은 좀 높여야 될 걸?
 
더한 짓을 해야 될지도 모르고.
 
그래도 괜찮으면 가져가. 내가 이건 3천에 줄게. 대신 선금으로 줘.”
 
난 고민하지 않았다.
 
“3천 바로 송금해 줄게.”
 
 
 
 
“다 받았다고 그걸? 한달도 안지났는데?”
 
혁수의 놀란 얼굴에 묘하게 뿌듯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럼. 별로 힘들건 없었어. 다들 순순히 잘 주더라고.”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공갈협박이나 기물파손 같은 거친 방식을 다소 많이 써야 했다.
 
물론 나름의 기준에 맞추어 절대 그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강하게 나가는 것이 돈을 받기가 수월했다.
 
“이 새끼 이거 샌님인줄 알았더니만 완전히 악랄한 놈이었네.
 
이제 좀 마음에 들어.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 악착같이 벌어서 화끈하게 쓰는 게 돈인거야.
 
그리고 돈이 있으면 뭐가 따라온다고? 권력이 따라온다.
 
너도 봤을 거 아냐. 빚 받으러 가면 다들 벌벌 떨면서 굽신거리는거.
 
그게 권력이고 힘이고 명예지 뭐냐?
 
자. 그럼 다시 물어보자.
 
지금은 얼마 주면 사람 죽일 수 있겠냐?”
 
그전처럼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1억. 뒷수습만 해 준다면. 뒷수습 안되면 당연히 한참 더 받아야 되고.”
 
“하, 이새끼 존나 철저하네.”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리며 웃던 혁수를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한동안 웃던 나는 잠시 후 미소를 지우고는 은밀히 말했다.
 
“혹시 뭐 그런 건수 있어?”
 
“야 이 미친새끼야. 농담한거 아냐.
 
이거 큰일 날 새끼네. 돈맛 보더니 애가 완전히 미쳤어.
 
사람죽이는게 장난인줄 알아?”
 
정색을 하는 혁수를 보며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나도 농담이지. 농담이야.”
 
다행히 혁수의 표정은 금세 풀렸지만 난 내심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혁수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나중에 일 생기면 그때 다시 얘기해.”
 
난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혁수는 오히려 질렸단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떳떳하게 사네 어쩌네 별 염병 지랄은 다하더니만....”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