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남자가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이십 대 남성이 일반인 4명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도주 중이라는 내용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화면에 범인의 프로필과 몽타주가 띄워지자 남자는 옅게 신음을 흘렸다.

아는 얼굴.

그것도 제법 잘 아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딸이 결혼할 사람이라며 소개시켜 준 사람.

즉 자신의 예비 사위였던 김상혁이라는 청년임이 분명했다.

심란한 듯 표정이 일그러뜨리고 있던 그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왠지 불안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남자의 예상대로 방금전 까지 티브이에 나오고 있던 그 사람.

딸의 약혼녀였던 상혁이 후줄근한 후드를 걸친 채 서 있었다.

“갈 데가 없어서요.”

축 쳐져 있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슬쩍 비켜서서는 상혁을 집안으로 들였다.

남자가 내어주는 차로 몸을 덥힌 상혁이 남자에게 물었다.

“신고는... 안 하실 거죠?”
남자는 작게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뉴스는 상혁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흘끗 보고는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제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번만은 남자 역시 입을 다물고 있지 못했다.

“아니.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나서서 전부 죽였을 거야.”

남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딸의 영정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달이 넘었지만, 딸의 죽음은 아직도 그에게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수정이한테 서류 좀 가져다 달라고 했었거든요.

험한 동네인 거 뻔히 알면서. 그동안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제가 그런 소리만 안 했어도...”

남자 역시 상혁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딸의 죽음이 상혁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네 잘못이 아니야. 급한 일이었고 자네는 위험하니 꼭 택시 타고 오라고 당부했어.

딸애가 돈 아끼겠다고 조금 무리를 한 게 화근이었지.

그 탓을 하자는 건 아니고 그냥 자네 잘못이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은 거야.”

상혁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작은 신음을 흘렸다.

남자가 딸을 잃은 그것만큼 상혁도 수정을 잃은 것이 고통스러운 듯했다.

때문에 스스로 원망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에요. 제 탓이에요. 그 가방. 그 건달 새끼들이 눈독 들였던 가방이요.

그것도 제가 선물한 거였어요. 항상 싸구려 가방만 들고 다니길래 제가 사준 거죠.

아까워서 안 쓴다는 거 제가 억지로 우겨서 어딜 가든 메고 다니도록 했거든요.”

남자는 떠오르는 나쁜 기억에 관자놀이가 지끈해짐을 느끼고는 눈을 감았다.

험한 동네라면 있을법한 건달 무리.

그 5명의 건달은 껄렁하게 사람들 위협하고 가게에서 푼돈이나 훔치는 별 볼 일 없는 이들이었지만,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명품 가방을 메고 가는 딸을 습격했다.

그저 가방만 주고 도망쳤으면 다치는 일은 없었겠지만,

딸애는 자신의 약혼자가 준 가방과 중요한 서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고작 가방 하나 뺐겠다고 그 어린 여자를 때리고 발길질을 하던 건달들은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마음이 급했는지 칼을 꺼내어 마구잡이로 딸을 찌르고는 가방을 뺏어 달아났다.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마주한 딸애의 시신은 참혹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그때 얼마나 처절하게 가방을 지키려 했는지를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슬픔이 몰아쳐 왔지만 남자는 통곡을 하는 대신 감정을 잘 추스르고 상혁을 위로했다.

“그것도 자네 잘못이 아니야. 나쁜 건 그 건달 놈들이지.

그래. 해야 한다면 그놈들을 원망해야지.

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버러지 같은 새끼들!”

분노어린 남자의 말에 상혁 역시 손을 내리고 서슬 퍼런 눈을 떠 보였다.

“맞아요. 그 쓰레기 새끼들. 지금 생각하면 경찰이 그놈들 놓친 게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가서 조곤조곤 다 찢어놓을 수 있으니까.”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섬뜩한 목소리였지만 남자는 두려움보다는 희열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복수가 딸애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음은 달래주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래. 우리 수정이를 죽인 그놈들을 어떻게 처리했나?”

처음으로 상혁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어떻게 보면 무서워 보이기도 했지만 남자는 오히려 만족했다.

“먼저 두 놈을 잡았어요. 꼭꼭 숨어있는 거 고생고생해서 찾았죠.

그놈들 숨어있는 지하 단칸방 쳐들어가서 망치로 대가리를 다 부숴놨어요.

한 놈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다른 한 놈은 간신히 숨만 붙어있었죠.

다른 놈들 어디 있는지 말해 주면 살려주겠다 했더니 술술 불더라고요.

뭐 당연히 살려주지는 않았어요.

망치를 목구멍에 박아 넣어서 완전히 보내버렸죠.

근데 그러고 나니까 조금 후회가 되는 거예요.

이놈들을 이렇게 편하게 보내주면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그래서 다음 두 놈은 최대한 고통스럽게 해주기로 했어요.

먼저 기습으로 기절시켜놓은 다음 의자에 꽁꽁 묶어서 고문했어요.

손톱 뽑고 뼈 부러트리고 혀를 인두로 지지고 눈꺼풀 썰어 버리고...

네놈들이 수정이한테 준 고통 백만 배 천만 배로 갚아주겠다고 호언장담했고 실제로 그렇게 해줬죠.”

끔찍한 이야기. 하지만 남자는 만족스러웠다.

