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로 받아달라?”

외눈박의 말에 청년은 조금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은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부디 모시게 해달라. 떠돌이가 될 준비가 되었다. 이건가?”

청년이 고개가 조금 더 크게 끄덕거렸다.

저잣거리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찰나에

웬 청년 하나가 불러세우기에 또 술이나 한 상 얻어먹나 했더니만 한다는 소리가 아주 가관이었다.

“이 마을에 제가 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속박과 굴레를 전부 버리고

그냥 스승님처럼 바람따라 구름따라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냥저냥한 게으름뱅이 청년이겠거니 싶어 적당히 경을 치고 쫓아내려 하고 있을 때, 청년이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짐덩이일 뿐입니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힘쓰는것도 별로에 머리가 좋은것도 아니지요.

뭘 하든 남들보다 곱절은 더 애써봐야 제대로 해먹는게 없으니.

그럴바엔 그냥 전부 버리고 이곳을 떠나 한 마리 새처럼 살고 싶습니다.”

외눈박은 이 청년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그저 일하기 싫으니 무위도식하겠다는 한량 따위가 아니라 부족한 솜씨 탓에 몇 번이나 실패를 맛보고 좌절에 빠진 가여운 청년.

이제는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 기운 없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저 게으른 자라면 모를까. 치유가 필요한 이라면 외눈박에게도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 이 나이쯤 먹었으니 제자 하나 키워봄 직하지. 그래도 말이야.

내 조선 최고라 자부하는 만큼 아무나 받아 줄 수는 없어.

그러니 자네가 내 제자로서 부족함이 없는지 한번 시험해 봐야지.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내가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테니.

귀 쫑긋 세우고 잘 들은 다음에. 이 이야기에서 배울점이 뭐가 있는지 한번 얘기를 해봐.

자네 감상이 그럴싸하다면 제자로 받아주지.”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야기에 청년은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집중하고는 들을 준비를 했다.

“자. 이번에 들려줄 이야기는 저 산 넘고 들 질러 머나먼 마을에 있던 기이한 요괴.

사람한테 들러붙는 기생 요괴 반잡객에 대한 이야기야.”







옛날 멀고먼 마을에 대대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낸 대감댁이 하나 있었지.

윗대로 올라가다 보면 영의정, 좌의정에 좌찬성 우찬성 할 것 없이 두루두루 한번씩은 했던.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뼈대 있는 집안이라 이거지.

그 집에는 이제 외동아들이 하나 있는데.

뭐 크게 모날 것도 없고 모자를것 없는 청년이지만 이게 대감이 볼 땐 조금 부족한거라.

이 노마가 공부는 체질이 아닌지 영 책을 멀리해.

무예는 관심이 좀 있나 싶은데 또 기골은 허한지라 이쪽도 영 별로라 이거지.

마음 같아선 문무를 겸비한 옥석으로 키워내고 싶은데 정작 어느쪽에서도 두각을 못내니 이제 애가 닳을 수밖에.

사실 아들내미가 나름 노력을 하긴 하는데 말이야.

기대치가 있다 보니 뭐든 영 탐탁치 않아 뵈는거라.

혹여나 놀고 있는게 보이면 그걸 또 그냥 두고 보지 못하고 엄하게 잔소리를 한다는 거지.

쉴 새 없이 야단치고 또 몰아세우다 보니 아들은 또 아들 대로 늘상 기가 죽어 있었어.

이래저래 마음처럼 안되니 대감도 아들내미도 한숨만 쉬고 있던 찰나에.

대감댁으로 기괴한 차림의 보따리 장사꾼이 찾아왔어.

거적때기인지 도롱이인지 모를 이상한 걸 뒤집어쓴 그 장사꾼이 말하길

“대감님의 고민을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사옵니다. 아드님의 문제는 바로 게으름.

그 게으름을 물리치는 것이 바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쉴 새 없이 글을 읽고 무예를 익힐 부지런함만 있다면 아드님께선 문무 모두에서 뛰어난 기량을 갖추시게 될 테지요.

이게 바로 그 묘책입니다.”

대감은 그 말에 혹해서 장사꾼이 내미는 상자를 받아들었어.

상자 안에는 말라비틀어진 새까만 대추 같은 요상한게 들어있었지.

“게으름을 고칠 단약입니다. 이걸 통째로 꿀꺽 드시기만 하면,

아드님은 하루를 두 명이 쓰는 것만치 부지런히 움직이실 겁니다.”

뭐 거기에 혹한 대감이 돈주머니를 던져주고는 그 요상한걸 아들에게 먹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자 그래서 아들이 이후로 어떻게 되었느냐? 대감님이 아주 흡족할 만큼 바지런해졌다 이거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는 뒤뜰에서 몸을 가꾸더니만

별빛이 선명해질 때까지 책상머리에 딱 붙어서 글도 읽고 말이야.

