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유일한 안전구역,

‘피난처’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다음의 지시사항을 철저히 준수하셔서

무사히 이곳까지 오시길 바랍니다.

 （!）피난처는 모든 인류를 환영하며,

 개인의 의견이 반드시 집단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1. 인사

이런 말을 처음부터 해서 미안해요.

글로는 뜻이 다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읽는 사람한테는 가혹해도 분명히 해둘게요.

넌 너한테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자살하는 게 결국 네가 맞을 결말 아닐까?

너같은 무지렁이를 피난처에 들이기로 하다니

내 피가 다 거꾸로 솟는다. 버러지 같은 것들.

집도 절도 없는 쓰레기들을 받아주는 것이

단결된 인류의 저력하고 다 무슨 상관인지 원

2. 간단한 소개

내 감정은 일단 접어두도록 하죠.

부디 진심으로 바라건데 이게 실수가 아니길.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었다면

스물 여섯 배는 훨씬 더 좋았겠지만요.

파란색 스위치가 선박 전원버튼입니다.

이 고철덩어리를 낙원까지 끌고가려면

이 쪽지에 적힌 내용을 무시하지 마세요.

따르기만 한다면 무사할 겁니다.

3. 전용 물자

용접기는 선창 72번에 있습니다.

산화된 철판이나 파손된 곳을 수리할 때

애로사항이 한두 개가 아닐 겁니다.

서랍에 배터리 여덟 개밖에 없는 거 알죠?

합리적으로 배터리를 배분해야 할 겁니다.

뉴욕에서 출발하는 배에는 그것도 없어요.

한국에서 여기까지는 그리 오래 안걸리니

인원과 자산에서 불필요한 건 버리세요.

간소한 물자는 속도, 속도는 생명입니다.

4. 부식과 영양제

다진고기랑 감자, 에너지바, 비타민제

런치 타임 메뉴입니다. 실망한 거 알지만

살아있는 걸 먹을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암환자들이 뭐 먹다 그 꼴 났는지 알죠?

들리는 소문으로는, 오염이 퍼진대요.

인류는 망했으니 이게 누구 소행이겠어요? 

도시를 점령한 놈들이 꾸미는 짓이겠죠.

한 번 더 분명히 말하겠는데,

다 죽어도 배는 살려서 오세요.

5. 이형 위험생물 대처법

거머리 떼, '타나토스'를 조심하십시오.

짙은 색깔의 해수면에서 자주 나타나죠.

피만 빠는 놈들이 아니니 잘 대비하세요.

난류를 따라 이동하는 놈들인데

철판에 잇자국을 남길 정도로 흉악합니다.

향수를 따로 저장해둔 이유가 있습니다.

해수면에 거품이 일면 한 병 뿌리세요.

6. 기만적 위험생물 대처법

진정으로 조심해야 할 적이 있어요.

짜리몽땅하고 귀엽게 생겼죠.

일만 마리 이상이 무리지어 다니는데

행동이 빠른만큼 먹성도 따라갈 자가 없죠.

들소 한 마리한테 수백 마리가 달려들어서

잘게 찢어버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보고 있기 썩 좋은 광경은 아니죠.

호기심에라도 물방개를 건드리지 마세요.

해상에서 이동하는 건 정찰병에 불과하니.

7. 적 정찰병 회피방법

말 안해줬다고 뭐라할 것 같아 충고하는데,

석양이 질 때는 엔진을 끄세요.

지나치게 많은 거리를 이동하면 안되거니와,

마주치면 안될 것들이 활동을 시작하니까요.

설마 했다면 그 설마가 맞습니다.

득달같이 나타나서 어뢰를 쏴재끼는 놈들.

당신이 AI 잠수정이라면 태양이 떠있을 때

한껏 충전을 하면서 경계를 떨구겠죠.

다시 말해, 낮에만 이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8. 이동 시 주의사항

당신이 일행의 우두머리라면 선장이겠죠?

장치제어권을 2시간마다 확인하세요.

찾아서 일일이 체크하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에 해킹 잠수정에게 당합니다.

