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뭐 얻어먹을게 있다고 이렇게 벌레가 달라붙나...”
외눈박은 귀찮게 달려드는 날파리들을 손을 휘휘 저어 쫒아낸 뒤에 마을로 들어섰다.
아직 시간이 이른지라 젋은이들은 다 일하러 나갔는지
마을엔 삼삼오오 모여 흙장난을 하는 아이들과 대청마루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노인들 뿐이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외눈박은
마을 한켠 그늘진 바위 위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하며 아이들 노는 것을 구경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가려 할 때 쯤, 돌연 아이들 무리에서 누군가 으앙~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툼이 일어나 몸싸움이라도 했는지 엉덩방아를 찧은채 울고있는 아이,
뭔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 거리는 아이.
그 둘을 중심으로 패가 갈려 두 무리로 나뉘어진 아이들까지.
“이거 내가 나서야겠구만.”
점차 아이들의 감정이 격해지는 듯 하자, 외눈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재미있게 잘 노는 듯 하더니만 다툼이라니.
싸우는건 재미 있지가 않단 말이지. 그럼. 재미없고 말고.
내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희가 저 넘어진 아이 일으켜 주고 눈물 뚝 그치면
상으로다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마.
거기 심술이나 입 삐죽거리는 너도 마음 풀고 이야기 들을 준비나 하거라.
세상 듣도 보도 못한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될테니 말이야.”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말에 아이들은 어느새 눈을 빛내며 외눈박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방금 전 까지의 팽팽한 긴장감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역시 애들은 애들이라 생각한 외눈박은 허허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국 팔도 두루두루 헤집고 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 외눈박이라고 하지.
외눈. 박. 내가 박가니 외눈박이 맞지. 안그래?
그냥 편하게 외눈아재라고 불러도 괜찮고.
내 여기서 가만히 보니 너희들 이런 다툼이 하루 이틀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이 마을에 투다니가 내려왔는지도 모르겠어.”
처음 듣는 이름에 아이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궁금해했다.
“그래. 투다니가 뭔지 모르는 듯 하니 내 이야기 해 주지.
자! 이 이야기는 저~ 산 넘고 들 질러 머나먼 마을.
평화로운 숲속 마을을 헤집어 놓은 무서운 요괴 투다니와
그놈이 부리는 벌레떼에 대한 이야기야.”
옛날 멀고 먼 곳에 있는 숲속마을은 사람 좋고 인심좋기로 유명한 곳이었지.
어른들은 부지런하고 아이들은 예의바르고. 어르신들은 존경스러웠지.
마을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잘 살아 갈 수 있었어.
거기선 모두가 부모고 형제고 가족이었지.
뒷집 막냇둥이가 아프다더라 하면 다들 앞다투어 몸에 좋다는 약초를 캐다주었고
건넛집 큰 어르신 몸이 허하시더라 하면 기꺼이 좋은 보양식도 내어드리곤 했지.
내가 베푸는 만큼 나에게도 돌아오니 모두가 웃으며 즐거울 수밖에.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8살난 혜옥이는 이런 마을 사람들이 너무 좋았지.
언제나 기분좋게 인사를 받아주고.
다들 내새끼 챙기듯 먹을거리 챙겨주고.
동무들도 하나같이 자상하고 착해서 늘 행복했어.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마을 사람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어.
처음엔 방앗간 김씨 아저씨.
다음엔 마굿간 최씨 아지매.
이어서 감나무 마당집 큰 어른. 나무꾼 박씨 둘째 딸래미 까지.
아니지 웃음이 사라지다 못해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불도록 차가워진거야.
그걸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 전부가 서로를 아니꼽게 보기 시작했어.
늘 하던 인사도 없어지고.
맛난걸 챙겨주기는 커녕 제대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지.
그러면서 저들끼리 안좋은 얘기를 수근대는거야.
그집 딸래미 몸가짐이 영 헤프더라.
그집 바깥양반 술버릇이 참 그렇더라.
그집 막냇동이 머리가 그렇게 나쁘더라.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만들어져서는 돌아다니던 거지.
혜옥이는 혼자서 생각했어.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거라.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또 욕하고 싫어하고 하진 않을게다.
그렇게 사이 좋던 마을 사람들인데 이건 뭔가 이유가 있을게다.
그걸 찾아야겠다.
그리 생각한거지.
그래서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찾아보니까
뭔가 요상한게 보이더란 말이지.
때가 초가을이라 날이 제법 쌀쌀 할텐데 마을 사람들 머리맡에 벌이 붙어있는거야.
