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걸음에 보폭을 맞추던 내관이 박석 모서리에 걸려 넘어졌다. 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한치의 내색도 없이 인정전으로 향했다. 내관은 상왕이 비를 맞을까싶어 슈룹을 들이밀며 제 엉덩이를 몽땅 적시고 있었다.
신하들의 옷가지도 젖기는 매한가지. 머리 속으로 상왕의 생각을 읽어보려 안간힘을 쓰느라 들이치는 비는 신경쓸 꺼리가 못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귀에 맞게 말을 다듬어 내봐야 종국에 돌아오는 것은 임금의 불호령일 것이 뻔했다. 소식을 들은 내인들은 서둘러 인정전의 불을 밝혔다.
"세자가 저 모양이 될 때까지 경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가." 용상에 앉은 왕의 첫마디였다. 눈살을 시위에 걸어 신하들을 쏘아보다가 좌의정 김상로에게서 멈추었다.
김상로는 을해옥사（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 이후 세자 보호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영조 10년（173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수많은 공직을 두루 거쳐 최고 지위인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노론 세력의 주요 인물이다.
고개를 조아린 김상로는 입을 열었다.
"매번 소조（小朝:세자를 이르는 말）께 예학（譽學）과 명덕（明德）에 힘쓰시라 극진히 아뢰오나 제 정성이 부족하여 그 미침이 소조의 마음까지 닿지 않았습니다. 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춘방（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아）의 상하번 관리들에게 긴히 물으니 소조의 어지러움증이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셔서 서연（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고 토론하는 것）을 자주 파（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얼굴 뵙고 공부하기를 품할 때마다 번번이 몸이 편찮으시다는 하교를 내리시고, 힘들게 주연을 열 때면 말씀하심이 매우 간단하며 어려운 것을 물으시고 듣는 것이 드뭅니다. 전후 2년 동안에 한 부의 <맹자>는 아직도 끝마치지 못하였고, 몇 권의 <강목>을 겨우 앞부분만 보셨으니, 예학의 성취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이 근심이 어찌 기울어지는 집의 위험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준비해둔 말들이었다.
동궁의 허물을 질타하는 김상로의 간언을 듣자. 차가운 호흡이 왕의 입술에서 입김을 서렸다. 급랭되는 분위기를 두고 볼 수 없었던 한 대신이 급히 화기（和氣）로운 말을 쏟아냈다.
"무릇 사람이란 다른 병이 없고 일신이 편안한 뒤에라야 온갖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법입니다. 서연을 번번이 폐기한 것이 어찌 저하께서 즐겨서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몸을 잘 조리하는 방법과 마음을 편안히 하는 방도를 누누이 진달하였습니다. 심지어 신께 심신을 보양할 방도를 되려 물으셨으니 , 저하 스스로 극기하시는 공력과 도움을 구하는 정성이 누구보다 탁월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매양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꾸짖으시며 임금께 불효함을 안타까워하니 신의 정성이 얕고 보잘 것 없음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부자의 천성은 하늘이 맺어준 것입니다. 어린아이나 천민도 자기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세자 저하의 대조（大朝）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순수한 조행은 분명 어릴 때부터 부족한 바가 없었습니다. 거듭 아뢰오나 저군의 행동은 마음의 병에 원인이 있으니 큰 꾸짖음은 병세를 더 악화시킬 것이옵니다. 대조께서 따뜻하게 품어 다시금 차근히 좋은 방책을 끼쳐주시면 소조께서도 원만하고 왕성한 운수를 잡으시어 분명 나라에 태평한 기운을 가져올 것입니다."
달변이었다. 달변의 주인은 병조판서 홍봉한으로 세자의 장인. 즉,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였다. 영조의 척신으로 노론의 영수까지 지냈으며 김상로와 마찬가지로 영의정까지 올랐다.
김상로와 노론 대신들은 홍봉한의 언사를 마뜩찮게 생각했다. 물론 그는 세자의 장인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나름의 셈법이 있었다. 그래도 당파의 논리를 자꾸 거스르니 지나치게 자신의 실리만을 추구하는 건 아닌지 노론 대신들의 속이 끓었다.
왕의 표정은 노기로 충만해 있었다. 이미 세자에게서 살가운 애정을 거둬들인지 오래였다. 미움의 근본을 찬찬히 따져 제거할만한 이유도 딱히 찾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국본의 자리에 저런 미치광이같은 아들이 있다는 것이 아비로서... 왕으로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수거해온 세자의 잡동사니에서 떨어진 빗물이 내관들의 발을 적셨다. 이제 막 경칩이 지난 때라 젖은 발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찰나 왕의 낌새를 눈치챈 내관들은 발을 멈추었다.
"낙선당에서 가지고 온 것들을 읇어 보아라."
"네. 개와 고양이등을 그린 그림 10점과 잡서 14권이옵니다."
"잡서들은 어떤 것들이냐."
"네. 무목왕정충록（武穆王貞忠錄）과 손방연의（孫龐演義）, 전등신화（剪燈新話）,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구운몽（九雲夢） 등이 있사옵고, 나머지는 이름이 없는 패관소사（稗官少史）들이옵니다."
황당할 따름이었다. 한 나라의 국본이 한창 공부에 매진해야 될 때에 소설책들을 한가득 가지고 있다니. 이런 망나니 같은 놈.
"불민하도다.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며 학문에 매양 부지런해도 모자를 터에. 어찌 저런 잡설들에 눈을 빼앗길 수 있는가. 이것은 재앙이나 다를 바 없다. 예학과 역사에 능하지 않고 나라를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 어디 가능하겠는가."
섣불리 입을 여는 신하가 없었다. 그때 예조판서 원경하가 입을 뗐다.
"능히 아시는 바와 같이 무목왕정충록이나 삼국지연의는 많은 교훈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 저하께서 공부에 지쳤을 때 마음을 달래고저 사소히 지녔던 것일테니 너무 염려치 마오소서."
"그럼 구운몽은 누구의 작품인가?"
원경하가 바로 대답했다.
"서포 김만중이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담고 있는가."
"일장춘몽의 내용에 유불선 사상이 고루 섞여 있습니다. 우아하고 품위있는 문체는 그 역시 배움의 가치가 충분합니다."
"쓸데없도다. 문체가 어떠한 들 허망한 욕망성취의 내용을 담은 것이 국본에게 어떤 가치가 될 수 있겠는가."
신하들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비는 여전했으나 천둥과 번개가 없으니 더이상 천견（天譴）은 없을 것이다...
상왕의 노여움도 조금은 풀리겠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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