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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오늘 안에 당도하긴 영 틀렸구만.”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걸음을 멈춘 외눈박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들판이 끝없이 이어진 평원은 민가는커녕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음 마을까지는 거진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하기에 한동안은 혼자 있어야 할 듯 했다.
그나마 외눈박이 서있는곳 멀지 않은곳에 홀로 고고히 서있는 나무 한그루가 벗이라면 벗이었다.
“뭐 오랜만에 혼자서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왕 이리된거 갈길도 멀고 하니 다리쉼이나 좀 할까?”
그렇게 말한 외눈박은 삿갓과 짐을 옆에 풀어놓고는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여유가 있는건 좋지만 아무래도 입이 좀 심심한 모양이었다.
괜시리 한적한 들판을 쭉 둘러본 외눈박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열었다.
“수가 없는건 아니지. 들어줄 이 하나 없어도 이 나무가 말벗이요. 바람이 청중이니.
듣는이 없어 그저 사방에 흩어질 이야기.
어디 한번 마음 놓고 풀어보도록 할까?”
외눈박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자! 이야기꾼 왼눈박이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는 저 산 넘고 들 질러 멀고먼 마을.
세월지나 잊혀진 어느 마을에 살던 못난이 청년 박규태에 대한 이야기요!”
규태란 청년은 훌륭한 무인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박씨 집안 외동아들인데
그 집안에서는 이놈이 아주 골칫거리 청년이었지.
왜 그런고 하니, 본디 타고난 핏줄이 좋아 힘도 좋고 재능도 넘치는데
이놈이 이게 영 놈팽이 같이 노는데만 힘을 쓴다 이거지.
어릴때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니더니만
부모말도 안듣고 까불다가 눈깔도 한짝 잃어버리고 말이야.
애꾸가 되었으니 정신을 차릴만도 하건만, 그래도 정신 못차리고 놀러다니기만 한다 이거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제 그 태산같던 박씨 집안도 그 운이 다했다 수근거렸지.
저 아들놈이 집안을 망쳐놓을건 뻔하디 뻔한 일이었으니.
규태의 아버지는 틈날때마다 규태를 불러 조용히 꾸짖었지.
“규태야. 내가 널 관례 전부터 아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네가 짊어진 짐이 크기 때문이다.
내가 왜 큰 대가를 치르면서 깜북이를 퇴치해 널 구해주었는지 아느냐?
넌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왜 너에게 매를 들지 않고 언성을 높이지 않는지 아느냐?
넌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네가 내 뒤를 이어 우리 박씨 가문의 이름을 빛내줄
중요하고 또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잠시간의 방황이라면 내 눈감아 주겠다.
하지만 날 실망시키는 일.
우리 가문을 실망시키는 일이 일어난다면
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 똑똑히 기억하거라.”
하나하나 비수가 되어 날카롭게 찔러대는 말임에도 규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좀처럼 싫은 소리를 하지 않던 규태 어머님도 규태를 데려다 앉혀놓고 이리 말씀하셨지.
“설아. 나뿐 아니라 네 아버님. 그리고 우리 집안에서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구나.
네겐 재능이 있으니 그걸 꽃피울만한 노력만 있으면 분명 큰일을 해낼게야.”
관례를 치른 어른임에도 여전히 아명으로 불러주시는 자상한 어머님까지 그리 말씀하시는데
규태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
아니 사실 정신을 못차렸다기 보다는 그저 도망치던 거였어.
자신이 가진 능력에비해, 해야 할 것과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 컸거든.
최선을 다했다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올까 두려웠던 게지.
그래. 그래서 비겁하게 도망만 다녔던거야.
바보행세를 하고. 놈팽이 행세를 하면서.
그대로 시간이 지났으면 그냥 탕아가 되어버리던가
아니면 마지못해 정신 차리고 그럭저럭 뭐라도 되었거나 했을텐데,
안타깝게도 박씨 집안에 비극이 찾아왔지.
