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이 완성된다는 것은 때론 쉬운 일이다.
그것은 매번 용광로에서 벌겋게 다스려진 쇠 같아서
형（形）을 갖춘 이후에도 다시 어느 것으로든 변할 수 있는데.
견고한 사랑이 견고한 증오로 뒤바뀌는 것도.
어쩌면 찰나（刹那）에 가능하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 효장세자를 얻는다.
하지만 그는 9세의 나이로 단명한다.
죽음의 원인으로는 독살설이 거론되는데, 영조 6년 효장세자와 옹주를 매흉（埋凶 : 저주）한 궁인들을 친국（임금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것）한 기록이나 선의왕후의 석연치 않은 죽음 등이 독살설의 주요 정황이다.
하나 뿐인 아들을 잃은 영조의 마음은 절망감으로 가득했다.
"종묘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
영의정 이광좌와 병조 판서 조문명을 대하며 왕은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서장자를 떠나보내고 묵은 해를 보내길 7년, 왕의 나이 42살에 기다리던 아들을 얻는다.
42살...
조선 임금 27명의 평균 수명이 47세였다는 걸 감안했을 때, 후사를 얼마나 기다렸을지. 자신이 덜컥 죽기라도 하면 조선 300년 종사가 그대로 끝나 버릴 수도 있었다.
왕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윗대 임금들）에 배알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아이의 이름은 너그럽다는 뜻의 훤（愃）으로 지었다. 태어난 날 원자의 명호를 받았고 이듬해 세자에 책봉되었다. 조선의 세자 중에서 최연소인데 왕의 나이를 감안해 신속히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듯 원자는 태어난 지 4달 만에 스스로 기었고, 7달 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다. 그리고 2살엔 천자문을 배워 60자를 써냈다.
어느날 궁녀들이 다식을 내왔다. 원자는 수（壽: 목숨） 자와 복（福） 자가 박힌 과자는 집어 먹었지만 팔괘（八卦）를 박은 것은 먹지 않았다.
"그것도 잡수소서."
어린 원자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팔괘는 우주의 근본이니 아니 잡숫겠다."
또랑또랑한 말에 담긴 어설픈 위엄에 궁녀들은 입술을 닫고 겨우 미소지었다.
"하늘, 땅, 못, 불, 지진, 바람, 물, 산. 그것들을 엄숙히 대함에 어찌 과인을 보고 웃는 것인가. 주역을 꺼내와라."
하명을 받은 궁녀가 책장을 뒤져 주역（유교경전）을 가져와 내려놓았다. 책을 뒤적인 원자가 펼쳐낸 것은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복희씨（3황5제 중 중국 최고의 제왕）를 그린 장이었다.
"높이 들라."
원자는 궁녀가 들고있던 책속 복희의 초상 앞에 엎드려 절했다. 방 안에 있던 내인들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렸으니. 원자의 나이 3세 때의 일이었다.
본격적인 세자수업이 시작되며 세자에게 걸었던 큰 기대와 각별했던 사랑은 이내 실망으로 바뀌어갔다.
겨우 동몽선습（어린이 학습서）을 다 읽고 '간신히' 읽었다고 하는가 하면,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는 대조의 물음에 싫을 때가 많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정직함을 칭찬했지만 학문적 성취를 강력한 왕권의 근본으로 생각했던 영조는 그런 세자가 흡족하지 않았다.
"음식은 한때의 맛이요. 학문은 일생의 맛이다. 배부르면서도 체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학문뿐이다."
자신에게 철저히 엄격했던 영조는 세자 역시 그러길 바랬다.
봉황이 울어 문왕의 세상이요
기린이 나와 공자의 시절이라
용이 오르자 비 내리고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
14세가 된 세자의 활달한 기질이 묻어난 시다. 이를 본 영조는 소대에 시좌한 세자에게 묻는다.
"한나라 문제와 무제 둘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
"문제의 기상이 훌륭합니다."
"그 대답은 날 속이는 것이다. 너는 분명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것인데, 어찌하여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가?"
"문제와 경제의 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
"너는 앞으로 문제와 경제의 반 정도만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번 한나라 무제의 모습이 보여 너를 경계했는데, 역시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는 글귀가 있어 기질이 차분해보이지 않았다."
시독관 이이장이 말했다.
"기질이 승한 것 같지만 매우 안정되어있고 무겁습니다."
"촌음을 아끼라는 옛말이 있다. 춘방의 신하들은 서연이나 소대에서 성심을 다하여 세자로 하여금 학문에 정진하게 하라. 그리하여 임금 노릇하는 왕도를 깨닫게 한다면, 종사에 큰 다행이겠다."
한나라의 고조인 문제는 문（文）을 숭상하는 통치를 했고, 무제는 무（武）를 숭상하는 통치를 했다. 영조는 세자가 문제와 같이 덕 있고 진중한 호학군주（好學君主）가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세자의 승한 기운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신령스런 칼이 오래도록 땅에 묻혔으나 검광은 북두칠성을 쏘고,
붕새가 날자 그 날갯짓 하늘을 덮네.
대장부가 뜻을 얻음은 모두 이와 같으니,
어찌 산수에서 세월을 보내리.
결진! 진을 짜라!
조천! 무기를 하늘 쪽으로 높이 들어라!
대적! 적과 대적하라!
15세가 된 세자가 청룡언월도를 하늘 높이 들었다. 증조할아버지인 효종이 남긴 언월도였다. 영조의 눈은 정확했다. 세자는 문（文）과는 거리가 멀었다.
옹골찬 기합소리와 함께 언월도가 바람을 가르자 나무 기둥에 올려놓았던 수박이 마치 뇌수를 터트리듯 벌건 과육을 뿜으며 터져나갔다.
가슴이 답답했다. 폐부를 무언가로 눌러놓은 듯. 몸을 호되게 움직여봐도 그것은 도깨비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쯤 안질이 생겨 충혈된 세자의 눈을 염려한 내관이 말했다.
"해를 오래 쏘이고 땀이 나면 안질에 좋지 않습니다."
그만하라는 말을 담진 않았다. 세자는 새롭게 올려진 수박을 다시 박살냈다.
"몸이라도 실컷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으로 답답함이 모이는데 내 어찌할까. 가슴이라도 갈라 확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자가 무언갈 깨달은 듯 순간 희번뜩해진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내관들은 눈길의 끝에 자신들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이를 알아본 것은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였다. 홍씨의 눈엔 보였다.
광증의 싹이.
세자의 나이 열 다섯.
영조 25년에 시작된 대리청정은 세자를 파란（波瀾）으로 몰고가기 시작한다.
끝.
오오옷!! 지난 화 추천 9개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당~!
좋은 시간들 보내시고 다음 화에서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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