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초저녁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만.”

외눈박은 의아해하며 분주해 보이는 마을로 들어섰다.

산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거나 약초를 캐다 파는 작은 마을로 보였다.

이런 마을이야 으레 느긋하고 여유롭기 마련이지만

왜인지 지금은 불이라도 난 것마냥 다들 정신이 없었다.

“거, 뉘쇼?”

기다란 작대기를 창처럼 짚고선 사내가 외눈박에게 말했다.

“지나가던 이야기꾼 박가이올시다.

보시다시피 눈이 이래서 외눈박이라고들 부르지.

곧 날도 저물고 하니 이 마을에서 하루 묵을까 했소만,

어째 다들 분주한 것이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오?”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좋지 않은 시기에 오셨군.

되도록 빨리 이곳을 떠나시는 게 좋겠소.

얼마 전부터 이 근처에 몹쓸 요괴가 나타났으니 말이오.”

외눈박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거참 농이 지나치시오.

이 조선 땅에서 요괴란 놈들 씨가 마른 지가 반백 년은 넘었을게요.”

하지만 사내는 사뭇 진지했다.

“아니오. 분명히 요괴요.

그 끔찍한 모습을 본 이가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이 근방에 있다가 괜스레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날 밝을 때 서둘러 멀리 피하시는 게 좋겠소.”

그럼에도 외눈박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 외눈박이 도망이라니 그건 안 될 말이지.

꼬리 마는 건 내 성미에 맞질 않으니 요괴든 뭐든 상관없소.

곡기 조금에 밤이슬 피할 잠자리만 마련해 주면

나도 힘껏 도우리다.

내 전국 팔도 헤집고 다니면서 온갖 산전수전은 다 겪어 봤으니

장정 하나 몫은 너끈히 해낼게요.”

사내는 한사코 돌려보내려 했으나, 외눈박의 고집이 원체 강경하여

그만 두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해가 떨어지면 다 같이 모여서 밤새 마을을 지킬 거요.

도와준다니 내 부탁은 드리오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몸을 피하시오.”

외눈박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사람들이 모여앉은 곳에 한 자리 차지했다.

앞마당이 휑해 보일 정도로 적은 사람들이 각자 무기랍시고 낫이며 괭이를 들고 있었는데,

정작 얼굴에는 걱정 근심이 가득했다.

“이거 또 재주를 한번 부려봐야지 안되겠구만.”

아무래도 겁을 잔뜩 먹고 움츠러든 것 같았기에 외눈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기운도 북돋고 시간도 보낼 겸

이 외눈박이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주려 하는데 다들 괜찮으시겠소?”

다들 반응은 시큰둥했지만, 외눈박은 기다리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자, 다들 괜찮으신 듯하니 내 시작해 보도록 하겠소이다.

외눈박이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는.

저 산 넘고 들 질러 멀고 먼 마을에 나타난

외뿔이 요괴 귀면각에 대한 이야기요.”



귀면각은 황소만 한 덩치에 이마 한가운데 기다란 뿔이 나 있는 요괴요.

피부도 시커멓고 몸도 다부진 것이 척 보기에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놈이었지.

이놈이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마을 어귀에 '척'하니 나타났을 때,

그 살벌한 모습에 다들 혼비백산 했지.

한 아름은 넘을법한 커다란 나무를 몽둥이처럼 든 귀면각이 마을에 외쳤소.

“살고 싶으면 전부 무릎을 꿇어라!”

산이 통째로 흔들릴 법한 큰 소리에 다들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귀면각 앞에 엎드렸지.

“이제부터 이 마을은 나 귀면각님이 차지하겠다.

살고 싶으면 공물을 바쳐 성의를 보여라.

저 뒷산 동굴이 내 거처이니 내일까지 준비해 가져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큼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주마.”

그렇게 호령한 귀면각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그대로 뒷산으로 올라갔지.

마을에선 난리가 났소.

다들 이를 악물고 귀면각을 만족시킬만한 공물들을 모았지.

다음날 큰 수레에는 온갖 금은보화, 가축, 산해진미가 그득 담겼고 말이오.

사람들을 뽑아 수레를 밀고 뒷산에 가니 과연 귀면각이 동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다행히 귀면각은 바쳐진 공물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물을 받았지.

사람들은 크게 안도하며 돌아가려니 귀면각이 말했소.

“나흘 뒤, 다시 공물을 받겠다. 못해도 오늘만큼 준비해야 할 거다.

행여 공물을 준비 못 하면, 마을뿐 아니라 이 일대를 전부 박살을 내 주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마땅한 대책이 없었소.

사람을 보내 나라에 도움을 청한다 해도

요괴가 들끓는 이 시대에 언제 군사를 보내줄지도 모를 일이었거든.

그래서 별수 없이 죽을힘을 다해 공물을 마련했소.

