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

내가 감히 아빠라고 불리울 자격이 없다는걸 잘 알고 있다.

12살, 9살에 불과한 어린 너희를 떠나온 그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난 아빠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너희를 떠나야 했던, 차마 너희 앞에 나서지 못했던.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남긴다.



난 어린 너희에게 말했었다.

엄마는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지.

너의 엄마가 친구라는 사람에게 서준 보증이 문제가 되어

사채까지 끌어다 쓰는 바람에

그럭저럭 먹고살던 우리집이 한순간에 쪽방 신세가 되어버렸다.

허탈하기도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난 너희 엄마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사랑했고 또 더없이 소중했으니까.

같이 노력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떨리는 글씨로 미안하다 한마디 간신히 적은 유서를 보고,

죽은 너희 엄마를 끌어안은 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겐 슬퍼할 시간 조차 없었다.

곧 사채업자들이 몰려들 테고, 어린 너희를 지켜야 했으니까.

그 양복쟁이들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악랄한 이들이었다.

내 목숨 하나론 갚을 수 없는 빚이고.

벌어 갚을 때가지 기다릴 인내심도 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너희에게 손을 대려 했다.

‘사내놈은 고깃배에 팔면 돈이 된다.’

‘어린 여자애는 외국에서 비싼값을 쳐준다.’

이따위 소리를 웃으면서 지껄이는 그놈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비굴하게 사채업자의 다리를 부여잡고

시키는건 뭐든지 할 테니 제발 아이들만은 건들지 말아달라 비는 수밖에.

얼마가 걸리건 무슨짓을 해서건 갚을 테니,

제발 너희들만은 손대지 말아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너희를 지킬수는 있었지만, 기다려 주는 대가로 위험한 심부름을 해야 했다.

고깃배를 타고 외국에서 물건을 들여와야 하는 일이었지.

그 물건이 무엇인지. 나쁜 물건은 아닌지에 대한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일주일만 일해주면 아이들은 털끝 하나 안 댈거란 그 약속만이 중요했지.

그래서 너희를 떠나던 그날 밤.

밥과 국을 한소끔 끓여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울 준비를 했다.

주머니를 뒤져 나온 꼬깃한 천원짜리 몇장만을 쥐어주고는

금방 다시 돌아올테니 조금만 참으라는 말만 남긴채

그 단칸방에 너희를 남기고 떠나왔다.

일주일. 일주일만 위험을 감수하면 어떻게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위험한 일이란걸 모르진 않았지만,

내가 각오한 것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불법인 만큼 나와 다른 일꾼들을 감시하는 이들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혹여나 누군가 허튼짓을 하면 주저없이 팔다리를 묶어서는 바다에 던져버릴 이들이었지.

며칠간 바다에 머물면서 막연하기만 하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몸소 느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물건을 받기 위해 도착한 외국의 어느 항구에선 그만 일이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경찰의 단속이라면 차라리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거래도중 문제가 생겼는지 외국 조직 사람들과 이쪽 사람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칼뿐 아니라 총까지 가세해 여럿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끝에 싸움은 외국 사람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난 다리에 칼이 스쳤을 뿐 목숨은 구했지만, 물건과 함께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그렇게 외국에 어느 지하실에 갇힌 채 연명할 정도의 밥만 얻어먹으며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이라 무슨 일인지 물어볼수도 아이들이 있으니 제발 풀어달란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나를 조직원이라 생각하고 거래를 위한 인질로 잡아두었던 모양이다.

결국 내가 조직의 사람도 아니고 어디에도 쓸모 없는 일꾼일 뿐이라 결론짓기 전까지

장장 1년 7개월 간을 그곳에 갇혀있어야 했다.

그들은 쓸모 없어진 나를 어느 한적한 도로에 던져두듯 풀어주고는 떠나버렸다.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어딘지도 모르는 타국에 맨몸으로 버려진 꼴이었지.

그 당시의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희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지.

그래서 말도 통하지 사람들을 무작정 붙잡고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소리쳐댔다.

까딱 잘못했다간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 몰매를 맞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다행히도 어찌 어찌 경찰서를 찾아가고 한국 대사관까지 인도될 수 있었다.

그 덕에 그토록 바라는 대로 한국땅을 밟게 되었지.

다만 문제는 이러나 저러나 내가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마음이 급했던 나는 내가 죄인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 덕에 너희에게 달려가는 대신 경찰들에게 이런저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직접 가담이 아니었고 거래라는 것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아 구속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사면을 받기 위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내가 무슨짓을 했는지 알겠더구나.