어느 칠흑같이 어두운 밤.
이 철없는 놈이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주색잡기에 빠져있는 동안
불이리떼가 박씨 집안을 습격해 버린거야.
불이리는 온몸이 불타고 있는 늑대요괴인데 너무 뜨거워서 주변 모든걸 태우는건 물론
목을 쳐낸 시체도 불길이 사그라 들지 않는 아주 지독한 놈들이었지.
박씨네가 이름있는 무인집안이라지만 야밤에 달려든 불이리떼를 온전히 상대하는건 무리였어.
규태 아버님의 신출귀몰한 무예덕에 그 많던 불이리를 다 잡아 낼 수는 있었지만,
식솔들과 하인들은 전부 불에 타죽거나 물려 죽었지.
요괴들을 잡아낸 그 자신 역시 화상을 심하게 입고 탈진한 상태라 오래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었어.
그 와중에 이 철없는 규태놈이 뒤늦게 돌아온거지.
규태는 난리가 난 집안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버님에게 달려갔어.
아버님을 살리려 해봤지만 이미 늦었지.
어쩔줄 모르고 있는 규태에게 아버님은 말했지.
규태는 원망과 규탄과 꾸짖음을 받을거라 생각했지만 아버님은 그러지 않으셨어.
“규태야. 내가 널 관례 전부터 아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널 어른으로써 존중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왜 큰 대가를 치르면서 깜북이를 퇴치해 널 구해주었는지 아느냐?
넌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왜 너에게 매를 들지 않고 언성을 높이지 않는지 아느냐?
넌 누구보다 소중한 내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간 내 욕심으로 너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려 해서 미안하다.
이제 아무런 걱정 없이 모든 굴레를 벗고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도록 해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들을 조용히 채찍질 하던 아버지의 본심은
그저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아버지였던 것이지.
그 말을 끝으로 아버님이 숨을 거두시자 규태는 다짐했어.
아버님의 유언을 지키지 않기로 말이야.
이런 짓을 저지른 놈에게 복수를 하겠다 생각한거지.
이놈도 영 바보는 아닌지라 요괴가 아무 이유 없이 습격을 하지는 않았을거고
배후가 있을거라 생각했지.
다행히 잡기에 능하고 아는이 많은 덕에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지.
박씨 집안과 대척점에 있던 문인 집안 중 하나였어.
사실 기세좋은 박씨 집안 기나 좀 죽이려고 가볍게 사주했던 건데
아무래도 일을 받은 놈이 적당히를 모르고 그 사단을 내버린 모양이야.
우습게도 애써 알아낸 그 배후는 이미 박씨집안 사건을 사주했단 사실이 밝혀져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참수를 당해 버린 상황이었어.
업이라면 업이지만 그 덕에 규태의 분노는 그 대상을 잃었지.
그 갈곳잃은 분노가 향한곳은 요괴들이었어.
더욱더 커진 분노가 모든 요괴들을 멸하리라 다짐하게 만든거야.
하지만 단검하나 달랑들고 호기롭게 덤벼든 별볼일 없는 요괴 한 마리에게 초주검이 되고 말았지.
그때 죽어버렸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우스운 이야기는 없었을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나가던 노인에게 구해져 목숨을 연명했고,
한때 대단한 요괴사냥꾼이었다던 그 노인의 밑에서 수련을 할 수 있었지.
부모님이 그렇게 닦달할 때는 멀리하던 수련이었지만
복수심과 분노로 가득한 규태는 쉴틈 없이 자신을 몰아세우며 단련에 단련을 거듭했어.
그리고 3년이 지나 노인의 임종을 지켜본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하산했지.
허접한 단검 대신 손에는 윤회도를 들고. 텅빈 눈두덩이에는 심의안을 박아넣은 채 말이지.
하지만 보구 두 개를 거저 쓸수는 없는 노릇이었어.
