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빨리하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그저 눈뿐이었다.

거칠게 나부끼며 산길을 뒤덮은 눈.

일기예보를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할 때 포기 하고 하산했어야 했다.

가볍게 내리다 그칠 거라는 캐스터의 말과는 달리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정상에 있는 산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해돋이를 보며 새해 첫날을 경건하게 맞이하겠다는 생각이

날 이 요동치는 백색의 세계에 가둬버린 것이다.

대략 산 중턱쯤인 듯하여 뒤늦게 하산을 결정했지만,

악의라도 가진 듯 쏟아지는 눈이

안 그래도 거친 산길을 가린 덕에 조난 아닌 조난을 당하고 말았다.

꾸역꾸역 경사를 따라 내려가다가 혹여나 사고라도 나는 날엔 그야말로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을 떠올리자 오히려 침착해졌기에 우선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최대한 둘러보았다.

온통 백색이 일렁이는 세상에서 단 한 군데.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풀과 낙엽으로 무성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자연 동굴.

제법 거리가 되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때문에 주저할 겨를도 없이 쏟아지는 눈을 헤치며 동굴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와 차갑게 몸뚱이를 두들기던 눈발에서 해방되자

금세 안도감이 새어 나왔다.

식량도 있고. 침낭도, 불도 있다.

이 동굴에서 조금만 버티다가 눈발이 그치면 어렵지 않게 내려갈 수 있을 터였다.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을 한 스스로를 칭찬하며 안을 둘러보았다.

동굴은 좁았지만, 높이가 높아서 굳이 허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 깊지는 않아도 추위를 피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기에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며 손전등을 켠 순간.

눈보라가 가져다준 추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한기가 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예상대로 동굴은 오래 가지 않아 끝났다.

하지만 그 좁은 동굴 안은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다 타버린 양초와 놋그릇. 오색천. 그리고 이름 모를 부적들과 섬뜩한 그림.

가장 안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것들이 차려진 제사상 따위까지 있었다.

그것만 해도 오금이 저려올 지경이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멍석 위에 무당 옷을 입은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깃털을 꼽은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넓은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이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말라 있는 걸 보니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게 분명했다.

시체.

제법 담이 강하고 겁이 없다 자부했지만, 진정하기 위해 한참을 심호흡하며 심장을 움켜쥐어야 했다.

대체 어떤 사연으로 무당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는지는 알 방도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상황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열어보니 역시나 통화권 이탈이었다.

물론 어찌어찌 어딘가에 연락을 해 봐야 딱히 도움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이 지금 나갔다간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결국 눈이 멎을 때까지 이 기괴한 곳에서 시체와 함께 불쾌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우선을 시체가 시야에 닿지 않도록 몸을 돌리고 가방을 내려 내용물을 확인했다.

애초에 산에서 하루를 보낼 계획이었기에 든든히 준비했었다.

버너와 코펠은 물론 물과 식량도 충분했다.

담요와 침낭도 챙겼으니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일은 없다.

그저 하루 정도. 최악의 최악이라도 이틀 정도만 시체 옆에서 시간만 보낸다면 아무 문제 없다.

나중에 산을 빠져나가면 그때 경찰에 신고하든 하면 된다.

다시금 냉철한 결정을 내리고는 물을 꺼내어 마셨다.

여분의 옷도 챙겼기에 버너에 불을 붙이고 눈에 흠뻑 젖은 양말과 겉옷을 벗어 말렸다.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뒤에 있는 시체가 내 귓등을 달구는 것처럼 신경 쓰였지만,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눈 오는 산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여전히 매섭게 내리는 눈이 서둘러 끌고 온 어둠이었지만,

내가 있는 동굴까지 쫓아오진 못했다.

은은하게 밝힌 손전등 불빛.

두꺼운 침낭 안에는 핫팩을 두 개나 넣어놔서 훈훈했고,

라면 한 개. 에너지바 한 개. 초콜릿 반 개로 몸도 든든했다.

여전히 신경 쓰이는 시체만 아니면 안락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지금은 잠을 청하는 게 맞다.

내키지는 않아도 이곳에서 맨정신으로 멀뚱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고,

무엇보다 산에서 내려가기 위한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깊지 않은 동굴 덕에 시체와의 거리는 불과 2ｍ 남짓.

담담해 지려 해봐도 온갖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빠져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덕에 손전등을 끄는 대신 약하게 낮추었다.

잘 때 빛이라도 있으면 조금은 안심이 될 터였다.

잠 못 들고 밤새워 뒤척이면 어쩌나 하는 내 걱정과는 달리

따뜻한 침낭 안에 몸을 눕히자마자 피로와 포만감에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

잠을 깨우는 그 소리는 내 눈을 뜨게 함과 동시에 따뜻하게 데워진 몸을 차갑게 식혔다.

좁은 동굴 속을 은은히 채워가는 방울 소리.

몸이 떨려 오고 있었다.

‘딸랑딸랑’

와중에도 방울은 마치 누가 흔들고 있기라도 한 듯 일정한 주기로 울려대었다.

내가 보지 못한 방울이 어딘가에 매달려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무시한 채 다시 잠들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소리가 너무 신경이 쓰인다.

시끄럽다기보다는 정신이 또렷해질 정도로 무서웠기에 이걸 해결해야 했다.

가빠오는 숨을 진정시키고는 몸을 일으켰다.

약하게 켜진 손전등은 내 발치도 제대로 비추지 못했으니

몸소 일어나서 손전등을 들고 소리가 나는 방울을 찾아야 한다.