일소를 끌고 오고, 패물을 모으고, 겨울을 나기 위해 곡식을 쌓아둔 곳간을 열었지.

간신히 공물을 마련했지만, 귀면각은 또 나흘의 시간을 주며 무서운 소리를 해댔지.

“제법 정성들였다만 차려진 게 내 입맛엔 안 맞는구나.

나흘을 줄 테니 다음번엔 어린애들을 제물로 바쳐라.

만약 그러지 못하겠다면 전부다 잡아먹을 테니.”

아무리 귀면각이 두려워도 아이들을 바치다니 그건 안될 말이었소.

그렇다고 귀면각과 싸우겠다 나서는 이는 없었지.

마을을 버리고 다 같이 도망간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나,

한두 명이면 모를까 마을에서 사람이 잔뜩 빠져나간다면 귀면각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터였소.

고심하던 차에 마을에 살던 청년 하나가 조용히 나섰소.

“제가 몰래 마을을 빠져나가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나라님이건 누구건 해볼 수 있는 건 해봐야지요.

귀면각의 눈만 피하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다들 내심 두려워하던 차에 청년이 이리 나서주자 못 이기는 척 청년을 내보내기로 했지.

청년 역시 귀면각이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대의를 위해. 용기를 내보기로 한 거요.

늦은 밤.

청년은 은밀하게 움직여 마을 밖으로 나갔소.

작은 새소리 하나 풀벌레 소리 하나에 집중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이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을 때, 돌연 새소리 벌레 소리가 딱하고 멈췄소.

그 순간 청년은 두 번 고민하지도 않고 냅다 달려 나갔지.

아니나 다를까 먼 곳에서 우레같은 소리가 들리며 귀면각이 청년을 향해 뛰어 내려왔소.

무시무시했지.

돌이 튀고 땅이 파일 정도로 귀면각은 빠르고 무서웠소.

청년은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귀면각에게 잡혀 끔찍하게 죽을 게 분명했지.

하지만 청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소.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 청년은 그대로 풀숲에 몸을 숨겼지.

아무리 수리 같은 눈을 가진 귀면각도 풀 속에 납작 엎드리면 못 찾을 테니 말이요.

과연 귀면각은 풀들 사이에 몸을 숨긴 청년을 찾아내지 못했지.

“쥐새끼 같은 놈이 주제를 모르고 잔꾀를 부리는구나.

오냐. 숨을 테면 마음껏 숨어 보아라.

내 이 일대를 전부 뒤집어 버릴 테니.”

그렇게 말한 귀면각은 그 커다란 몽둥이를 들어 바닥을 내리치기 시작했소.

발을 구르고 몽둥이로 내려치고 소리치는 통에 금세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지.

그 와중에도 청년은 일어나지 않고 꾹 참았소.

마음 같아선 당장 일어나서 귀면각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지만,

그랬다간 마지막 희망까지 꺼져버릴 테니 말이요.

분명히 기회가 올 거로 생각했지.

그렇게 바닥이 흔들릴 때마다 떨리는 이를 간신히 붙잡고는 참고 또 참았소.

한동안 바닥을 내리치던 귀면각이 대충 주변을 둘러보니 전부 다 엉망이 된 거라.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겁먹고 움츠려 있다가 찍소리도 못하고 죽었나 보구만.

이 귀면각님께 반기를 들면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하는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귀면각은 이쯤이면 죽었겠거니 하며 만족스럽게 돌아갔지.

그럼 진짜로 그 청년이 죽었을까?

아니지. 그야말로 기적같이 살아남았소.

귀면각이 돌아가고도 한참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청년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보니

딱 청년이 뉘었던 한 움큼의 땅 빼고는 세상 아찔할 정도로 엉망이었지.

청년의 간절함과 용기를 천지신명께서 보살피신 게요.

청년은 다리가 풀려왔지만 그런데도 주저앉아 있지 않았소.

그길로 다시금 귀면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을 밖으로 나섰지.



마을 사람들은 귀면각이 그 난리를 치는 걸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소.

그리고 귀면각의 힘에 다시금 두려움을 느끼고는 완전히 마음이 꺾이고 말았지.

그 덕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리고 만 거요.

아이들을 모아다가 꽁꽁 묶어서는 귀면각에게 바친 거지.

귀면각은 맛난 간식이라도 받아든 것 마냥 헤실헤실 웃으면서 아이들을 줄줄이 엮어서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소.

아이들이 울며불며 살려달라 해도 누구 하나 붙잡는 이가 없었지.

마을은 그야말로 말 못 할 침울함에 쌓였소.

귀면각은 며칠 가지 않아 다시 제물을 바치라 할 것이 뻔했으니.



하지만 이튿날.

살아남은 청년이 아주 당당하게 마을로 돌아와서는 제물을 바쳤단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귀면각이 사는 동굴로 찾아갔지.

