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설치만 하고 프로그램들을 지우지를 않아서 그런지, 컴퓨터 용량이 부족하다.
귀찮았지만 필요 없는 걸 몇 개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삭제를 하다 보니 의외로 기분이 좋다.
마치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지울 걸 그랬나?
나는 이 참에 안쓰는 프로그램들을 모조리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한참 쭉쭉 프로그램들을 지워 나가고 있는데, 경고창이 떠올랐다.

[삭제 할 수가 없는 파일입니다.]

“엥?”

내가 삭제하려고 한 건 2년 전에 설치했던 메모 프로그램이었다.
그냥 메모장일텐데 왜 이걸 삭제 못할까?
다시 마우스를 꾹 눌렀다.

[삭제 할 수가 없는 파일입니다.]

메모장의 경로를 찾아 들어가서 폴더 삭제를 눌렀다.

[관리자가 허용하지 않는 액세스입니다.]

왜 안돼는 거야?
갑자기 오기가 생겨서 이걸 어떻게 해서든 지워버리고 싶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검색을 조금 해보니 마음에 드는 블로그 하나가 나왔다.

[강제 삭제 프로그램]
성능 확실합니다.
믿고 사용하세요.

옆에 있는 파일 링크를 누르니까 다운로드가 된다.
설치까지 하고 곧바로 메모 프로그램 삭제하기를 눌렀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왜 안 지워지지.
삭제 프로그램 성능이 좋다더니 영 별로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프로그램들을 찾아봤지만 전부 안됐다.
한 프로그램은 바이러스이길래 시간만 날렸다.

내 손가락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걸 없애야 한다. 이걸 없애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너무 화가 났다. 왜 삭제가 안되는 거지?
그저 안쓰는 메모 프로그램일 뿐이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마치 내 아늑한 공간에 외부인이 칩임해서 밖으로 안 나가는 느낌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한참동안 방법을 찾아 헤멨지만 전부 소용이 없었다.
이 메모 프로그램은 도저히 지워지지를 않는다.
바이러스인가 싶어서 백신을 깔아서 검사도 해봤지만, 바이러스도 아니란다.
정체를 알기 위해서 나는 한번 메모장을 열어 봤다.
2년 전에 내가 썼던 일기장이었다.

[2021년 3월 11일]
오늘은 서연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연이는 항상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좋은 말과 조언을 해준다.
그녀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2021년 3월 12일]
서연이가 예쁜 차림으로 나를 반겼다.
우리는 오늘 놀이공원에 갔고, 정말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아쉬웠지만 서연이를 보니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서연이 하나만 있으면 행복하다.

[2021년 3월 13일]
오늘은 서연이와 하늘공원에 놀러갔다.
하늘공원은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라 뜻 깊은 장소이다.
…..
…
..

행복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지만,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서연이와는 2년 전에 끝이 안좋게 헤어졌으니까.
이 메모장을 보니까 그 순간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연이는 갑작스럽게 만나지 말자는 말만 남기고 떠나가버렸다.
다시 연락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모두 무시를 당했다.
머리가 아파온다.
힘들게 잊었는데, 서연이가 다시 생각나다니.
좋았던 추억들도 이제는 전부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었다.
그런데 일기장을 보자 서연이와 함께 했던 장면들이 자꾸만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너무 괴롭다.
나는 메모 프로그램 삭제하기 버튼을 마구마구 눌러댔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이걸 삭제하지 못한다면, 서연이가 끊임없이 생각날 것 같았다.
이제는 단순한 오기가 아니다.
이 메모 프로그램은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나는 결국 포맷을 하기로 결정했다.

잠시후.
포맷을 하고 바탕화면을 보니, 메모 프로그램이 사라져 있다.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목에 걸렸던 생선 가시가 없어진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한동안 인터넷을 둘러보던 나는 자기 위해서 컴퓨터를 끄려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바탕화면에 없어졌던 메모 프로그램이 떡 하니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포맷을 하고 웹서핑만 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왔다.
답답한 느낌과 동시에 이제는 두려움까지 느껴진다.
서진이도 자꾸만 떠올랐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컴퓨터 전문가를 찾아서 물어봤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 있어요. 강력한 바이러스는 탐지가 안되고 포맷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아예 하드를 바꾸는 게 편할 겁니다.”

