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떠난 낙선당엔 일그러진 정적만이 남았으나, 견고하지 못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를 딱딱대는 낭랑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대들보 거스러미까지 공명시켰고,
뒤이어 금속붙이와 나무가 사정없이 부대끼는 소음이 창호를 거침없이 뚫고 나갔다.
만약 빗소리가 집어삼키지 않았다면 왕의 뒤를 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하..."
말을 채 잊지 못한 것은 동궁（세자가 거주하는 궁） 내관 김한채였다.
극도의 긴장에 양물이 떨어져나간 자리가 다시금 아려왔다.
왕이 벌을 내리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은 온데간데 없는 표정이었다.
천정에 숨겨놓은 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왕에게 고할 수 없었다.
이해득실을 셈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기에 떠올린 실마리들은 모두 중간에 길을 잃어 고언이 되지 못했다.
다른 내관 둘은 한 보 뒤에서 식은 땀을 흘리며 눈만 끔벅댔다.
세자의 저 행동이 어떻게 변질될 지 김한채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말의 요사（妖邪）가 저 귀에 어떤 모습으로 박힐까 짐작할 수 없어 말리는 말조차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콰드득! 빠직!
희번뜩한 빛이 검날을 쫓아 내려오다가 문갑의 철물에 부딪혀 불똥을 터트렸다.
고태미 좋았던 오동나무 문갑은 세자가 휘두른 칼에 거진 넝마가 다 되어 있었다.
지난 일들이 그러했듯 문갑 다음은...
내관들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궁궐의 법도는 내관들의 목숨 아래에 있지 않았다.
결구가 터덩 소리를 내며 쪼개졌고, 곧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원래 그림과 책으로 가득했어야 할 문갑은 속이 휑 비어있었다.
그것은 세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공허함을 채우기에 분노와 화만큼 기세좋은 것이 없었다.
욕지꺼리가 목구멍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개... 같... 은... 노오..."
반역의 기운...
불행인지 다행인지 때를 맞춘 번개가 다시금 빛을 번뜩였고.
천둥이 오기도 전에 세자는 텅빈 문갑 속으로 쥐새끼마냥 튀어 들어갔다.
고개를 처박고 양 손으로 귀를 막았다.
뚫린 입으로는 무언가를 급히 외기 시작했다.
"금일 영가 저 혼신은 혼이라도 오셨으면
（조상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셨다면）
만반진수 흠향을 하고 일배주로 감응을 하야
（준비한 음식과 술을 즐기신 뒤）
살다남으신 명과 복록은 자손 궁에 전하시고
（살다 남은 수명과 복은 자손에게 전하시고）
송경법사 법문을 받아 모질 악（惡）자 악심일랑 버리시고
（열반에 들게 하는 글을 받고 악한 마음을 버리시고）
착할 선（善）자 선심을 돌려 풍화 환란을 제쳐두고 재수 소원 생겨주고
（모든 화를 물려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 주시고）
왕생극락을 들어가서 인도환생을 하오소서
（극락에 가셨다가 인간으로 환생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궐에 출입하던 역술인 김명기를 통해 받은 도교의 주문인 옥추경（玉樞經）이었다.
"세자저하. 이 경을 밤낮으로 외시면 귀신은 그 뼈까지 녹아 혼（魂）은 파훼될 것이고, 백（魄）은 끈기를 잃고 흩어질 것이옵니다."
"이놈의 귀신아! 나를 좀 그만 괴롭혀다오! 뇌성보화천존님이시여. 저놈의 귀신 놈을 번갯불로 튀겨 하루빨리 멸하여 주시옵소서!!"
김한채는 내관들에게 손짓해 몰래 칼을 치우게 했다.
세자의 꼴은 기가막힐 지경이었으나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결코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저분의 심화（心火）가 사그라들길 기다리는 것 뿐.
문갑을 향해 조용히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것 외에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내일은 비가 그치려나...
끝.
오... 지난 화 추천 3개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당~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공게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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