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손자의 말에 노인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이 노인네한테 손님이라니 참 별일이구나. 안으로 모시거라.”

곧 문이 열리며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외눈박이 안으로 들어섰다.

외눈박을 본 노인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 어제 꿈자리가 좋더니만….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큰 어르신.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팔십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 존대하며 큰 어르신이라 부르는 게 어색할 법도 하건만

외눈박은 당연하다는 듯 노인의 인사를 받았다.

“아 이 몸이야 늘 건강하지. 자넨 어떤가? 나 없는 새에 많이도 늙었구먼.”

“아무렴요. 이전에 들르셨던 게 거진 30년은 다 되어 가지 않습니까?

그저 죽기 전에 다시 뵐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외눈박의 얼굴에 문득 슬픔이 묻어나는 듯했지만, 금세 미소에 가려졌다.

“더 자주 올걸 그랬구먼. 그래. 선이는 잘 있는가?”

“대모님이야 언제나 깍듯이 모시고 있지요.

손주 놈에게 신신당부했으니 앞으로 이 늙은이가 없어도 잘 모실겝니다.

안 그래도 뵈러 갈 참이었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외눈박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마땅히 보러 가야지. 오랜만에 기운도 좀 받고 말이야.”

노인은 외눈박과 함께 집을 나서며 말했다.

“모처럼 큰 어르신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오랜만에 어떠십니까?”

“암. 좋지. 좋구 말구. 내 안 그래도 자네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이야기를 해주려던 참이었거든.

간만이니 기운 빡 주고 해주어야겠구먼. 큼큼.

자자. 오늘 들려줄 이야기는 저~ 산 넘고 들 질러 멀고 먼 곳.

지금은 기억하는 이조차 사라진 어느 외딴곳에 있던 조선 최후의 요괴.

백의태자에 대한 이야기야.”





숙원이던 요괴의 멸절을 위해 조선팔도를 다 헤집고 다니던 서리태는

한 외딴 마을에 들어섰어.

그런데 느낌이 조금 이상했지.

무언가 불길하고도 어두운 기운이 그득 찬 것 같았거든.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싶어 마을로 들어서니 웬 청년 하나가 마중을 나와 있었어.

얼굴은 분칠한 여인네보다도 더 하얗고, 얼굴 못지않게 깨끗한 백의를 입은 청년이었지.

젊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기묘한 이였어.

서리태가 심의안으로 쭉 훑어보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요괴인데 말이야.

수십, 수백 마리 요괴를 한데 묶어놓은 것 같은 기묘한 기운이었지.

그럼에도 그 무시무시한 요기를 잘 갈무리한 것이 보통은 아니었어.

다짜고짜 칼부터 빼 든다고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평범한 요괴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니 서리태는 우선 청년과 이야기해 봐야겠다 싶었지.

그런 서리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 청년이 서리태에게 먼저 다가왔어.

“기다리고 있었다. 내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나와 함께 가자.”

서리태는 우선 백의 요괴를 따라가기로 했어.

다만 희한한 건 생기 가득한 마을임에도 사람 그림자는 통 보이질 않는 거야.

기척도 없고 그냥 버려진 마을 마냥 을씨년스러운 것이 영 미심쩍었지.

그러는 와중에 서리태는 특별할 거 없어 보이는 평범한 집으로 안내되었어.

“넌 뭐냐.”

자리에 앉자마자 던져진 서리태의 질문에 요괴는 대답했지.

“백가지 형태를 지닌 자. 백의의 왕. 천신의 태자. 순백의 의지를 가진 자.

그 모두가 나를 의미하는 것.

허나 이런 덧없는 미사여구는 겉치레에 불과할지니

백의태자.

네가 칭송해 마땅할 나의 이름이다.”

건방진 백의태자의 말에 서리태는 차갑게 물었지.

“원하는 게 뭐냐.”

백의태자는 서리태의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찡그리고는 말을 이었어.

“세상 모든 요괴,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중생들을 전부 집어삼켜 나라는 존재를 완성했으니.

나의 존재야말로 하늘의 뜻이자 세상의 의지다.

그러니 혹독한 세상을 새롭게 바꿀 천신이 되어 모든 이를 극락으로 이끌 것이야.”

천신.

만물의 기원이자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존재가 바로 천신이라고 알려져 있지.

요괴가 악독한 마음으로 요기를 모아 화한 악신이라든가

영물이 수행하여 승천한 신수와는 그 결이 다른 거대한 존재지.

아니 어쩌면 실존한다기보다는 이 세상 자체를 상징한다고 여겨도 될 거야.

하지만 이 백의태자란 놈이 스스로 천신이 되려 한다니 참 기가 찰 노릇이었지.

“우습구나. 한낱 요괴 주제에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본다는 것이.