사채업자들은 누군가 정보를 흘렸다는걸 알게 될 것이고

범인을 찾기위해 혈안이 되겠지.

거래에서 죽은 사람과 실종된 사람. 그리고 관련인물들이 적지 않으니 조용히 숨어지낸다면 나란걸 들키지 않을테지만

내가 살아있단걸 알게 된 녀석들은 내가 한짓을 알아채고 너희를 인질로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진 빚을 받겠다며 너희에게 다시금 손을 댈 수도 있었지.

그것만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될 일이었다.

그래서 난 죽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너희 소식을 조심스레 알아봤지.

너희가 무사하단 걸 알고 얼마나 고맙고 기뻤는지 모른다.

아직 어림에도 오빠라며 여동생을 챙기는 모습과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오빠를 잘 따르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는

여러 가지 복잡한 충동이 일더구나.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여전히 너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고맙고 미안하다 말해주고 싶었다.

어린 너희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잠시라도 얼굴을 비추었다가 그 악랄한 녀석들의 눈에 띄는 순간,

잘 버텨준 너희에게 다시금 끔찍한 비극이 닥칠 테니까.

너희가 부모도 없이 단칸방에서 라면으로 연명할 지언정

내가 너희 앞에 나타나면 그마저도 전부 부서질테니까.

너희에게 나서지 못하는 현실도 슬펐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실도 슬펐지만

무엇보다 서글펐던건 너희가 날 원망할 거란 사실이었다.

미움받을 각오를 했다지만 가장 사랑하는 너희에게 미움받는 다는 것이

내 마음을 수천 수만갈래로 찢어놓는 것 같더구나.




그럼에도 난 반드시 죽은 사람이어야 했고. 돌아와서는 안되었다.

멀리 떠나서 오래도록 숨어살아야만 했다.

너희가 찾을 수 없는 곳. 악랄한 이들이 알아채지 못할 곳.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너희 남매가 애써 지켜온 그 삶마저 빼앗을 수 없었으니까.

물론 내게도 작은 희망이 있었다.

정말 만약이지만, 언젠가 내가 너희 앞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 나쁜 사람들이 다 잡혀가거나 내가 잊혀지면,

그러고 나면 뒤늦게 너희앞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리고 어쩌면 내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다시한번 아비된 도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오로지 그것만을 꿈꾸며 먼 산골 마을에 틀어박혀 홀로 긴 시간을 버텨내었다.

지금쯤 첫째는 성인이 되었겠구나.

지금쯤 둘째는 수능을 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보고싶은 마음을 꾹꾹 참아내며 숨어지냈다.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이 지나 희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죄지은 벌을 받는지 내 몸에 폐병이 찾아왔다.

너희가 이미 성인이 되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을 무렵 찾아온 그 몹쓸 병으로

난 마침내 현실을 깨달았다.

지금 내가 너희 앞에 나타나 봐야 짐덩이 밖에 되지 않을거란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 모두 아주 조금도 날 반기지 않을거란 사실.

어린 너희를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쳤다가 병이나니 돌봐달라며 다시 돌아온 뻔뻔한 노인네.

절대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았다.




죽을때까지 너희 앞에 나서면 안된다는 사실은 날 절망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그 절망감이 내 병을 키웠는지.

이제는 내게 남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일년이 남았는지 한달이 남았는지 아니면 당장 며칠뒤에 이 비루한 숨이 멎을지 모른다.

악랄한 자들의 눈을 피해야 하니 이 편지가 너희에게 전해지는건

내가 죽고도 한참이 지난 뒤겠지만

마지막으로 욕심을 내어 너희에게 이 말을 남겨보마.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희에게 무거운 짐을 주어 미안하다.

그리고 잘살아주어 정말 고맙구나.

비록 마주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그리고 죽어서도 너희가 행복하길 빌어주마.

내가 죽는다고 너희가 슬퍼하지는 않을테고, 그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 같은건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다만. 너희 엄마.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너희 엄마만은 끝까지 기억하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내 부탁은 그것 뿐이다.

다시금 미안하단 말을 남기며 이만 줄이마.

부디 날 잊고 행복하게 살아주길 바란다.



아버지라 불릴 자격 없는 못난 죄인이 세상에서 가장 기특한 아이들에게.


By. neptunuse










사랑하는 나의 여동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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