그러니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밖에. 그야말로 딱 대감이 바래마지않던 이상적인 아들이 된거지.

얄상한 손톱달이 채 그 살을 땡그랗게 다 찌우기도 전에 아들은 그야말로 문무를 두루 갖춘 인재가 되었어.

그렇게 과거를 봐서 문인이 되건 무과를 봐서 무인이 되건 했으면 좋았겠지만.

뭐 이런 이야기가 늘 그러하듯이 당연히 뭔가 일이 이상하게 되었겠지?

애초에 그 장사꾼이란 작자부터 수상하기 그지없었으니, 그이가 팔아제낀 물건이 제대로 된 물건일리 있나.

그럼 뭐가 문제가 되었냐 하면. 이제 그 아들이 식욕이 막 생기기 시작한거야.

뭐 몸 쓰고 머리 쓰고 하면, 입맛이야 당길테니 그게 뭐 대수냐 싶겠지만,

이게 이게 보통 수준을 한참 넘어간다는 말이지.

조반상 받은지 한시진도 안되어서 배고프다고 닦달을 하는 마당에 부뚜막에선 쉴새 없이 부산을 떨어야 했지.

뼈대있는 대감집 곳간에 쌀이 떨어질 정도로 후지게 퍼먹는데도

그 아들놈은 왠지 모르게 점점 피골이 상접 하더라 이거야.

종국에 가서는 글이고 무예고 다 집어치우고는 방에 틀어박혀서 걸신들린 것 마냥 밥만 축내는 지경이었어.



이쯤되니 이제 대감댁에서도 뭐가 잘못되었구나 싶어서 의원이며 무당이며 다 불러봐도 이게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는거야.

당연히 그 장사꾼이란 놈을 찾을 수도 없었고 말이지.

그러는 동안에 아들은 하루에 쌀 한 가마니를 혼자 다 먹을 정도로 배통이 늘었는데

살이 찌기는커녕 송장이나 마찬가지로 비쩍 마른거라.

다 죽어가는 아들놈 꼴을 보고는 대감댁에서도 이제 정한수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었지.

“아이고 우리 아들 살려만 주십시오. 이제 뭐 아무것도 바라는게 없으니 그냥 살려만 주십시오.”

그렇게 빌고 빈게 도움이 되었는지. 대감댁에 웬 낭인 하나가 찾아왔어.

이름이나 들어봤을지 모르지만. 조선땅에서 첫째로 꼽는 요괴사냥꾼 서리태.

그 이가 나타난 것이지. 서리태는 게걸스럽게 밥을 씹어 삼키는 아들을 보곤 뭐가 문제인지 대번에 알았지.

“반잡객. 반잡객이란 요괴놈이 붙었소. 보아하니 그 도롱이 쓴 장사치한테 몹쓸 물건을 산 모양이군.”

그 장사꾼이 판 그 새까만 대추 같은게 반잡객이의 알이었던 거지.

반잡객은 꼭 거머리 처럼 흐물흐물하니 길다란 요괴인데

사람이 알을 삼키면 그게 배속에서 알을 까가지고는 그대로 몸속에 자리 잡아서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이거지.

그래서 처음 얼마간 그 아들이 그렇게 열심히 움직였던 거야.

그럼 그놈이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느냐?

사람기운이 지나다니는 자리에 턱 자리 잡고 앉아서 열심히 기운을 돌리는거야.

그리고 냇가에 걸어놓은 물레방아 마냥 빙글빙글 돌면서 기운을 조금씩 빨아먹는거지.

사실 처음엔 그렇게 빨아먹는 기운이 그리 엄청난건 아닌데 중요한건 기운을 계속 돌리는게 문제야.

자 생각해봐. 사람이 이제 먹을걸 먹으면 기운이 생기고 그 기운을 돌려서 몸을 움직인다 이거지.

근데 반잡객이 그 기운이 움직이는 길목에 자리잡아서 억지로 돌리면 어떻겠어?

힘은 남아돌고 또 배는 금세 고프고 하겠지?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되냐하면.

그냥 계속 움직이는거야. 넘치는 기운을 써야 되니까.

새벽같이 일어나서 양껏 먹고, 먹어서 기운이 도니 마을 한바퀴 싹 돌아서 땀좀 빼고.

머리로 기운이 자꾸 가니 책도 자꾸 보고. 책도 보다보니 머리에 채워넣는 재미가 붙어서 몰두해서 더보고.

그렇게 기운을 쓰는건 좋지.

근데 이제 반잡객이가 크기가 커지고 잡아먹는 기운이 많아지면,

흘러가는 기운을 조금씩 뽑는게 아니라 그냥 다 빨아 먹는거지.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먹어도 먹어도 기운은 안 나고 배는 계속 고프니 그냥 들어앉아 밥이나 축내는 수 밖에.