청년을 알아본 귀면각은 코웃음 치며 동굴을 나와 청년을 맞았지.

“운 좋게 살았으면 어디 멀리 도망가 웅크려 살 것이지

죽여달라 찾아온 걸 보니 아주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하지만 위협적인 귀면각의 말에도 청년은 기죽지 않고 소리쳤소.

“아이들은 어디 있나? 난 그 아이들을 구하러 왔다.”

귀면각은 당돌한 청년의 모습을 비웃으며 말했지.

“자고로 맛난 건 아껴서 조금씩 꺼내먹어야 제맛이지.

저 안에 꼭꼭 숨겨놨는데. 어떠냐?

네놈이 날 지나쳐 구하러 가볼 테냐?”

다행히 아직 아이들은 무사한 것 같았기에 청년은 크게 안도하고는 당당히 말했소.

“오냐. 내 당당히 네놈을 지나쳐서 아이들을 구해오마.

네놈은 네 악함을 반성하고 벌을 달게 받도록 해라.”

귀면각은 이제 슬슬 화가 났지.

버러지 같이 여겼던 놈이 당당히 큰소리 치는 꼴이 영 마뜩잖았거든.

그래서 단숨에 짓이겨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청년이 겁도 없이 동굴로 다가가는 거라.

이건 뭔가 싶어 호통을 치려니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거요.

“귀면각. 그 장사치 놈이 만든 고독 요괴 중 하나구나?”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귀면각은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며 돌아봤지.

그곳엔 그가 서 있었소.

조선 최고의 요괴 사냥꾼.

타오르는 한기 서리태.

서리태는 요괴를 베는 보구 윤회도를 꺼내 들고 귀면각을 겨누었지.

귀면각은 서리태를 잘 알았소.

그런 만큼 서리태를 두려워했고 말이요.

필사적으로 청년을 막으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지.

기세 좋던 귀면각은 꼭 새끼 고양이가 된 것 마냥 움츠러들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소.

그동안 청년은 당당히 동굴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구해냈고 말이요.

“피차 긴 말을 필요 없을 듯하군.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네놈을 사냥하겠다.”

그제야 귀면각이 발악적으로 소리치며 달려들었지만

서리태가 딱 반보 앞으로 내디디며 윤회도를 휘두르자

그대로 몸이 반 토막 나버리고 말았지.

청년은 아이들을 구해 나와서는 반 토막 난 귀면각을 보며 서리태에게 감사를 전했소.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저희와 이 아이들이 살 수 있었습니다.”

서리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청년에게 말했지.

“네가 용감히 나서준 덕이다.

그놈이 널 잡겠다고 난리를 친 통에 내가 귀면각 놈을 알아챘고 널 만날 수 있었지.

그리고 네놈이 이 녀석의 관심을 끌어 아이들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다.

내가 혼자 왔으면 그놈은 겁을 집어먹고는 아이들을 인질로 시간을 끌었을 테지.

난 한 게 없다. 다 네 능력이고 네 덕이지.”

그 말을 마친 서리태는 더 볼 것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소.




외눈박은 어느새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며 이야기를 마쳤다.

“서리태가 귀면각 앞에 나선 것은 용감해서가 아니오.

이길 수 있는 적 앞에 나서는 건 용기가 없어도 할 수 있거든.

힘이 한참 부족하고 절대 이길 수 없음에도 나서는 것이 용기지.

청년은 목숨을 걸고 마을을 빠져나가 도움을 구하려 했고 결국 성공했소.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면서 말이오.

이 훌륭한 마음가짐을 우리가 모두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외다.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는 용기. 그 단 한 걸음이

두려운 존재로부터 우리와 가족, 그리고 이 마을을 지켜줄게요.

어디 보자. 그래. 다들 눈빛이 많이들 좋아지셨구만.

슬슬 시간도 된 듯하니 이 외눈박 아재 이야기는 이걸로 마치도록 하겠소이다.”

손뼉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다들 얼굴에서 두려움이란 감정이 많이 가신 듯했다.

그 덕에 멀리서 누군가 소리치는 ‘요괴다!!’ 소리를 듣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용감하게 뛰어나가 멋지게 사냥해 낼 수 있었다.

“허, 요괴치고는 제법 잘생긴 편이외다.”

외눈박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민망한 표정으로 사냥한 곰을 내려다보았다.

틀림없이 요괴라 여긴 것이 그저 산짐승이란 사실에 다들 맥이 탁 풀린 것이다.

“이리 인물 좋은 곰도 귀면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지.

그걸 이겨내면 이렇게 고기도 얻고 곰 가죽도 얻을 수 있는 게요.

어찌 되었건 이거 마을 경사로구만.

껄껄 웃는 외눈박을 따라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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