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만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역사는 단순히 기록일 뿐이지만.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눈치 챈 선현들은 그것이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천문（天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무릇 역사를 예언이라 여겼고.

미래를 보기 위해 과거를 필사했다.

역사는... 

참으로 들여다볼 만한 거울이었다.

영조 25년 1월 22일 밤.

상（上）이 내린 봉서가 승정원에 내려졌다.

당직을 서고 있던 승지 박필재와 김상복이 받들어 뜯어 보았다. 

첫머리에 [ 중옹（仲雍）-백이（伯夷） ] 라는 글자가 있고

하단에는 [을유 등록（乙酉 騰錄）을 깊이 생각해 보라.] 는 글자가 있었다.  

박필재와 김상복이 머리를 맞댔다. 

"중옹... 백이..."

"사기（史記）에 나오는 인물들 아니오."

중옹（仲雍）은 중국 고대 주나라 태왕의 둘째 아들로서 형인 태백과 함께 아우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도망친 사람이고, 백이（伯夷）는 고족군의 둘째 아들로서 아우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도망쳤는데 숙제 또한 도망하여 왕위를 형에게 사양했다. 

영조가 이복형인 경종에게서 왕위를 물려 받은 일을 미화하여 이른 말들... 이었다. 왕명을 출납하는 자들이기에 상（上）의 뜻을 어느 정도 헤아릴 머리와 지식은 있었다.

을유 등록（乙酉 騰錄）은 숙종 31년에 당시 왕세자였던 경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하교를 내렸는데, 왕세자와 신하들의 반대로 중단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중옹... 백이... 을유 등록...

김상복이 말 하나를 뱉어냈다.

"선위（禪位）..."

"선위...?"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뜻...

박필재는 심각한 표정으로 즉시 봉서를 다시 봉합하고, 임금에게 달려갔다. 밖은 비가 억수로 내리고 있었다. 합문 앞에서 기다리자 시간은 어느새 오경에 다다랐고 그제야 비로소 인견할 수 있었다. 

박필재가 고개를 조아리며 간곡한 음성을 전했다.

"이 봉서는 출납할 수 없습니다. 간곡히 청하건데 거두어 주십시오."

상（上）은 태연히 말했다.

"내가 감히 삼종 혈맥의 명령을 어기지 못해 이 자리에 앉았지만, 이를 즐겨하지 않는 마음은 25년이 하루 같아서 날이면 날마다 원량（세자）이 나이 들기를 기다렸는데 이제 다행스럽게도 열다섯 살이 되었으니 편히 이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봉서에 담은 마음을 정한 이유는 저승에 계신 황형（경종）의 용안을 뵐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며, 이 자리에서 내려가고자 했던 마음을 성취하고자 함이며, 마지막으로 갑자년 이후 병이 더해져 이를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임금의 뜻은 견고했다. 

몇 일에 걸쳐 왕세자와 대신들이 번갈아 나아가 하교를 거두어 줄 것을 힘써 간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듣지 않았다.

한 때 빗줄기가 크게 사나웠을 즈음 왕세자가 갑자기 비를 무릅쓰고 달려가 엎드렸다.

"하교를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아직 공부가 멀었습니다. 종묘 사직의 장구한 계책을 맡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상（上）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나는 이미 마음으로 맹세했다."

왕세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박석 위 움푹 들어간 곳을 빗물과 함께 채우고 있었다.

"세자는 앞으로 오라."

어명이었다. 하지만 작은 온기가 서려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일어나지 않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임금은 다시 물었다.

"세자는 어서 앞으로 오라."

이리 하기를 4, 5차례 한 뒤에야 세자는 임금께 다가가 엎드려 울었다.

"왜 그리 서럽게 우는 것이냐?"

"아비의 근심하는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였으니, 이보다 더 불충 불효한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다. 송구한 마음에 그렇습니다."

세자는 다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세자의 말에 모든 신하들이 울음을 삼키며 울었다. 

상（上）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참으로 독특한 성정의 임금이었다.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도 반대파를 잔혹하게 처단하고, 불끈불끈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목표한 바는 치밀하게 성취했다.

선위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모두 얻은 듯했다. 

왕의 자리가 별거더냐

그것은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선왕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런 의혹을 희석할 수 있었고, 세자와 신하들의 충심을 저울질 할 수도 있었다. 

태종이 세종의 장인이었던 사돈 안효공 심온에게 마지막 칼춤을 선사했던 것이 바로 선위를 통해서였다. 하물며 안효공은 떨어지는 나뭇잎도 피하던 사람이었고, 온 마음으로 권력욕 없음을 내보였음에도 외척을 두고 갈 수 없던 태종의 무고에 사사당하고 말았다.

세자와 신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납작 엎드리는 것. 그 뿐이었다.

상（上）이 눈물을 훔치며 하교했다.

"부득이 하다면 대리 청정（代理聽政）은 어떻겠는가?"

여기 저기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도리어 선위의 전교를 거둔 것은 다행이 아닌가. 

"뜻을 받들겠습니다."

"어린 세자로 하여금 아득히 국사를 모르는 상태에 두었다가 뒷날 만약 노론과 소론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일어나 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결정은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있을 것이다."

결국 3일이 지난 영조 25년 1월 27일.

왕세자의 대리 청정을 태묘（太廟: 지금의 종묘）에 고하고 팔도에 전교를 반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옛날 선왕께서 세자를 세워 종묘 사직의 소중함을 받들고 군병을 어루만지며 나라를 보살피게 하였음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 연원이 길다. 천지와 조종（祖宗）의 신령들이 도와 동궁을 갖는 기쁨을 누렸는데, 어느새 저궁이 천인의 모습을 엄연히 갖추었다. 예지는 점점 고명해지고 습성은 자연에서 우러나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 경사의 학문을 닦아, 만백성이 받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종묘사직의 한량없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오늘 부로 의장과 예절은 약간씩 고치되, 관작과 병사-형옥 이외에는 모두 세자가 맡아 전결하도록 한다."

세자의 나이 15세. 

목줄달린 인생을 경험해 본 이는 알 수도 있다.

그가 느꼈을 무력감을 말이다.

박석에 부딪힐 때 생긴 이마의 붉은 꽃이. 

가시를 내며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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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간들 보내시고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