검지 두세마디는 될 법한 큰 벌이 사람 머리칼 속에 척 하니 붙어있는데
아무도 신경도 안쓰고 그냥 도끼눈만 뜨고 시비나 걸고 다니는거라.
혜옥이는 이제 뭔가를 알아냈다.
저 버러지가 문제구나 싶어서 그놈을 잡으려고 하는데.
웬걸 벌레 잡으려고 다가가기가 무섭게 다들 역정을 내면서 내쫒아 버린거지.
“이 기집애가 더러운 손으로 어딜 손을 대! 썩 저리가지 못해!”
벌레가 붙었다. 이상한게 묻었다. 아무리 얘기를 해봐도 듣지를 않는거야.
결국 혜옥이는 포기하고 그 벌레들이 어디서 왔는지 찾기로 했지.
그 와중에도 벌레가 붙은 사람들은 점점 더 예민해 져서는 지나가다가 눈만 마주쳐도 욕을 뱉어냈어.
혈기어린 젊은이들이 쌈박질을 벌인건 뭐 말할 것도 없고.
부지런하던 이들이 그 기운을 다 싸우는데 쏟아부었지.
어르신들은 싫은소리만 내고. 애들은 또 애들대로 예의없이 굴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닌거라.
종국에 가서는 아예 서로 패싸움을 하는게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어.
다들 일도 나가지 않고 어디서 몽둥이며 작대기를 집어와서는
그냥 눈만 마주치면 누구든 두들겨 패는거야.
소리치고 싸우고 누가 두들겨 맞아서 쓰러지고.
쓰러진 이는 또 정신 차리자 마자 뛰어나가서 또 싸우고.
이건 절뚝이로 끝나는게 아니라 조만간 송장 치를 기세였어.
혜옥이 혼자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봐도 벌레가 어디서 왔는지
대체 뭔 놈인지는 도저히 알수가 없었지.
아니, 이제와서는 밖에 돌아다니기도 힘들었어.
괜히 밖에 있다가 눈에라도 띄는날엔 누구든 역정을 내면서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거든.
이제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돌려놓나 하면서 혜옥이가 엉엉 울고있을 때.
마을 안으로 허름한 차림의 낭인 한명이 찾아왔어.
그이가 바로.... 조선 역사상 최고의 요괴 사냥꾼. 서리태였지.
타오르는 한기 서리태. 이 이름을 꼭 기억해 두도록 해.
아무튼 서리태는 마을로 들어서자 마자 몽둥이를 들고 달려드는 마을 장정 셋을
순식간에 제압해서 쓰러트렸어. 그것도 맨손으로.
그리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손을 샥샥 해가지고
그네들 뒷통수에 붙은 벌을 잡아다가 으깨버렸지.
먼 발치에서 그 모습을 본 혜옥이는 한달음에 뛰어나가 서리태에게 매달렸어.
“저희 마을을 구해주시어요.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로 돌려주시어요.”
서리태는 묵묵하게 혜옥이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물었어.
혜옥이가 아는걸 다 말해주자 서리태는 역시 그랬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말했지.
“이 마을에 투다니가 찾아온거다. 투다니는 사람들의 미움과 다툼을 빨아먹고살지.
투다니가 부리는 서반벌은 사람에게 달라붙어서 머릿속으로 미움과 시기를 밀어넣어
누구든 이간질을 시키는 고약한 놈이지.
서반벌을 잡아죽이는건 쉽지만 그렇게 해서는 끝도 없어.
벌레들을 부리는 투다니를 찾아야 한다.”
혜옥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건 뭐든 하겠다면서 있는 힘껏 돕겠다고 했지.
서리태는 혜옥에게 물었어.
“투다니는 밝은곳을 싫어하지. 습하고 지저분한 곳에 몸을 숨긴채 서반벌을 풀고 있을거다.
벌레는 그리 멀리 움직일 수 없어. 분명 마을 안에 그런곳이 있을게다.”
혜옥이는 고민했어. 마을안에 습하고 지저분하고 해가 안드는 곳은 어디일까?
다행히 짚이는 곳이 있었지.
“마을 뒤쪽 버드나무 아래에 더러운 물이 고여 못쓰게 된 우물이 있어요.”
“좋아. 안내해.”
혜옥이는 서리태를 그 우물로 안내했지.
가는 동안 서반벌에 당한 어른 몇 명을 만났지만 서리태에게 금세 제압당했어.