이전에 말한 대로 만약 상혁이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직접 그놈들을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놈들이 눈앞에 있었다면 남자 역시 그놈들을 잔인하게 죽였을 게 분명했다.

“그래. 잘했네.

이 말이 어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했다고 말해 주고 싶어.

누구도 자네를 탓하지 않을걸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상혁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여전히 서슬 퍼런 눈을 하고 있었다.

“아니요. 아직 안 끝났어요.

한 놈 남았거든요. 그놈이 주동자예요.

알아보니까 최근에 도박 빚이 생긴 모양이더라고요.

그걸 감당하려고 강도질을 시작한 것 같은데 제일 악질인 만큼 제일 큰 고통을 줘야지요.

아니 아예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될 만큼 처절하고 끔찍하게 복수할 거예요.”

남자조차 이번엔 오싹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를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상혁에게 가담해 직접 그놈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기에 모든 것은 상혁에게 맡기기로 했다.

“내가 직접 자네와 함께 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자네를 지지하도록 하겠네.

간접적으로나마 내가 뭔가 도울 게 있다면 얘기해 주게.”

남자의 말에 상혁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 안 그래도 부탁드릴 게 있었어요.

제가 쫓기는 몸이라 돈이 조금 필요한 상황입니다.

아, 많이는 아니고 그냥 밥값 정도만이라도 좋으니 돈을 조금 빌릴 수 있을까요?”

남자에게 그런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곧바로 현금 뭉치를 꺼내와서는 상혁에게 내밀었다.

제법 두툼한 봉투를 보고 상혁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이렇게까지 많이는 필요 없어요. 그냥 조금만....”

그런데도 남자의 태도는 단호했다.

“아니. 자네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줄 생각이었네. 그러니 부디 가져가 주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뿐이니.

아, 그런데 이게 좀 이기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내가 도와줬단 말은 말아줬으면 좋겠어.

나까지 공범으로 몰린다면 우리 딸아이 영정을 지키기 곤란해질 테니 이해해주게.”

청년은 걱정 말라는 듯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복수는 어떻게든 끝마치겠습니다. 그럼...”

상혁은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밖으로 나갔다.

상혁이 나가자 남자는 다시금 티브이로 눈을 돌렸다.

상혁이 죽인 이들과 딸아이 사건이 알려졌는지 뉴스에서는 처절한 복수극이라며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시민들의 인터뷰에서는 대부분이 상혁의 편을 들어주며 경찰의 무능함을 질책했다.

남자는 생각했다.

옳은 일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상혁은 자신의 아지트로 돌아왔다.

남자에게는 갈 곳이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기에 안전한 거처 정도는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에게 찾아간 것은 첫 번째로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고 두 번째는....

“우리 예비 장인어른 통도 크시네. 아 지금은 예비도 아니고 그냥 남인가?”

기대 이상의 금액에 만족하며 칠판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지금까지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모든 것들이 적혀있었다.

도망친 건달을 찾기 위한 정보원 확보.

그리고 그들을 습격할 무기들 준비.

시간을 거슬러 그 전으로 되돌려 보면 건달들을 꾀어내기 위한 도박사 고용과 수정을 끌어들이기 위한 서류 미끼.

그리고 가방 선물.

그보다 전으로 돌려본다면 수정에게 접근해 사람 좋은 연기를 펼치며 일여 년 만에 그녀의 약혼자가 된 것까지.

상혁은 칠판 한가운데 붙어있는 수정의 사진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근데 넌 이해 못 하는 그런 게 있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나쁜 습관을 지닌 사람들이.

근데 이게 숨어서 사람 죽이고 다니는 건 영 못 할 짓이더라고.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아무도 내가 죽인 줄 모르니까 흥이 안나.

그래서 좀 큰 판을 벌인 거지.

사람들 지지를 받으면서 마음껏 날뛸 수 있게.

그러기 위해서 네가 희생된 거야.

사랑하는..... 아 물론 진짜 사랑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대외적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남자는, 뭐랄까? 권리.

그래 복수를 할 수 있는.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거거든.

봐. 똑같은 살인인데 그 건달 놈들은 악당이고 난 모두에게 지지받고 있어.

이걸 바랬거든. 당신 아버지도 똑같아.

나한테 돈을 주면서 응원해주고 있어.

모르긴 해도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도 다 날 도와주겠다고 난리일걸?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 정도로 내 생각대로 척척 풀릴지는 몰랐는데 좋지 뭐.”

상혁은 사진에서 눈을 떼고는 칠판 너머 한쪽에 묶여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분명 마지막 남은 건달이었다.

“그리고 저놈까지 천천히 가지고 놀다가 죽이고 나면, 정의롭고 단호한 얼굴로 자수를 해야지.

마침내 죽은 애인의 복수를 마치고 결연한 표정으로 대중 앞에 나선 남자.

좀 궁금해지네. 사람들은 날 보면서 뭐라고 할까?

감옥 가는 거야 피할 수 없겠지만 뭐 됐어.

나 같은 사람들 팔자지 뭐.

대신 그전까지 아쉬울 것 없이 실컷 즐겨야지.

어차피 모두가 내 편이니까.”

상혁은 이미 엉망이 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건달에게 다가가며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자 여러분! 5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한 여자를 속여 미끼로 던져넣은 이 싸이코 살인마에게 박수갈채를 부탁드립니다.”


By. neptunuse