대단한 보구들이니 만큼 쓰면 쓸수록 몸안에 요기가 차서
그걸 잘 다스리지 못하면 순식간에 요괴가 되어버릴 터였지.
다행히 규태는 분노로 가득찼을 지언정 어리석지는 않았어.
때문에 자신이 힘을 써야 하는 이유와 요괴를 없애야 하는 이유를 기억하고
또 마음을 다스리고 평온함을 유지 하는데 온 힘을 다했지.
그럼에도 몸안에 요기가 쌓이는건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말이야.
아무튼 완성된 규태는 전국을 떠돌며 요괴들을 퇴치하기 시작했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지.
아주 무시무시한 요괴 사냥꾼이 나타났다고 말이야.
자연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규태에게 물어왔지.
“이름. 이름을 알려주시오. 요괴를 물리치고 저희를 구해주신 은인의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싶소.”
규태는 고민했지.
복수를 다짐하면서 박규태란 인물을 마음속으로 없애버렸거든.
박씨성을 사용할 자격도 없을 뿐더러 이름이랍시고 다른 별호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어.
그러다 문득 아버님과 어머님이 불러주시던 이름을 떠올렸지.
설이야. 라고 불어주시던 어머니. 규태야 라고 불러주시던 아버지.
설이. 규태.
규태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어.
“서리태. 그게 내 이름이다.”
그렇게 조선 최고의 요괴 사냥꾼.
타오르는 한기 서리태가 탄생한거지.
외눈박은 우수의 젖은 얼굴로 이야기를 마쳤다.
“수만번의 칼을 휘둘러 조선땅에서 요괴를 전부 몰아낸 서리태.
마지막 요괴를 베어넘긴 서리태는 그날로 두 개의 보구를 봉인하고
서리태란 이름을 버렸어.
그렇다고 원래 이름을 되찾지는 않았지.
그 이름의 주인은 이미 수백년전 사람이었거든.
그래. 몸에 쌓인 요기로 인해 죽지도 못하고 늙지도 못한 채
억겁의 시간 동안 요괴만 썰어 넘긴거야.
대신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숙원을 이루고 가족의 복수를 끝낸 의미로
가문의 성씨만은 다시 사용하기로 했지.
이제야말로 아버님의 유언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먹기도 했고 말이야.”
외눈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크게 벌린 채 소리쳤다.
“그렇게 탄생한 인물이,
이야기 찾아 조선팔도 두루두루 헤집고 다니는 이야기꾼 외눈박.
바로 이 몸이라 그 말씀이지.
외눈박이 말고 외눈 박!
누가 뭐래도 난 아버님의 성.
가문의 성씨를 이어받은 자랑스런 박가니 말이야.”
외눈박은 크게 소리치는걸로는 부족했는지 호탕하게 웃어보이기 까지했다.
서리태로 살며 수백년간 미소조차 짓지 않은 외눈박이었기에
그의 웃음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복수를 끝내고 나니 세상은 변했고 자신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마침내 성과 웃음을 되찾았지만 돌아갈 집이 없었다.
그렇기에 전국을 떠돌며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말 못 할 바람을 가지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게 박규태든, 서리태든, 외눈박이든 말이다.
“듣는이가 없어 할 말 못할 말 눈치볼 것 없이 떠들 수 있으니 그건 좋구만.
좋아. 이 외눈아재 이야기는 이걸로 끝.
이야기 값으로 편안한 그늘과 시원한 바람까지 받았으니 이제 슬슬 가봐야지.
자. 가자가자. 어여가자.
이야기 전하러 어여차 가보자.”
외눈박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다시금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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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귀루가밀 |
나무는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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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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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게조아yo |
와웅 작가님 글은 언제나 기대기대👍 운동하구 와서 읽어야지 힣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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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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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링스타 
|
ㄷㄷㄷ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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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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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tunuse팬 |
드디어…! 기다렸어용.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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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1 |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네티켓의 기본입니다.게시물에 상관없는 답글이나 추천유도성 답글을 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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