서서히 주위를 좁혀오다가 기습할 거에요.

주변에 기계가 감지되면 먼저 공격하세요.

겨우 소형 잠수정이라고 얕보지 말고.

9. 다용도 군사위성 대처법

신의 자리에 도달하려던 인류의 야망이

상상도 못할 재앙이 된지 꼬박 60년째면

정찰위성 같은 건 다 멈췄어야 정상이지만

보복 시스템은 여전히 우리 머리 위에 있고,

다른 인간집단과 성급하게 합류할 경우,

가차 없이 기계를 보내 벌을 내릴 겁니다.

짜임새 있는 소수의 집단으로 움직이세요.

10. 니드호그급 기관포 사용법

폭발음 같은 게 바다 저편에서 들린다면

죽음이 정말로 가까이 있는 겁니다.

사람을 구하겠다거나 하는 의협심은 버려요.

실망스러운 지도자가 되지는 않을까 평판에

신경쓰는 건 사치나 다름없어요.

호버킬러가 육안으로 보이면 엔진을 끄세요. 

탄창을 다 비웠거나 당신을 지나쳐가는 게

아니라면, 전투를 준비해야 할 겁니다.

니드호그급 기관포는 대공포가 아니에요.

야간에 놈들과 마주치면 필경 죽을 겁니다

11. 내부 무장

단거리 대공미사일 8발과 런처를 넣어놨어요.

추적기능은 그리 좋다고 말 못하겠지만요.

사실 인류의 자산 중에 좋은 게 뭐 있겠어요

실패한 옛 지배자들이 우월한 존재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한 게 지금 우리의 꼬락서니죠.

청바지가 노동복에서 패션아이콘이 될 정도로

장대하게 번영했던 인간 문명이었는데.

치욕스럽기 그지없네요. 지금 이 꼴은.

야망이 우리를 노예로 개조했습니다.

12. 주행성 해양생명체

받는 사람이 기분 좋아야 좋은 선물이라죠.

아주 좋은 선물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에나멜 코팅 된 잠수복이 여섯벌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일단. 기분 나빠 하지 말고.

어군탐지기에서 작은 크기의 많은 개체가

서서히 가까워지는 게 감지될 경우,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물속에서요.

너풀거리는 해파리떼가 보이면 안심하세요.

무해하지만 먹을 수 없다는 건 기억하십쇼.

느리게 다가오는 발광 문어가 보일 경우,

저장고를 비우고 속도를 최대로 올리세요.

따로 무기를 챙겨 온 게 있길 빕니다.

13. 겨울 항해 시 주의점

이전에 준비해둔 선박에서는 항해 도중

후방 스크루가 멈추는 사고가 있었어요.

에러 따위가 아니라 부품이 노후화되어서

능률이 떨어지다 못해 아예 멈춘 거였죠.

제 생각에는 그냥 이 짓을 안하는 게 나은데

우리 지도자님께서 워낙 인정이 많으시죠.

스크루를 하나 더 실었습니다.

못하겠다거나 할 줄 모른다는 변명은 마세요.

피치 못할 상황이 생기면 잠수복 입고

한 사람씩 바다에 들어가서 작업하세요.

다른 사람들도 돕는다면 금방 완료되겠죠.

14. 서구 문명 몰락의 원인

제우스가 뭔지 알겠지만, 혹시나 싶어 말해요.

시시때때로 텅스텐 막대를 떨구는 위성이죠.

간신히 놈의 포격으로부터 살아난다고 해도

에너지 반응이 주변의 기계들을 불러모아서

차라리 포격으로 죽는 것이 나은 쪽이 돼요.

자랑스러운 우리 피난처는 놈의 탄두로부터

내내 안전했어요. 물자가 소진되지 않는 한

아마 이 위대한 도시는 계속 존재할 겁니다.

한동안 이 실험적이고 멍청한 구제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긴 하겠지만요.

15. 자기장 교란 방어장치

우향 하갑판 12번 복도에는 시계가 있어요.

리셋하세요. 신형 펄서 구역 방호기니까.