‘딸랑딸랑’

손전등을 들고 천천히 동굴 가장 깊은 곳을 비추었다.

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붉은 무언가가 빛을 가로막아 큰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화려한 붉은색의 소매 사이로 내민 검푸른 손.

그 손이 방울을 흔들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딸랑딸랑’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몸의 반응이 빨랐기에

정신을 차리는 순간 동굴이 무너질 듯 소리를 지르며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해가 떨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밭을 급히 뛰어나간 대가는 참혹했다.

한순간에 미끄러져 한참을 구른 뒤 간신히 멈추고 나자

추위와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잠시 이를 악물어 고통을 삼킨 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왼쪽 다리는 접질렸는지 욱신거림이 심했고 왼팔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다른 부분은 단순 타박상 정도인 듯했지만, 문제는 추위였다.

침낭에서 바로 뛰쳐나왔기에 신발도 없이 두꺼운 양말이 전부였고,

겉옷 역시 동굴에 벗어놓은 채였다.

손전등까지 던져버리고 왔으니

이대로라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죽음을 향해

아주아주 천천히 다가갈 게 뻔했다.

몸의 고통과 생존 본능은 공포심을 이기기에 충분했다.

절뚝거리며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전등 불빛이라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한층 더 사나워진 눈발을 뚫고 나오진 못한 모양이었다.

일단은 내가 굴러 내려온 경사면을 따라 조금씩 움직여 보기로 했다.

그마저도 늦장을 부린다면 금세 새로 내린 눈이 덮어버릴 터였다.

맨살이 드러난 손과 얼굴, 목덜미의 감각이 사라져 갈 때쯤에서야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걸음을 멈춰야 했다.

‘딸랑딸랑’

동굴 안에서 또렷하게 방울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억지로 눌러놓았던 공포심이 고통을 누르고 스멀스멀 기어 나오며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건 대체 뭘까?

여전히 산 사람으로 생각되진 않는다.

절대 살아있는 사람일 수 없다.

귀신이라거나 그 비슷한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 외의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고민할 시간은 없었기에 주저하면서도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에 마른침을 삼키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안에 누구 있어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여전한 방울 소리였다.

이왕 이리된 거 대담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떨어진 손전등을 집어 들고 안쪽을 비추었다.

제발 없기를 바랬지만 여전히 그건 그 자리에 서서 방울을 흔들고 있었다.

다시금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용기를 내어 좀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영화 따위에서 자주 보던 붉은 옷을 입은 무당.

손전등을 조금 더 높이 들어 얼굴 쪽을 바라보니

챙 있는 모자 아래로 생기 없이 쪼그라든 얼굴이 보였다.

미라처럼 눈두덩이가 쑥 들어간 바싹 마른 얼굴.

시체가 분명함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서서 방울을 흔드는 기괴한 모습.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이를 앙다문 것도 모자라 발가락까지 힘을 꽉 주어야 했다.

굳어진 몸이 풀리는 데는 또다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보고 있는 것이 무서웠지만 고개를 돌리는 건 더 무서웠기에

그것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조금씩 뒤로 물러나 젖은 옷을 벗고 버너를 켜서 몸을 말렸다.

‘딸랑딸랑’

혹여나 내가 잠든다면, 그게 아니라도 한순간이라도 한눈을 판다면,

그게 갑자기 내게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덕에 몸을 침낭으로 감싼 채 그 무언가를 노려보며 밤을 지새울 뿐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는지 동굴 안으로 밝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벽녘에 까무룩 잠이 든 것 같았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동굴 안쪽은

처음 왔을 때처럼 널브러진 무당의 시체가 있었다.

그렇다고 어제 일이 꿈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통증이 남은 발목이 그를 증명했고, 어제와는 전혀 다른 자세의 시체가 그를 증명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날이 밝았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다행히 눈은 그쳤기에 조심만 한다면 어떻게든 내려갈 수 있다.

어젯밤과는 반대로 시체 쪽엔 눈길도 주지 않고는 짐을 챙겨 동굴을 빠져나왔다.

애초에 그리 높은 산도 아니었고 그리 험하지도 않은지라 다친 다리로도 내려오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별일 없었다면 경찰서든 어디든 연락해서 동굴에 대해 이야기를 했겠지만

도저히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곧장 집으로 향했다.

대신 마침내 터지는 휴대폰을 꺼내어 몇 가지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무당. 시체. 방울. 동굴.

몇 가지 단어를 조합해서 검색하다 보니 눈길을 끄는 자료를 발견했다.

무속인이라는 누군가가 오래전 올린 게시글이었다.

‘..... 때문에 잘못된 신을 섬기게 된 무당은

악신의 종복이 되어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노예로 부려진다.

고서에는 악신을 모시던 무당이 죽은 채로 굿을 올리고 양밥을 한 기록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양밥이라 함은 보통 액을 막는 걸 의미하나, 여기서 말하는 양밥이란 저주에 가깝다.

악신에게 먹일 제물을 꾀어오고 바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더 찜찜해진 기분이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전부 잊기로 했다.

무사히 빠져나온 이상 내가 잊기만 하면 전부 없었던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집에 도착해서 몸을 씻고, 짐을 정리하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청소까지 깔끔하게 마친 뒤, 기분 좋은 노곤함에 침대에 누웠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마침내 안정감을 느끼며 막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딸랑딸랑’

귓가에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던 그 소리는 내 잠을 깨웠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자 있어서는 안될 지독한 한기가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어두운 동굴.

눈은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었고 버너도, 손전등도 꺼진 완전한 어둠 속.

‘딸랑딸랑’

방울 소리만이 청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