나는 컴퓨터를 바꿔버렸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로 산 컴퓨터에 몇시간도 안돼서 메모 프로그램이 나타났다.
이쯤돼면 남들한테 말을 해도 믿지를 않을 것 같았다.
당장 현실로 겪고 있는 나로써도 이건 너무 말이 안됐다.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며 메모 프로그램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다.
하지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새로 산 컴퓨터에 메모 프로그램이 나타날 수는 없는 거였다.
몇 시간 가량 계속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 PC방에 들어갔다.

로그인하고 게임을 하던 나는 문득 바탕화면을 바라봤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보았다.
본 것일 뿐이었다.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다.
그런데 있었다.
바탕화면 귀퉁이에 내가 그렇게 지우려고 했던 메모 프로그램이 존재했다.

이럴 수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메모장을 열어 보았다.
내 컴퓨터에 있는 일기장과 내용이 전부 똑같았다.
아니 어떻게 PC방 컴퓨터에 이게 있을 수가 있는 거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덜떨 떨리는 손으로 삭제버튼을 눌러보았다.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이 것마저 똑같다니.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삭제 버튼만 하염없이 눌러댔다.
모니터에 경고창이 가득 차기 시작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뇌가 전원이 꺼져버린 듯, 멍한 상태였다.

“뭐야. 이사람 왜 이래?”
“경고창은 뭐 저렇게 많아?”

사람들이 소근 거리는 소리가 들릴 쯤에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클릭을 멈췄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 불길한 상상을 했다.
만약 내 일기장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나의 신상정보와 사생활들이 모두 노출 된다.
인터넷으로 널리 퍼져버릴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눈 앞이 깜깜해진다.
내가 쓰는 컴퓨터마다 메모장이 나타나는 것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아니, 아예 비교가 안됐다.
이건 현실적인 일이었다.
내 모든 정보가 남들에게 알려진다니.
인생이 끝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일기장에는 중요한 정보들이 많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 프로그램은 삭제가 전혀 안된다.
그렇다고 PC방 사장님한테 컴퓨터를 버리라고 말한다면, 나를 아주 미친놈 취급할 것이다.
고민하다가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이 컴퓨터를 부숴버리는 것.
과격하지만 그보다 좋은 해결책은 없었다.

곧바로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전선들을 모두 뜯어내고 본체를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주먹으로 거침없이 치기 시작했다.
손에서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모든 힘을 다해서 팔을 휘둘렀다.
컴퓨터가 점차 찌그러져간다.
속 안에 부품들이 보이자, 나는 부수는 속도를 높였다.
그 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뭐 하시는 거에요?”

PC방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가 나를 막아 세우는 걸 충분히 이해했지만, 나의 인생이 걸린 문제다.
절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알바생을 밀쳐내고 컴퓨터를 계속해서 부쉈다.
이제 부품까지 부수려고 하는데, 남성 서너명이 와서 팔을 붙잡았다.

“그만 해요!”
“뭐하는 겁니까?!”

시간이 더 필요하다.
컴퓨터 부품은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
남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도무지 놔주지를 않는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신상정보와 사생활이 인터넷에 퍼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컴퓨터 케이스의 파편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내 팔을 잡고 있던 한 남성의 복부에 쑤셔 넣었다.
쓰러지지 않기에 한번 더 찔렀다.
그제야 남성이 바닥으로 꼬꾸라졌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사람을 찔렀어!”

무시하고 컴퓨터에 주먹과 발을 계속 휘둘렀다.
운동부족이었는데 갑자기 많이 움직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손에서 많은 피를 흘려서 그런걸까.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지만, 의식은 점차 흐려져 갔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컴퓨터를 부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주변에는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내가 눈을 끔뻑이고 있자, 한 경관이 다가왔다.

“당신이 흉기로 찌른 사람이 어떻게 된 지 아십니까?”

케이스 파편으로 찌른 걸 말하는 건가?
내가 고개를 젓자 경관이 대답했다.

“죽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이럴 수가.
그 사람이 죽었다고?
머리가 아파왔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었다.
경찰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메모 프로그램을 발견 했나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경관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보니, 내 일기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