정말 천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냐?”

서리태의 물음에 백의태자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지.

“그리할 수 있고. 그리 해야 하고. 그리 될 것이다.

너 역시 사무치게 느끼지 않았느냐?

세상을 검게 물들이는 감정들.

비참함. 고독감. 괴로움과 슬픔까지.

이 모든것을 지우는 게 지극히 옳기에 천신이 되어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너도 겪지 않았느냐.

너의 마음속에 숨겨진 그 고통.

난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이해할 수 있다.

홀로 세운 무거운 숙원을 짊어진 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그런 비참한 인생.

사랑하는 모든 이가 죽어가는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봐야 하는 그 처절한 슬픔을

나만은 이해한다.”

서리태는 동요했지.

백의태자가 진실만을 말함은 물론.

자신의 머릿속과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읽어내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난 약속했다. 나와 뜻을 함께하는 요괴. 그리고 기꺼이 내 양식이 되어준 중생과 미물들에게.

각각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겠다고.

천신이 된다면 그걸 이룰 수 있다.

일백의 요괴를 위해 일백의 세상을 만들어주마.

일천의 중생을 위해 일천의 나라를 만들어주마.

일만의 짐승을 위해 일만의 성을 만들어주마.

그것이 나의 약속이며 내가 천신이 될 이유.

그리고 네가 나와 함께 해야 할 이유다.

네가 가진 그 방대한 요기만 있으면 마침내 나는 천신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너도 다른 모든 요괴와 인간들처럼 내 일부가 되어라.

그러면 진정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리태는 함부로 대답하지 않았지.

속내를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백의태자를 상대로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었어.

백의태자의 말은 계속되었어.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너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주마.

그곳은 깜북이가 없다. 그러니 넌 눈을 잃지 않았다.

그곳은 불이리도 없다. 그러니 넌 가족을 잃지 않았다.

그곳은 귀장꾼마저 없다. 그러니 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백의태자는 말뿐 아니라 서리태에게 환각을 보여주기까지 했지.

서리태만을 위한 세상.

요괴도 없고 슬픔도 외로움도 없는 그야말로 서리태가 꿈꿔왔던 그런 세상을 말이야.

백의태자가 천신이 된다면 현실이 되어버릴 세상이었지.

만약 서리태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약했다면 그대로 백의태자 앞에 무릎을 꿇었을 거야.

서리태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윤회도를 휘둘러 앞에 놓인 탁자를 부수어 버렸지.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다.

지금 이곳. 이곳이 내 세상이지.

슬프고 힘들어도.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새로운 세상으로 도망가지 않고 이 현실에서 모두 이겨내며 살아가겠다.

그것이야말로 옳은 일이니까.”

백의태자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어.

“기어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구나.

만년의 영광을 눈앞에 두고 비참한 죽음을 선택하다니.

말하지 않았느냐. 세상 모든 요괴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 나다.

능히 백가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 나다.

지금껏 네가 사랑한 모든 이의 모습을 한 채.

지금껏 네가 싸웠던 모든 요괴의 능력으로 네 목을 노릴 것이니

절망에 빠져 울부짖어라. 그리고 통곡 속에서 산산이 조각나 천신의 제물이 되어라.”

백의태자는 서리태의 윤회도를 가볍게 피하며 모습을 바꾸었지.

흡수한 요괴들 뿐 아니라 서리태의 기억속에 있던 요괴들의 모습과 능력까지 그대로 가져다 썼어.

깜북이가 되어 눈알을 노리고 달려들었다가

소쩌귀가 되어 큰 부리로 쇄도해 들어가고,

순식간에 환락거미가 되어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기도 했지.

눈 깜짝할 새에 다른 요괴로 모습이 바뀌며 각기 다른 형태로 공격해 들어옴에도

서리태는 전혀 밀리지 않았어.

오히려 차분하게 백의태자를 압박하기 시작했지.

하지만 그 순간,

[설아. 그간 맘고생 참 많이도 했구나. 이제 괜찮다. 이제 그만 짐을 내려놓고 편해지자꾸나.]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어머니의 모습에 수백 년간 거침이 없던 서리태의 윤회도가 흔들렸어.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어머니의 입에서 불이리가 뿜어져 나와 서리태의 몸을 태웠지.

“어리석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서리태는 고통에 신음하며 간신히 불길을 떨쳐내고는 다시금 윤회도를 휘둘렀어.

[마침내 저를 죽이셨군요.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전 당신이 그리도 증오하는 요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비참한 존재니 마땅히 칼로 베고 발로 밟아 죽여 없애셔야지요.]

칼에 베인 꼭두서니를 본 서리태가 주저하는 새에

꼭두서니의 팔이 순식간에 귀면각으로 변하더니 서리태를 후려쳤지.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어.