“서반벌에 당한 이들은 기운이 떨어져 몇시진은 꼼짝도 하지 못한다.
보아하니 너만은 마음이 순수하여 서반벌이 다가가지 못하는 듯 하구나.”
차가운 말투였지만 혜옥은 왠지 힘을 얻을 수 있었어.
그간 혼자 무서워했지만, 이제 이사람이 마을을 구해주겠다 싶어 기쁘기도 했지.
그리고 역시나 서리태는 혜옥이를 실망시키지 않았어.
우물쪽에 도착하자마자 서리태가 칼을 뽑아들었지.
묘한 글자들이 신비롭게 음각되어있는 신비한 칼이었어.
그 칼이 뽑히자 마자 사방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싸늘해 지는 느낌이 들었지.
곧 우물 속에서 투다니에 겁에 질린 울음소리가 들려왔어.
‘키에에엑! 키에에엑!!’
우물 밖으로 나오면 순식간에 일도양단 될게 뻔할테니 투다니는 마지막 발버둥으로
자기가 부리던 서반벌을 모두 풀어버린거라.
벌이 서리태의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자기는 도망칠 궁리를 한거야.
하지만 서리태는 딱 세 번 칼을 휘둘러서 우물 밖으로 나오는 서반벌 떼를 모조리 없애 버렸어.
어린 혜옥은 그 경이로운 움직임에 감격했지.
서반벌을 모두 잃은 투다니는 싱거울 정도로 쉽게 잡혔어.
우물에서 끌려나온 투다니는 볼품없는 꼴을 하고 있었지.
덩치는 너댓살 꼬마 정도나 되었으려나?
또래치고는 작은 혜옥이보다도 작아 보였고.
비쩍 말라 뼈가 앙상한 것이 여리한 반면
털은 또 부숭부숭 나있어서 영 보기 흉했지.
등에 맨 커다란 벌통 때문에 더 작아 보이기도 했어.
서리태는 벌벌 떠는 투다니 앞에 칼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어.
“인간을 괴롭히고 세상을 어지럽힌 죄. 너에게 그 죄를 물으마.
네가 감당하지 못할 죄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청산할 수 있는 업이라면 영겁의 시간동안 윤회의 굴레에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리고 휘둘러진 칼에 투다니는 먼지가 돼서 사라지고 말았지.
지옥에 떨어졌는지 윤회의 굴레에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건 그걸로 확실히 대가를 치를 거였어.
일을 마친 서리태는 혜옥에게 다가갔어.
“잘했다. 네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 서반벌이 꼬이지 않은탓에 투다니를 쉽게 찾아 퇴치할 수 있었다.
그 마음 끝까지 잃지 말고 계속 정진하도록 해라.”
그리곤 그답지 않게 자상하게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었지.
뭔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서리태는 간신히 자기 이름 석자만 척 알려주고는
마을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에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어.
하지만 서리태는 혜옥이의 가슴속에 깊이 깊이 새겨져서 그의 말대로
마음을 정진하고 수양하는걸 게을리 하지 않았어.
결국 훗날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어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
외눈박은 집중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에게 말했다.
“재미있는건 서반벌이 요술을 부려서 사람들을 싸우게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야.
그냥 머리에 달라붙어서 계속 속삭이는거지.
미워해라. 시기해라. 질투해라.
단지 그뿐이야. 그런데 고작 그것만으로도 그 친절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욕하는것이지.
사람 맘이란게 다 그런게지.
아주 작은 미움이 불길 마냥 번지고. 작은 다툼이 더 큰 싸움을 만드는 것이야.
그러니 너희 모두 혜옥이 처럼 마음을 다듬고 올바른 생각을 계속 해야겠지?
투다니가 보낸 서반벌이 달라붙지 않도록 말이야.
아까 싸운 애들 어디앉았어?
그래 거기 너희 둘. 너희 뒤통수에 서반벌 붙었나 한번 봐.”
다급하게 뒤통수를 헤집어 보는 아이들을 보며 외눈박은 껄껄 웃었다.
“싸우지들 말고 사이좋게 지내.
다 언제까지고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야.
시간이 흐르면 보고파도 못보게 될테니. 같이 있을 때 사랑하고 아껴주어야지.
좋아. 싸울 마음이 없어졌으면 됐어.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
자 어른들 올 시간 됐다. 해넘어가기 전에 집으로들 들어가.”
언제 싸웠냐는 듯 서로 친근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외눈박은 흐뭇한 얼굴을 해 보였다.
By. neptun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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