서리태가 이 반잡객에 대해 알려주니까 대감댁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자리에 부복하고는 싹싹 빌면서 부탁했어.

“우리 불쌍한 아들. 못난 부모 욕심으로 죽어가는 불쌍한 아들좀 좀 제발 살려주시게.”

서리태는 별다른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서 그 아들을 마당 한가운데로 끌고 나왔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생요괴는 숙주에게 깊게 달라붙어 있어 억지로 떼어내기 어렵소.

요괴 스스로가 숙주를 포기하고 도망나오게 해야 하지. 방법이야 여러 가지 있지만 이게 가장 효과가 좋소.”

그렇게 말한 서리태는 차고 있던 칼을 빼내더니

그 묵직한 칼등으로 다짜고짜 뼈다귀 밖에 안 남은 아들을 무자비하게 패기 시작하는거야.

대감댁에서는 기겁을 하며 말리려고 했지만, 서리태가 벽력같이 소리쳤어.

“움직이지 마시오! 이건 보통칼이 아니니 크게 몸 상하는 일은 없을거요.

진정 아들을 구하고 싶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괴로움은 견디시오.

당신들 욕심이 이 청년에게 준 고통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닐테니.

이번에도 뭣 모르고 나섰다간 영영 아들을 잃을게요!”

그러면서 그야말로 애 잡듯이 두들겨 패는데 그게 어찌나 살벌한지

대감 내외는 물론 수발들던 시종들까지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정도였어.



그렇게 한참 동안을 아들내미 비명소리로 온동네를 채우고 나서야

아들 코에서 길고 새까만 반잡객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어.

숙주를 버리고 도망나온 반잡객은 서리태 발에 가볍게 뭉개졌고 말이지.

아들놈은 혼절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적어도 얼굴은 편안해 보였어.

기운을 빨아먹고 있던 반잡객이 사라져서 이제 좀 힘이 돌았을 테니 말이야.

덩달아 기운이 빠져 마당에 털썩 쓰러져있는 대감을 보고 서리태가 말했어.

“부모라 해서 자식을 몰아세울 자격은 없소.

아들이 잘되길 바라는 그 마음을 내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기대감이란 것은 자식에게 큰 짐을 안겨주기 마련이오.

욕심에 몰아세운 대가로 아들을 잃을뻔 했으니 그 두려움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리고는 기운 없는 아들에게도 한마디 하는걸 잊지 않았지.

“비록 요괴 때문이라고는 하나 몸을 움직이고 글을 읽는 재미를 충분히 보았으리라 짐작한다.

이걸 계기로 노력의 가치를 스스로 깨우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으니

한번 죽었을지 모르는 목숨 소중하게 잘 사용해서 후회가 없도록 해라.”



외눈박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이야기를 마무리를했다.

“서리태의 말을 들은 아들은 크게 깨달았지.

재능이 없으면 어때? 또 능력이 없으면 어떻고. 실패하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또 어떠냐 이 말이야.

아직도 두 다리가 멀쩡히 달려있으니 그냥 뛰어나가면 그만이지. 힘들면 잠깐 걷기도 하고, 또 잠깐 다리쉼도 하고.

때론 주변도 둘러보고 숨 좀 돌리다가 다시 기운이 차면 뛰어나가는 거지.

응? 일착이 아니면 어때? 넘어지면 또 어떠냔 말이야.

잠시 쉬어갈지언정 다시 일어나서 가다가 가다가 보면 무엇이든 되기 마련이야.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 대감집 아들은 포기 않고 꾸준히 문무를 연마해서.

천하의 인재까지는 아니어도 대감 내외가 꾀나 자랑스러워할 법한 멋진 사람이 되었지.

그래 이번 이야기의 결말은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훈훈하네. 자,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

청년은 복잡한 얼굴로 가만히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뭔지 알겠나? 어디 한마디로 정리해 봐. 제대로 맞춘다면 내 받아주지.”

청년은 잠시 더 생각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청년의 얼굴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외눈박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완전히 틀렸어! 이번 이야기의 교훈은 이거야.

‘매에는 장사 없다.’

요괴고 뭐고 간에 그냥 뚜들겨 맞으면 끝이지.

맞추질 못했으니 내 제자로서는 실격이야.

아쉽지만 자넨 계속 이 마을에 살아야겠구만.

제자한테 빌붙어서 호의호식하긴 글렀으니 난 이만 가봐야겠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외눈박의 모습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있던 청년은

뒤늦게 터져나오는 웃음에 한참을 낄낄댄 후 자신있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처음의 그 불안감 가득한 얼굴이 아닌 의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가야지. 누가 뭐라건 도망가지 말고 끝까지 가야지."

청년은 세상에 처음 발을 딛는 것처럼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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