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이 벼루에 처박혀 먹물을 흠뻑 빨아들였다.
검은 거품을 터트리며 가물치처럼 튀어오른 붓은 허공을 크게 두 조각냈다.
궤적을 따라 흩뿌려진 먹물들이 벽에 달라 붙으며 후두둑 소리를 냈다.
보법을 밟는 듯 붓을 휘두르는 이는 저고리를 대충 여민 사내였다.
호방한 붓놀림은 무예의 한 면과 같았다.
사내는 왼손에 끼워진 책을 힐끔거렸다.
그런 와중에서도 붓은 신경써 흐드러뜨렸고, 그의 눈은 연신 책을 번갈아 보았다.
뿌리가 짓이겨진 붓은 향하는 곳마다 먹물을 울컥였다.
벌렁거리는 코가 튀어오른 먹향을 호흡 간에 빨아들였다.
점점 명확해지는 형체들이 벽들을 하나 둘 채워나갔다.
"차앗!" 단말마와 함께 내던져진 붓이 바닥에 갈지자를 그리며 스러졌다.
이어 널부러지듯 앉은 사내는 손을 더듬어 주둥이가 긴 백자를 집어들었다.
꿀꺽대는 목을 타고 액체가 굴곡져 흘러내렸다.
"크아아..." 뱉어낸 회포와 함께 보이는 선명한 그림들.
사면에 도열한 것은 남자 하나와 여자 여덟이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걸어나올 듯 생동감을 내뿜고 있었다.
"끌끌끌... 내 실력이 가히 김홍도보다 낫건만, 이를 떨칠 길이 존재치 않으니 슬프도다."
벽 한 가운데에 적힌 한문 글귀.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
인위적인 일체의 법은
꿈과 환상 같고,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승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볼지어다.
언뜻 평온해 보였던 사내의 얼굴이 천재지변 가운데 놓인 것처럼 삽시간에 푸르락거렸다.
술이 오른 탓일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뭐... 뭐지 이건? 사내는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울화? 아니다. 이건... 아버님이다. 어디선가 아버님이 오시고 있다.
기척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왜인지 알 수 있었다.
책... 그림... 아니다 먼저 이 술병을... 치워...
혼비백산한 손길에 말을 듣는 것은 없었다.
-덜컥
불현듯 문이 열리며 용포를 입은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뒤로는 비색 관복을 입은 신하들이 승냥이같은 눈을 번뜩였다.
용포의 끝단이 물에 젖어 어두운 색을 띠고 있었다.
높은 눈썹, 귓볼이 엷은 칼귀. 매부리코에서 이어진 긴 눈매의 봉안.
좌우지간을 금새 파악한 남자는 위엄을 거두고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읇조렸다.
"이... 이놈이!"
단번에 뿜어낸 멸시의 기운이 말에 붙어 순식간에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의 머리는 이미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달달거리는 이와 입술이 겨우 말을 만들었다.
"상감마마. 이 야심한 시각에... 이... 이곳엔... 어... 어... 어인 일로..."
"오늘 날이 흐리길래 혹시나 네가 상서롭지 못한 짓을 하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비가 내리길래 내 확신했다."
"잘못했사옵니다."
사내의 손이 풀벌레 소리내듯 비벼지니 그 체통없음이 남자의 화를 더욱 돋구었다.
"인의와 충신으로 선을 즐기라고 이름지은 낙선당이건만, 지금 네 행동을 보거라. 되려 선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구나. 잡설붙이에. 술에. 화원이라도 되려는 것이냐. 이 난장의 그림들이 어디 한 나라의 국본이 그릴만한 것이냐. 이곳에서 스승들을 모시고 어디 공부가 되겠느냐? 이 무슨 불충한 짓거리냐."
"비가 오니 무서워 그랬습니다."
사내의 대꾸가 끝나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강한 빛이 한차례 내리쳤다. 빛을 받은 남자의 얼굴은 구겨진 음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 뇌성보화천존... 뇌성보화천존..."
넋이 나간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묘사였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려가며 귀에 담아보려 했지만 머리카락처럼 가는 소리가 닿는 것은 무리였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남자가 용포를 휘날리며 발을 떼는 순간.
바늘이 가면 실이 따르는 법. 큰 뇌성이 번개를 따랐다.
-꽈르릉!
"으아아으아악! 아으윽 아악! 고막이 찢어졌다..."
찢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나 사내는 귀를 붙들고 헛소리를 해댔다. 눈치를 보던 내관들이 사내를 향해 엉거주춤 달려나갔다. 사내는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이 까 뒤짚혀 흰자를 내보이며 까무라쳤다.
"저하! 저하!"
"미... 미쳤..."
남자는 턱을 엄히 끌어올렸다. 더이상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었다. 뒤로 돌아 방문을 나서며 하교했다.
"방안에 있던 것을 모두 가지고 나오라!"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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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공게 여러분.
젊은단테 오랜 만에 인사드립니다.
[오란비]는 '오랫동안 내리는 비'라는 뜻의 순 우리말입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무겁지 않게... 가볍게 찌끄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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