족집게 따위로 전지를 제거하고 다이얼을

감아준 다음, 분침과 초침이 일괄적으로

시침과 같은 위치에 오도록 조정하세요.

자폭하려는 폭격 드론들을 늦출 겁니다.

놈들의 유도장치가 펄스에 망가지거든요.

16. 기술적 대비책이 없는 재앙에 관하여

수차례 존재가 보고되었지만 아직까지도

파악이 요원한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이놈을 만나는 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닌데

보게 되면 소름 끼치는 경험을 할 겁니다.

호러가이스트라는 놈이 있어요.

하잘것없는 고래 주제에 지능은 높죠.

고래 목소리로 인간의 말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마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 같아요. 조심하세요.

17. 덜 시급한 문제들

탄생이 사망선고의 다른 이름인 세계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토막난 신체가 널린 곳에서 애를 키우면서 

스스로를 좋은 부모라고 여긴다면

한참 잘못된 거 아니겠습니까.

태교가 끝나면 엄마가 뭘 하겠어요?

머리를 잘 겨냥하라고 격려하면서

기계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칠 겁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나라면 아이들을 고통 없이 보낼 겁니다.

18. 살상이 필요치 않은 생명체

창공을 가르는 익룡 한 마리가 보이면

밖에 나와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꾸러미 같은 걸 갖고다니는 녀석인데

로맨스 소설부터 비누까지 다양한 걸

밀매하거든요. 일종의 행상인인 거죠.

어떻게 공룡을 복원했는지는 다들 알지만

사실 그 공룡들 지능이 꽤 높다는 건

고의적으로 정부에 의해 은폐되었어요.

사람들은 자신들만큼 똑똑한 존재를 보면

처음에는 재밌어해도 이내 겁을 먹거든요.

리스트 만들어서 싹 죽여야 하는 건 사실

해맑게 웃는 가정용 로봇이었는데 말이죠.

19. 릴레이 밸브형 연료투입구 사용법

소형 페리보다는 이 배가 훨씬 낫겠지만,

동력원이 많이 필요한 건 사실이죠.

업그레이드에 투자를 많이 한 것과 별개로

시시때때로 연료를 채우라고 할 겁니다.

주로 위험요소를 피해 우회로를 탈 때요.

겨울 땔감처럼 막 집어가는 게 아니에요.

야간에 연료투입구를 열고 작업하세요.

20. 거주시설용 발전기

모든 것 중에서 전기가 제일 유용하죠.

두랄루민 팬을 돌리면 여름에 시원하고요.

가장 좋은 건 온수 샤워일 겁니다.

안전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안 그래요?

전력을 아끼라는 말입니다. 멍청하긴.

21. 다른 주의사항

용기. 패배를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세요.

엑소더스는 노예들이 결국 가나안을 찾는

동화 같은 해피엔딩을 맞았지만,

봉투에 나노봇 넣어서 뿌리는 적하고

한바탕 핵전쟁을 벌이고도 패배했는데,

거기서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거나

종국에 모든 게 잘되길 바라면 안되죠.

이번 일이 잘 끝나서 당신을 피난처까지

에스코트하고 집을 배정해줄 수 있다면

뿌듯할 겁니다. 너무 낙관적이었네요.

리더로서 당신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

어쩌면 여기까지 오는 당신의 여정은

라이터를 유류고에 던지며 끝날지도요.

언제가 되었든,

어디에서 출발하든,

병들었건, 건강하건,

백발이 성성하건, 주름살 하나 없건,

신께서 당신과 함께하길.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식탁에 둘러앉아

랍스터를 썰면서 웃을 수 있기를.

믿음이 보상받고

애정이 다시 피어오르길.

있는 것에 감사하고, 없는 것을 애도하며

다 털어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추신:

  적막이 감도는 밤바다로 들어서면

  기존의 세계는 사라집니다.

  잊어야 할 것들이 있다면 모두

  지금 가슴에 묻으세요.

  마지막으로 미련을 내려놓을 기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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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올린 '처음이 가장 중요해요'랑 세계관만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