설이라 불리던 시절. 규태라 불리던 시절. 그리고 서리태라 불리던 시절을 통틀어

사랑하고 지켜야 할 존재들의 모습이 나타났지.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수백 년간 싸웠던 요괴들의 힘이 목숨을 노렸고 말이야.

1,000년 묵은 환락거미와 싸울 때도, 귀장꾼 자리공의 고독 요괴 부대와 싸울 때도

절대 마음을 꺾지 않았던 서리태가 무너져 가고 있었지.

“어리석다. 또 어리석은 만큼 나약하구나.

진정 옳은 것을 멀리하는 이는 마음마저 나약한 법이지.

이제 네가 바라던 세상은 없을 것이다.

감히 나를 거부하고 칼을 든 벌로 영원히 고통받는 세상에 가두어 주마.”

이름 모를 요괴의 날카로운 손톱이 넝마가 된 서리태의 목을 베어내려는 순간.
서리태의 윤회도가 기적처럼 그걸 막아섰어.

“영원히 고통받는 세상. 그래. 한때는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이 그렇다 믿은 적도 있었다.”

서리태의 머릿속은 서리가 내린 듯 냉철해진 반면 움직임은 불처럼 뜨거워졌지.

“하지만 이런 저주받은 내 세상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백의태자는 서리태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기억을 읽어낼 수 있었어.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좌절을 딛고 수련에 몰두하던 때.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미움을 내려놓고.

꼭두서니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며 행복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던 시절.

무엇보다 너무도 사랑하는 가족들 모두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이 세계에 함께 살았단 사실을 떠올린 거야.

“내가 달콤함에 빠져 잠시 꿈에 허덕이는 바람에 칼끝이 무뎌졌다.

돌이켜보면 이 세상 역시 나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세상이지.

그리고 나에겐 그걸 지킬 의지도 힘도 있다.

그러니 마땅히 네 목을 베고 내 세상에 머무르겠다.”

서리태의 칼은 다시 예리함을 찾았고 백의태자가 어떤 모습으로 현혹해도 넘어가지 않았어.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따위 기억. 이따위 세상이 무어가 그리 중요하단 말이냐.

더 큰 세상. 더 좋은 세상은 얼마든지 있다.

왜 내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냐.

모든 것을 옳게 만드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거늘 왜 그리도 악착같이 버티는 것이냐.

아니. 내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난 천신이 되어야 할 존재. 아니 이미 천신에 다다른 존재다.

허튼 발악 따위 통할성싶으냐?”

백의태자는 순식간에 몸을 불리더니 수백의 요괴가 뒤엉킨 끔찍한 모습으로 변했지.

그 살벌한 광경에도 서리태는 동요하지 않았어.

“허튼 발악이 아니다. 의지고 힘이지.

그간 세상 모든 요괴를 잡아먹고 힘을 키웠다면 네놈이 마지막 요괴 일터.

네놈을 처단하고 내 숙원을 이루겠다.”

외눈박은 온 힘을 끌어모아 백의태자에게 달려들었어.






눈앞에 있는 무덤을 그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서리태는 이야기를 마쳤다.

“숙원이라고 했지만 이룰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분노. 다음엔 복수였던 것이 마지막엔 신의가 되었고.

크나큰 믿음은 서리태를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주었지.

그건 수백 요괴의 힘을 가진 백의태자 마저 베어내는 힘이야.

불가능한 숙원을 이루어 주는 힘이고 이 세상을 지켜내는 힘이지.

그렇게 지켜낸 이 세상이 생각처럼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마냥 나쁘지만도 않을 거야.

자. 한번 봐. 이렇게 좋은 풍경에. 오랜 인연에. 그리운 사람들까지….”

꼭두서니.

서리태는 묘비에 적힌 이름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게다가 언젠가는 정말 좋은 세상이 될 거야.

백의태자가 말한 허황된 극락이 아닌 진짜 좋은 세상.

먼저 간 이들도. 남겨진 이들도 모두 그렇게 믿고 있을 테니 말이야.

자. 그럼 외눈박 이야기는 이걸로 끝!”

노인의 박수 소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이제 제가 큰 어르신을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저마저 대모님 곁으로 떠나면 큰 어르신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테지요.

정말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노인의 말에 서리태는 웃으며 대답했다.

“암. 괜찮고말고. 내가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거로 족해.

선이도 그렇고 먼저 간 모든 이들을 내가 다 기억할 테니.

자. 오랜만에 기운도 받았겠다 이만 가봐야겠구먼.”

“몸조심 하십시오. 큰 어르신.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외눈박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갈 곳을 정하고 걷는 것이 아니야. 바람 따라 이야기 따라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외눈박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무덤가를 잔잔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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